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퇴직한 ‘철학적 유목민’ 김형효 교수

  • 입력 200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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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에 심취해 가톨릭 신자가 됐다가 해체주의에 심취하면서 불교도가 된 김형효 교수.“예수님이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가르쳐 준 시각(始覺)이라면 부처님은 본질적 깨달음의 내용을 알려주신 본각(本覺)”이라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실존주의에 심취해 가톨릭 신자가 됐다가 해체주의에 심취하면서 불교도가 된 김형효 교수.“예수님이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가르쳐 준 시각(始覺)이라면 부처님은 본질적 깨달음의 내용을 알려주신 본각(本覺)”이라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지난달 말로 한국학중앙연구원(옛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정년퇴직한 김형효(65) 교수는 근면한 농부와 같은 철학자다. 그는 동서고금의 철학 사조의 씨앗을 마음의 밭에 뿌리고 이를 기나긴 시간 성실히 가꿨다. 또한 그렇게 해서 수확한 결실들을 20여 권의 저술로 펴냈다. 그 과정에서 ‘강의 시간이 적어 공부할 시간을 덜 뺏긴다’는 이유로 서강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교수는 또한 사유의 터전을 계속 옮겨 다녔다는 점에서 유목민 같은 철학자다. 그는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을 전공했다. 그가 가톨릭 신자(세례명 베드로)가 된 것도, 가톨릭계 학교인 벨기에 루뱅대로 유학을 떠난 것도 마르셀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쓴 뒤 그는 구조주의로 관심을 옮겼고 다시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이동했다. 동양철학도 유가철학에서 시작해 노장사상과 불교철학으로 관심영역을 옮겨 다녔다. 그는 3년 전부터 청화(淸華), 숭산(崇山), 혜거(惠炬) 등 3명의 고승과 인연을 맺고 불교에 입문했다.

퇴임 후 연구공간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자택의 서재로 옮겨 여전히 용맹정진 중인 그를 12일 만났다.

김 교수는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로 다시 해체주의로 변신을 거듭한 이유를 “과연 진리는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의식 그 하나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철학자가 전공의 틀 안에 묶인다면 그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다른 학문과 달리 철학의 대상은 사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전공의 벽에 갇힌 철학은 불교용어로 ‘마른 지식’에 불과합니다. 학생들은 세상에 대한 총체적 지혜를 얻고 싶어 하는데 한국의 철학 스승들은 단절된 대답만 들려줍니다. 한국의 철학이 깊이와 활기를 잃어가고 다른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철학의 빈곤에 시달리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니체는 일찍이 철학자와 철학노동자(철학교수)를 구분하면서 철학자는 자신의 사유를 펼치지만 철학노동자는 남의 사상을 받아쓰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현역 시절 넓고 깊은 철학의 산하를 누볐던 김 교수도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동서고금의 철학사를 구성주의(constructionism)와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의 변주로 본다. 구성주의는 인간 이성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재정립해야 한다는 사유이고, 해체주의는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사유다. 구성주의는 다시 인간의 이기적 본능의 합리적 충족을 추구하는 경제실용주의와 도덕의 확립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겠다는 도덕명분주의로 나뉜다.

그의 사유를 좇아가다 보면 오늘날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란 것도 결국 경제실용주의와 도덕명분주의의 다툼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과연 제3의 길로서 해체주의가 실천 가능할까.

“인간의 마음에는 본능(本能)과 본성(本性)이 함께 숨어 있습니다. 경제실용주의가 본능에 충실하다면 도덕명분주의는 본능을 억압하려 합니다. 반면 해체주의는 본성 중심의 사유입니다. 본능의 이익이 이기적이고 배타적 이익이라면 본성의 이익은 스스로를 분비함으로써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에서 말하는 업(業)으로 풀면 부정적인 업장(業障)과 긍정적 직업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개성과 능력을 표출하고 그것이 성공으로 이뤄질 때 세상에 대한 보시(布施)가 절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는 잠시 정치에 뛰어든 경험이 있다. 대학시절 은사였던 고 박종홍 서울대 교수의 영향으로 제5공화국 초기 3년간 전국구의원을 지낸 것. 그는 “민족중흥에 일신을 바치자는 생각에 정치에 뛰어들었으나 정치가 나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에 학문의 세계로 돌아왔다”면서 “정치 참여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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