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절망의 섬에 희망을]<下>청소년 봉사 체험

  • 입력 2005년 6월 2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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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소록도병원 노인병동에서 자원봉사자가 아침 식사를 마친 할머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다. 한센인의 슬픔을 알고 그들을 편견없이, 거리낌없이 대하는 봉사자들에게서 희망을 찾게 된다. 소록도=김미옥 기자
국립 소록도병원 노인병동에서 자원봉사자가 아침 식사를 마친 할머니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다. 한센인의 슬픔을 알고 그들을 편견없이, 거리낌없이 대하는 봉사자들에게서 희망을 찾게 된다. 소록도=김미옥 기자
《소록도의 시간은 도시와 다르게 흐른다. 22일 오전 3시, 섬 곳곳에서 하나 둘씩 전등불이 켜졌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소록도 사람들은 작은 골목길을 지나 교회로 향했다. 억압과 편견과 인고의 세월을 이들은 기도에 의지하며 보냈다. 1시간쯤 지나 한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교회 문을 나설 무렵 국립 소록도병원 뒤편의 자원봉사회관에 불이 켜졌다. 중학교 2학년생 김동환(15) 군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사위는 캄캄하다. 그는 충북 제천시 간디청소년학교(중학 과정)에 다닌다. 사랑과 자발성을 교육철학으로 삼는 대안학교이다. 》

이 학교 2학년 학생 22명은 28일까지 열흘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펼친다. 소록도에 오기 직전에는 경남 산청군의 한센인 요양시설인 ‘성심원’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올해 간디학교 2학년의 이동학습 프로그램 주제는 ‘봉사’.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우리 사회의 소외 계층 또는 소수 집단과 더불어 사는 삶을 학교 밖에서 배우는 중이다.

“할아버지, 두부 드릴까요?”

동환이는 친구 4명과 함께 노인병동에서 한센인 할머니 할아버지의 식사를 도왔다. 아무래도 서툴다. 그러나 동환이는 말을 할 수 없고, 손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이들의 눈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읽으려고 애썼다.

그에게 한센인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단지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식사와 세수를 돕고 침대에 눕혀드린 뒤 병동 문을 나서니 훤하게 동이 터 있었다.

같은 학교의 홍시내(15) 양과 박철종(15) 군에게 주어진 ‘임무’는 신생리 윤남식(80) 할아버지 댁 청소하기. 한센병으로 열 손가락과 다리를 잃은 할아버지에게 청소는 굉장한 노동이다.

할아버지의 손가락을 대신하는 니퍼 여러 개가 방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시내 양은 찌든 때가 많은 방을 걸레질했다. 철종 군은 집 구석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을 마당으로 끄집어낸 뒤 차곡차곡 정리했다.

할아버지는 고흥에 산다는 딸네 집에 전화를 대신 걸어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이들은 마당까지 싹싹 비질을 한 뒤 할아버지 집을 나섰다. 낡은 집은 깨끗해졌지만 아이들은 무더운 날씨에 온통 땀투성이가 됐다.

시내 양에게 물었다. 한센인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혹시 겁나지는 않았었는지.

“아뇨.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한센인을 무시하고 따돌리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한 일이에요.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한센병은 옮지 않아요. 우리랑 같은 사람들인 걸요.”

이동학습을 떠나기 전 학생들은 한센인을 다룬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함께 읽었다. 또 한센인이 어떤 오해 때문에 차별과 고통을 받았는지를 비롯해 한센병에 대해 따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사 황선호(32) 씨는 “우리 사회에서 한센인은 소외의 대명사”라며 “소록도에서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센인의 삶,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소록도=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한센인 보상 추진 과정

일본은 1907년 ‘나병(한센병)예방법’을 제정해 한센병 환자를 국가요양소에 강제 수용했다.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령을 통해 조선의 한센병 환자를 소록도에 격리시켰다. 광복 이후에도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강제수용 정책은 계속됐다.

5·16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전염병 예방법을 개정해 한센병 환자의 재가(在家) 치료를 인정했다. 이때부터 전국 곳곳에 한센인 정착촌이 생겼다. 재가 치료를 인정한 것은 환자를 수용할 시설과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

일본은 1996년 나병예방법을 폐지했다. 2001년에는 강제수용됐던 한센인을 위한 보상법을 만들어 1만여 명에게 1인당 800만∼1400만 엔(약 8000만∼1억4000만 원)을 배상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소록도로 끌려간 한국인 한센인 117명은 2003년 말부터 일본 후생노동성에 보상금 지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생성은 “소록도를 일본의 국립요양소로 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117명 가운데 세상을 떠난 7명을 제외한 110명이 지난해 8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東京)지방재판소에 소송을 냈다. 다음 달 19일 최종 공판이 열리며 선고는 9월에 있을 예정이다.

이 소송의 한국변호인단 단장인 박영립(朴永立) 변호사는 “한센인 보상법에는 국적과 거주지에 관계 없이 일본에 의해 강제 수용된 모든 한센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승소를 낙관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김춘진(金椿鎭) 의원은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이르면 다음 달 국회에 발의할 예정이다.

과거 한센인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생활지원금 지급, 주거복지시설 및 의료시설 설치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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