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장진의 말잔치

  • 입력 2005년 9월 1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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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장진이야!” “이게 뭐야. 황당하네.”

여성 카피라이터 살해 사건을 다룬 장진 감독의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를 보고 난 관객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영화는 미스터리극의 기존 문법을 벗어던지고 ‘크고 작은’ 말들을 속사포처럼 주고받으며 만담(漫談)처럼 굴러가니 말이다. 이런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바로 장진 영화의 본질. 그의 영화는 ‘말’ 자체가 스타일이요, 심지어 스펙터클이다. 그럼 장진이 구사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의 본질은 뭘까? 그건 이름 하여 ‘온탕 냉탕’ 코드다. 이 코드는 일견 장난스럽고 철이 덜 든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논리 장난’이다.

①말(言)과 말의 ‘온탕 냉탕’=‘뜨거운’ 말과 ‘차가운’ 말을 교차해 배치한다. 급박하고 심각한 말로 관객의 숨통을 콱 조였다가는 이내 우스꽝스러운 말로 긴장을 확 풀어헤친다. 진지해진 분위기를 스스로 조롱하는 이런 태도는 장진 영화의 DNA나 다름없는 ‘대사의 탄력성’을 만들어 낸다. 취조실에서 벌어지는 최 검사(차승원)와 살인 용의자 영훈(신하균)의 대화.

“김영훈, 너 나한테 말할 때 1형식 문장으로만 말해. 주어 동사…, 그거로만 말해. 쓸데없는 형용어구 관용어구 넣었다간 이빨 다 부숴버릴 거야. 알았어?”(검사·진지함)→“나는… 알았습니다.”(용의자·가벼움)→“휘발유통 왜 들고 갔어?”(검사·진지함)→“나는…불을 지르려고 했습니다.”(용의자·진지함)→“3형식이잖아. ×새끼야. 목적어 ‘불을’을 빼고 ‘난 범인입니다’ 이렇게 말해. 휘발유통 왜 들고 갔어?”(검사·가벼움)→“나는…힘듭니다.”(용의자·가벼움)→“뭐가?”(검사·진지함)→“1형식은…힘듭니다.”(용의자·가벼움)

이 짧은 대화에도 ‘온↔냉↔온〓온↔냉〓냉↔온↔냉’의 논리적 온도 변화와 치밀한 온도 균형(‘온’3 대 ‘냉’3)이 숨어 있는 것.

②표정과 대사의 ‘온탕 냉탕’=‘진지한’ 표정으로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썰렁한’ 대사로 이완시킨다. 피해 여성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던 일본인 부부가 참고인 신분으로 수사관 앞에 불려간 장면. 부부는 심각한 표정으로(긴장) “엘리베이터에서 4층을 4라고 안 쓰고 왜 F라고 쓰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이완)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최 검사에게 ‘살인 사건 해결의 최대 난점’을 고백하는 수사반장도 마찬가지. 무심한 표정의 반장은 톤의 변화가 없이, 자못 낮은 목소리로(긴장) “사람을 죽인다는 건 중요한 문제야. 물론 누구나 다 죽지. 그렇다고 누구나의 죽음이 다 중요한 문제냐? 아니지. 살인을 당했느냐 혹은 살인했느냐 이건데…. 그렇다고 살인이 꼭 누굴 죽여야 살인은 아니지. 죽었는데도 살인이라고 안 하는 것도 있고 살인인데도 죽이지 않은 것이 있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대사(이완)를 구사해 속을 뒤집어 놓는다.

③상황과 상황의 ‘온탕 냉탕’=큰 덩어리로 볼 때도, 영화 속 에피소드들은 온탕과 냉탕의 온도차를 보인다. 심각한 상황과 냉소적이고 장난스러운 상황을 맞붙이는 것. 영화에 빠져들 만하면 확 깨버리는 야릇한 감정의 기복을 관객들이 되풀이 경험하는 것도 이런 ‘온탕 냉탕’의 에피소드 배열 구조에서 비롯된다(그래픽 참조).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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