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영화 속‘외출’은 진짜‘외출’일까

  • 입력 2005년 9월 2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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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수(배용준)와 서영(손예진)은 일생일대의 ‘외출’을 한 걸까.” 허진호 감독의 ‘외출’. 유부남 유부녀의 금지된 사랑을 담은 이 영화 속 리얼리티를 두고 말들이 많다. 불륜의 현실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불륜을 소재로 만든 또 하나의 ‘러브 로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인생에서 실제로 ‘외출’을 경험했다고 고백한 30대 후반의 유부남 A(회사원) 씨는 이 영화를 보고 “허 감독이 노총각이라 그런지 유부남 유부녀의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A 씨는 “불륜은 용납될 수 없다.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인간이 이 땅에 없기를 바란다”면서 이 영화가 가진 비현실적 설정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①‘Before & After’의 비현실

불륜에서 성관계는 이를테면 만리장성 같은 것이다. 그것을 넘기 전에는 서로 서먹하지만, 일단 넘으면 둘은 거리낌 없어진다. 섹스란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둘은 속도 제한이 없는 아우토반과 같은 사이가 된다. 그러나 ‘외출’ 속 인수와 서영을 보자. 섹스 전과 섹스 후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친밀도나 농도의 변화 없이 시적(詩的)이며 한가하다.

②‘섹스’의 비현실

영화에선 두 번의 베드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절박하기보다는 느긋하고 탐미적인 쪽에 가깝다. 물론 그런 섹스도 있겠지만, 난생 처음 외도를 ‘결행’하는 유부남 유부녀의 섹스는 아니다. 첫 번째 베드신에서 인수와 서영의 행동을 관찰해 보자.

‘서영이 인수의 안경을 서서히 벗기고 얼굴을 살짝 쓰다듬는다→둘은 할 듯 말 듯 감질난 키스를 했다가 이내 떨어진다→인수가 서영의 캐미솔(러닝셔츠 같은 속옷의 일종)을 스르르 벗긴다→서영은 인수의 우람한 가슴과 더불어 복부에 또렷이 새겨진 왕(王)자를 손끝으로 스치듯 더듬는다→인수는 서영의 입술을 오른손 엄지로 잠깐 문지른 뒤 천천히 손을 몸으로 내린다. 다시 서영이 입은 치마의 지퍼를 스륵 내린다. 서영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서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장면이 바뀌면 둘은 이미 섹스 끝).’

‘해피 엔드’에서 전도연과 주진모가 나누는 섹스를 보았는가. 그것이 불륜의 섹스다. 불륜의 섹스는 절박하고 때론 과격하며 아름답기보다는 뭔가에 쫓기듯 강박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성관계는 너무도 침착하고 다소곳해서, 마치 호기심 많은 대학생들이 난생 처음 저지르는 불장난처럼 보인다.

③‘생활’이 증발된 비현실

서영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사실을 듣고 급박하게 병원으로 뛰어오는 순간에도, 남편의 외도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하는 순간에도, 유부남인 인수와 바람을 피우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똑같은 귀걸이를 착용한다. 심지어 남편이 야기한 교통사고로 희생당한 피해자의 집을 조문(弔問)할 때도 똑같이 ‘발랄한’ 귀걸이. 여자, 특히 유부녀는 외적 환경과 자신의 감정상태에 따라 매니큐어나 립스틱, 귀걸이, 목걸이의 착용 여부나 종류를 달리한다. 혹시 손예진은 서영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예쁜 손예진’에 더 관심을 가진 건 아닐까. 배용준이 시종 변함없이 끼고 있는 왼쪽 새끼손가락의 아름다운 금반지도 마찬가지. 아, 말하고 싶다. 불륜은 판타지가 아니라 불행한 현실이라고.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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