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은 이 말에 울었다…폭우 피해 왕조실록에 나타나

  • 입력 2006년 7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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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청계천 준설공사를 기념한 행사를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영조가 다리 위에서 행사를 지켜보는 이 그림은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대 규장각
1760년 청계천 준설공사를 기념한 행사를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영조가 다리 위에서 행사를 지켜보는 이 그림은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대 규장각
“비가 억수같이 내리더니 갑자기 큰 홍수가 졌는데 영월은 상류부터 물이 범람해 100년 된 거목들이 뿌리째 떠내려갔고 침수된 논밭을 이루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영월은 339채의 인가가, 인제는 102채가 떠내려갔습니다. 양양은 100여 호의 인가와 재산과 가축이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강원도의 명산(名山)도 무너졌다고 합니다.”

마치 최근 폭우로 빚어진 강원 일대의 피해 상황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선조 38년(1605) 7월 23일과 8월 1일에 강원 감사(도지사)가 올린 보고서의 일부다.

조선시대에도 홍수 피해가 잦았다. 홍수가 발생하면 왕은 자신의 부덕을 개탄했고 대처에 늑장을 부린 관리를 파면하거나 이재민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수로 정비도 했다. 조선시대의 수해와 그 대책을 살펴보면 ‘치수(治水)’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 중앙 시스템 부실할 때 피해 집중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현준 수석연구원의 논문 ‘조선왕조실록에서 본 홍수와 가뭄’에 따르면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0여 년간의 왕조실록에 기록된 홍수의 발생 건수는 476건에 이른다.

특히 명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129년간 일어난 수해는 조선 전체 수해 건수의 절반을 넘는다. 이 시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중앙정부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탓으로 김 연구원은 분석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사관에 따라 자연재해는 군주의 덕이 부족하고 백성의 풍속이 옳지 못할 때 하늘에서 보내는 경고라고 해석했다. 수해가 일어나면 군주는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고 그 후에 백성들을 교화했다. 자연재해를 ‘천재(天災)성 인재(人災)’로 본 것이다.

○ 늑장대처 관리들 엄벌

조선에서는 홍수로 인한 산사태와 하천의 범람은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 토사가 유출된 것이 원인이라며 산림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수로 정비 등 하천 공사도 병행했다. 영조 36년 청계천 인근의 논밭을 조정에서 사들여 나무를 심고 해마다 보수작업을 했다는 기록이나 성종 대에 용산강(한강의 일부)의 물길을 돌리는 작업을 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하천공사 관련 기록은 132회에 이른다.

조정은 피해 상황을 파악한 뒤 구제책을 제시했다. 재해에 대한 늑장 지원은 엄벌에 처했다. 세종 17년 7월의 기록에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3일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관리를 파면시킨 사례가 나온다.

세금을 줄이는 것도 주요 구제책이었다. 태종 1년 때 “수해로 인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려 하면 그들이 먹을 곡식은 어디에 있겠습니까”라며 세금과 부역을 면제한 기록이 나온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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