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라이트]4부<4>현대사 어떻게 볼것인가

  • 입력 2005년 2월 20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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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는 시각은 보수-진보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쟁점의 하나다. 특히 현 집권세력은 진취적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과거사 청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들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준엄한 잣대’가 필요하다며 이에 동조하고 있다. 반면 뉴 라이트(New Right)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며 여권과 진보 진영의 시각을 비판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해낸 근현대사의 긍정적 측면 평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거다. 뉴 라이트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일영(金一榮·정치외교학) 성균관대 교수와 진보 역사학계의 입장에 선 박태균(朴泰均·한국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를 초청해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 14층 회의실에서 대담을 가졌다.》

○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

▽박태균 교수=가능한 지역부터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자는 이승만(李承晩)의 단정(單政) 노선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결과론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으로 4개국에 분할 점령됐던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한국보다 불리한 처지였지만 중립화 통일국가 수립에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처럼 우리 내부적 힘으로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김일영 교수=오스트리아는 내부적 단결이 가능했지만 한국의 경우는 두 가지 변수가 있었다. 첫째, 남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과 소련이라는 변수가 존재했다. 둘째, 남한 내부에서조차 좌우가 서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고 김규식(金奎植)이 이끄는 중도파는 실권이 없었다. 또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1945년 분할 점령된 이후 독립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한국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외국군 점령을 10년 이상 허용할 입장이 아니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오스트리아에서처럼 한반도에서도 결정적 변수는 외세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광복 후 정치세력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사회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북한 내에도 조만식(曺晩植) 등 독자적 보수세력이 존재했고,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1945년) 이후 반탁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승만과 한독당을 제외한 모든 세력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했다.

▽김=브루스 커밍스 교수(미 시카고대)는 한반도 냉전의 책임이 1947년부터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시도한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1945년 9월부터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1946년 2월 북한이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북한에 이미 강력한 행정기구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또 남한 내에서는 김규식의 노선이 명분상 옳았다고 해도 이를 실현시킬 힘이 없었다.

○ 친일파 청산과 정통성 논란

▽박=정통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남한 정부에 친일파가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통성을 훼손한 것이 아니다. 물론 남북 간에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방법론에서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친일세력이 남한을 세우고 반일세력이 북한을 세웠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김일성을 싫어한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왔고 이승만이 싫은 사람들은 북으로 올라갔다고 봐야 한다. 친일파를 건국에 참여시킨 것이 적합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후 어떤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갔느냐이다.

▽김=100% 동의한다. 그러나 진보성향 학자들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문제시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괄호를 쳐놓고 평가를 유보하는 게 문제다. 나는 이승만의 단정노선이나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이나 차이가 없다고 본다. 냉전에 편승해 각각의 지역에 먼저 정부를 수립한 뒤 각각 북진통일과 남진통일을 도모한 2단계 통일론의 기능적 등가물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남한은 정통성을 키워 왔지만 전체주의를 택한 북한은 정통성을 잃어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 이승만 정부에 대한 평가

▽박=남한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 이승만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역동적인 국민과 지식인의 힘이 이뤄낸 것이다. 한국의 정통성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극복했기에 이뤄진 것이다. 뉴 라이트 운동을 벌이는 ‘교과서포럼’ 측에서는 이를 ‘자학(自虐)사관’이라고 표현했는데 ‘비극의 현대사’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김=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자유민주주의가 자랐고 경제가 성장했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6·25전쟁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시스템을 전체주의와 통제경제시스템으로부터 막아낸 것은 결국 이승만의 공로로 인정해야 한다. 이승만 시대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이라는 건물을 세우진 못했지만 최소한 그 바탕을 만들었다. 한미동맹과 교육 보급을 통해 이후 민주화운동과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는 이승만 시대에 관해 단지 1쪽만 할애해 기술하고 있다.

▽박=부산정치파동, 삼선개헌, 진보당사건, 경향신문 폐간사건 등을 볼 때 이승만이 과연 그런 토대를 만들고 지키려고 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유엔군이 부산정치파동을 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키려 왔는데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며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웠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내려는 힘마저도 위태롭게 했다. 그는 국가안보라고 말했지만 정권안보에 불과했다.

▽김=이승만 시대를 민주 대 독재의 대결구도로만 보지 말고 다차원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부산정치파동 뒤에는 미국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기 위해 야당을 교묘하게 이용한 측면이 있다. 한국 야당은 그런 면에서 이승만보다 더 사대주의적이었다.

정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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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근대화 産苦였나 反민중 독재였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근현대사 평가에서 가장 민감한 대목이다. 한일협정문서 공개, 광화문 현판 교체,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재조사 등에 대해 정치권과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박정희의 정치적 독재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박정희시대 평가와 관련해서는 집권세력의 정략적 의도가 개입된 ‘박정희 두 번 죽이기’라는 비판적 시각과 한국사회에서 금기시됐던 ‘박정희 신화의 본격적 해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진보성향 학자들은 박정희시대의 경제정책은 장기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본다. 정권 안보를 위해 경제성장을 추진하다보니 정경유착과 빈부격차,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도덕불감증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 또 경제개발계획은 장면(張勉) 정부 때 수립된 것을 모방한 것이며, 외자 도입은 한일협정 체결과 베트남전 파병 등으로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반면 뉴 라이트 운동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박정희시대의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바닥난 국내자본과 형편없는 대외신인도 속에서 대규모 외자 도입을 위해서는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 등 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른 선진국들도 산업화 초기 관치금융을 통해 전략산업에 집중 투자해 불균형성장이 불가피했다는 것. 또 박정희의 리더십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남북 간의 경제력 격차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으며, ‘박정희시대의 경제정책이 자유시장경제 원칙 자체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결과로 과정을 비판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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