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알아주지 않은 삶’…조선후기 奇人들 삶

  • 입력 2005년 5월 13일 17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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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주지 않은 삶/진재교 편역/428쪽·1만2000원·태학사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은 우리 시대의 평범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을 매주 소개한다. 산골소녀 영자, 자폐아 마라토너,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그 ‘인간극장’의 카메라를 조선 후기 사회에 들이댄다면 바로 이 책이 될 것이다. 조선 후기 문인들의 개인문집 속 전(傳)과 기사(記事)라는 형태의 짤막한 글 속에 등장하는 이 책의 주인공들은 공식 역사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삶을 거침없이 살다간 이들이다.

아버지를 역적이라 비난했음을 뒤늦게 알고 세상을 등진 유랑시인 김삿갓,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냈지만 유배지에서 숨을 거둬야 했던 어부 안용복, 예술적 열정을 가누지 못해 스스로 한쪽 눈을 찔렀던 최북, 단 한 수로 명나라 사신을 무릎 꿇린 바둑 실력을 갖췄지만 평생 상대를 찾지 못해 술로 세월을 보낸 덕원령, 시대를 잘못 만나 굶어 죽어야 했던 과학 천재 김영….

신분 질서와 윤리를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 때문에 자신들의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이미 눈 밝은 후세인들에게 ‘시대와의 불화’를 상징하는 코드가 됐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재능으로 비극적 삶을 산 인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간 감동적 삶도 많다.

“대장부는 정승이 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의원이 되는 것이 낫다”며 의원으로 강렬한 자의식을 밝힌 조광일은 침 하나로 1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평생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권력자와 부자의 의원이 되는 길보다는 민중의 의사로 살았다.

조선 영조 때 서적상 조생은 까막눈 신세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팔러 다니며 번 돈을 술값으로 탕진했다. 그는 글도 모르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에 “그 책을 누가 썼고, 주석은 누가 달았으며, 몇 질 몇 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당당하게 응수했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없이도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강렬한 자의식의 표현이다.

제주 기생 만덕은 매점매석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흉년이 들자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 제주 백성을 구휼했다. 정조가 그녀를 치하해 소원을 물었을 때 “그저 궁궐과 금강산 구경으로 족하다”고 답했던 데에서는 일국의 정승 뺨칠 도량을 지닌 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거문고와 칼을 지고 다니며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조선 최고의 쾌남아 임제의 맞수가 될 만한 사내도 만날 수 있다. 서얼 출신의 무반 백동수는 정조 때 조선 무예 24반을 집대성했을 만큼 무예가 출중하면서도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두루 교류한 문무 겸전의 사내. 그러나 끝내 뜻을 펴 보지 못하고 외로이 숨을 거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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