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수박으로 번진 ‘기후플레이션’
부여-함안-달성 등 주요 산지, 2월 일조량 절반으로 뚝 떨어져
4kg 안 되는 수박 줄줄이 나와… 작년보다 도매가 약 30% 상승
‘金수박’ 전망에 정부도 지원 검토… “기후 위기에 강한 품종 개발해야“
《金사과 이어 올여름 ‘金수박’ 조짐
‘금(金)사과’로 대표되는 과일 가격 오름세가 진정되지 않고 있다. 여름 대표 과일인 수박도 이상 기후로 일조량이 급감해 잘 자라지 못하며 가격이 치솟고 있다. 기후 변화에 강한 품종 개발 등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년 수박 농사를 지으면서 뿌리째 다 뽑고 모종을 다시 심은 건 올해가 처음이네요.”
충남 부여군에서 수박 농가를 운영하는 한 농장주는 비닐하우스 11개 동(약 2400평)에 심었던 수박을 올해 2월 모두 뽑아냈다. 그달 나흘 연속 비가 오는 등 흐린 날씨에 햇볕이 부족하다 보니 수박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해 초 전국 수박 최대 생산지인 부여를 비롯해 주요 수박 산지에서는 일조량 부족으로 꽃 수정이 안 되거나 열매가 자라지 않는 피해가 잇따랐다. 10일 부여군에 따르면 작황 부진 피해가 접수된 관내 수박 농가는 올해 초에만 268곳으로 피해 면적은 161ha(약 48만7025평)에 이른다. 농장주는 “올해 수박 수확량은 작년의 60% 수준에 그칠 듯하다. 다시 심은 수박만이라도 잘 자라도록 날씨가 따라주길 바랄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문가들은 이상기후가 과일 물가를 밀어 올리는 이른바 ‘기후플레이션’(기후+인플레이션) 현상이 대다수 과일 품목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날 것이란 우려를 내놓고 있다.
● 일조량 감소로 수확량 줄어
최근 잦은 비와 일조량 부족 등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사과와 배 같은 주요 과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가운데 여름철 대표 과일인 수박도 수확량 급감으로 가격이 치솟았다.
10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판매하는 수박(상품) 10kg 한 상자 도매가격은 이달 1∼8일 기준 평균 3만5798원이다. 지난해 5월 1∼8일 평균인 2만7642원과 비교하면 30% 비싸다.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에서 파는 수박(상품) 1통 소매가격도 같은 기간 2만1101원에서 2만5032원으로 19% 상승했다.
수박값이 오른 건 역대급 일조량 감소로 수확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가 발표한 농업관측 5월호에 따르면 올해 2월 부여군의 일조 시간은 102.7시간으로 지난해(182.8시간)에 비해 43.8% 줄었다. 최근 10년 평균(175.7시간)과 비교해도 일조 시간이 41.5% 부족했다. 같은 달 경남 함안·의령군(121.4시간)과 대구 달성군·경북 고령군(110.2시간) 일조 시간은 10년 평균 대비 3분의 2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햇빛을 충분히 쐬지 못하자 수정 장애와 생육 부진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부여군은 수박의 주요 수정 시기인 2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일조량 부족은 물론이고 강수량이 평년 대비 5배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꽃가루가 나오지 않으니 통상 95∼98%에 이르던 수정률이 70∼80%로 뚝 떨어졌다.
다른 수박 산지도 비슷한 피해를 겪었다. 강대훈 함안군수박생산자협의회장은 “보통 수박 1통 무게가 4∼6kg 이상인데 올해 날씨 피해가 심한 농가에선 4kg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박이 절반 이상이었다”며 “35년 이상 수박 농사 지으며 극심한 일조량 피해를 겪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 이상기후가 끌어올린 과일값
열매 성장이 더딘 만큼 수박 출하 시기는 예년 대비 늦어지고 있다. 농업관측센터는 이달 전국 수박 수확량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8%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출하 면적은 지난해보다 2% 증가하는 데 그치면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전년 대비 10% 하락했다. 지난달 가락시장 반입량은 1393t으로 지난해 같은 달(1999t)보다 30% 감소하는 등 현재 시장에 수박 공급량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그나마 지난달에는 일조량이 2, 3월 대비 나아졌다. 충청과 영남 지역에서 미뤄졌던 상품 출하가 이달 중순부터는 조금씩 활기를 찾을 것이란 예상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수박이 시장에 많이 풀리면 가격은 다소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기상 악화 우려와 인력 부족으로 재배 규모가 이전보다 줄어든 만큼 초여름에는 지난해보다 비싼 수박을 사먹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향후 날씨를 변수로 보고 경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예상을 넘어선 불볕더위와 폭우로 공급이 줄면서 사과값이 2배 가까이 급등했던 것처럼 수박에서도 ‘금(金)사과’ 현상이 재연될 수도 있단 우려에서다. 농식품부는 일조 시간 부족과 고온 등에 대비해 지자체, 생산자 단체와 함께 생육 관리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또 이달 수박 수급 상황과 가격 동향에 따라 도매가를 낮추기 위한 납품단가 지원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상기후로 인한 과채 가격 폭등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기상청이 환경부와 농림축산식품부 등 12개 정부 부처와 공동 발간한 ‘2023년 이상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겨울철 많은 비와 큰 기온 폭을 보이는 등 극한 기후가 나타났다. 현재 수준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하는 고탄소 시나리오(SSP5-8.5)를 적용했을 때 2051년 이후 이상폭염 현상이 2년마다 나타나며 21세기 말에는 매년 나타나는 등 이상기후 빈도가 높아질 것으로 예측된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향후 이상기후가 빈번해지면서 과일 물가 상승 폭이 점차 커질 수밖에 없다”며 “국내 과일 생산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기후 위기에 강한 품종과 스마트 농업 시설 연구를 지원하고 일선 농가에 기술을 보급하는 등 중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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