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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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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밴드 공연’을 한 시간 앞둔 최형동(35·H그룹 해외영업팀 근무) 씨가 밴드 멤버들과 마지막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 씨는 5명으로 구성된 모던재즈 밴드 ‘내스티 & 블루’에서 드럼을 맡고 있다. “공연을 시작하기 바로 전에는 처음 담배를 피울 때처럼 묘한 어지러움을 느끼죠. 그러나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긴장감은 사라지고 에너지가 솟구칩니다. 박수를 많이 받으면 더 신이 납니다.”》
■‘음악은 나의 힘’ 직장인밴드를 하는 사람들
2001년 처음 무대에 섰을 때는 너무 떨려서 관객의 얼굴도 보이지 않고 제대로 드럼은 쳤는지 기억도 안 났다. 이제는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2시간 정도 공연에 힘을 쏟아 붓고 무대를 내려오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실력을 온전히 보여 주지 못했다”면서 속상해하는 멤버도 있다. 공연을 끝낸 후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인근 술집에서 맥주 한잔으로 달랜다.
“언제나 ‘다음에는 더 잘하자’는 다짐으로 술자리를 끝내죠.” 최 씨는 이날도 멤버들과 함께 다시 연습장으로 향했다.
○ 인생의 2막은 음악과 함께
직장인 밴드 멤버들은 낮에는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저녁 때나 주말에 틈틈이 시간을 내서 연습을 하고 공연도 한다. 공연을 앞둔 2, 3주 동안은 금요일 저녁부터 연습실에 틀어 박혀 주말 내내 연습에 몰두한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음악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어느 프로 밴드 못지않다.
최 씨는 “‘아마추어니까 실력이 없어도 양해바랍니다’라는 말은 우리 사전에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내스티 & 블루’ 멤버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두 명의 여성 멤버인 김민주(30·보컬) 씨와 이혜진(25·키보드) 씨는 각각 이벤트회사와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다. 베이스를 맡고 있는 조정훈(35) 씨는 위성방송 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기타리스트 손세희(31) 씨는 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다.
보컬인 김 씨는 “일할 때는 음악에 대한 잡념은 버리고 철저히 일에만 집중한다”면서 “주말에 멤버들이 모여 음악을 할 생각을 하면 오히려 일하는 것이 더 신이 난다”고 말했다.
○ 직장-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훌훌 날리죠
30, 40대 직장인 멤버로 구성된 ‘블루D’ 밴드는 블루스 곡을 주로 연주한다. 미국의 유명 블루스 기타리스트 B B 킹의 곡들이 주요 레퍼토리다.
드럼을 맡고 있는 이동현(48·부동산 컨설팅) 씨는 “아무리 직장 일이 바빠도 신기하게도 음악 연습할 때는 빠지는 사람이 없다”면서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해 가며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직장이나 가정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풀린다”고 말했다.
직장인 밴드의 가족은 처음에는 “웬 밴드?”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나중에는 열성적인 후원자로 변한다. 직장 생활에 찌들었던 남편 또는 아내가 밴드 생활을 하며 활기를 되찾아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처음에는 ‘아직도 철이 안 들었느냐’면서 혀를 차던 아내가 지금은 공연이 있는 날이면 앞줄에 앉아 열심히 박수치는 열성 팬이 됐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밴드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일까.
‘내스티 & 블루’의 드러머 최 씨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실천했을 때 어떤 결실을 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3인조 ‘밴드메이’의 보컬 김유석(33·아르바이트) 씨의 꿈은 더 구체적이다. 그는 “관객을 열광하게 만드는 곡을 직접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밴드메이’는 2005년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 싱글을 선보이기도 했다.
○ 슈퍼맨 아니어도 할 수 있다
직장인 밴드 멤버들은 직장, 가정, 밴드 활동을 하면서 하루 24시간을 꽉 차게 산다.
그들은 슈퍼맨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술 마시는 것보다 시간과 돈이 더 적게 듭니다.”
밴드 활동을 하는 데 월평균 5만∼15만 원이 든다. 서울 송파구의 한 건물 지하에 연습실을 마련한 ‘내스티 & 블루’는 매달 4만 원의 관리비를 낸다. 여기에 밥값과 술값을 보태면 매달 10만 원 정도의 경비가 든다.
새로 악기를 배우는 사람은 조금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현대상선 사내 밴드 ‘록캐리어’의 정우영(30·베이스) 씨는 월 10만∼15만 원을 베이스 개인 강습 비용으로 쓴다.
대부분의 직장인 밴드는 주중에는 집에서 각자 연습하고 주말에 모인다. ‘록캐리어’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이용준(32) 씨는 “주중에 평균 5시간 정도 혼자 연습하고 주말에 다른 멤버들과 맞춰 본다”고 말했다.
직장인 밴드를 결성한 이들에게 음악은 생계를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떼어 버릴 수도 없는 존재다.
‘내스티 & 블루’의 최 씨는 해외 출장 갈 때도 드럼 스틱을 챙겨가 이것저것 두드리며 연습을 할 정도로 밴드 사랑이 넘쳐 난다.
‘블루D’의 드러머 이 씨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동료들과 블루스를 함께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직밴’ 대환영▼
시민축제 등 공연무대-연습공간 부쩍 늘어
직장인 밴드의 실력은 천차만별이다. 실력이 좋으면 그만큼 공연 기회도 많이 잡을 수 있다.
실력이 뛰어난 직장인 밴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시하는 시민참여 행사에 선발돼 무대와 음향장비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
서울시 ‘하이서울 페스티벌’과 부산시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은 각각 ‘유토피아’와 ‘BR+1’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참여 공연을 실시해 왔다. 1차 서류심사와 2차 실기심사를 거쳐 10여 개 밴드를 선발한다. 문화 공간에서 제공하는 공연 기회도 많다. 대림미술관은 매달 1회 ‘직장인 밴드 공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음악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로 관람객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SBS FM 라디오 ‘김창렬의 올드스쿨’ 프로그램은 실력 좋은 직장인 밴드를 선발해 소개하는 코너를 운영한다. 직장인 밴드의 가장 큰 소망 중 하나는 자신들만의 연습실을 갖는 것이다. 2001년 ‘블루D’는 밴드를 시작하면서 상가 건물 지하에 연습실을 마련했다. 보증금 300만 원, 방음 설비 1500만 원, 녹음 장비 300만 원 등 총 2100만 원이 들었다.
직장인 밴드는 프로 밴드처럼 연습실을 상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만큼 연습실을 교대로 사용할 수 있다. ‘블루D’ 연습실은 직장인 밴드 3팀이 돌아가면서 사용한다.
최근에는 직장인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사내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에 초청받기도 하고 홍익대 인근 클럽에서 연주할 수도 있다. 홍익대 앞 클럽에서 연주하려면 시간당 5만∼10만 원의 대관료를 내고 클럽을 빌려서 공연을 한다.
| 직장인밴드 공연 프로그램 | |||
| 공연 | 시간 | 장소 | 특징 |
| 대림미술관 ‘직장인밴드 공연’ |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3시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 | 실내 무대 무료 제공 (02-720-0667) |
| SBS 파워FM ‘김창렬의 올드스쿨’ | 매주 토요일 | SBS 스튜디오 | ‘김창렬의 올드스쿨’ 내 ‘우리직밴’ 코너에 소개 (02-2061-0006) |
| 하이서울페스티벌 중 ‘유토피아’ | 매년 4, 5월 | 서울광장 및 광화문, 청계천, 명동 일대 | 2차 심사 후 8∼10개 밴드 선정. 음향장비 및 무대 무료 제공 |
| 부산국제록페스티벌 중 ‘BR+1’ | 매년 8월 첫째 주 | 다대포 해수욕장 | 2차 심사 후 10여 개 밴드 선발. 음향장비 및 무대 무료 제공 |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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