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광장 조성 앞서 ‘조선광문회’ 터 기념물 세워야”

  • 입력 2004년 8월 30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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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앞. 청계천을 복원하고 그 옆에 ‘베를린광장’을 만드는 등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서울의 명소로 새 단장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일대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최남선(崔南善)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등 당대 지식인들이 밤을 새워 토론하며 민족혼을 일깨우는 책들을 펴냈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흔한 기념비 하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 터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라곤 건물 터에서 10여m 떨어진 구석에 놓여 있는 ‘조선광문회 터’라고 씌어진 작은 표지석이 전부다.

그나마 관리가 안 돼 표지석 옆에는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고 주민들은 표지석 앞을 쓰레기봉지를 버리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문화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청계천 복원과 베를린광장 조성 등 이 일대에 대한 리모델링 작업 속에 조선광문회의 의미를 후손들이 되새길 수 있는 기념물 설치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요구가 일고 있다.

동서문화사 고정일(高正一·64) 발행인은 “이대로 방치한다면 조선광문회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라며 “장소와의 관련성이나 역사성이 없는 베를린광장도 세우는 마당인데 민족혼이 담긴 기념물을 세우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 한일합병 후 일제가 조선의 서적과 문화재를 강탈해 가는 것에 분개해 최남선 등이 세운 한국고전간행단체. 당시 장지연, 유근(柳瑾), 김교헌(金敎獻) 등이 “민족정신이 담긴 고전을 누구나 사 볼 수 있게 저렴하게 공급하자”며 이곳에서 동국통감, 삼국유사, 열하일기, 지봉유설, 용비어천가, 택리지, 훈몽자회 등을 펴냈다.

‘청계천 광통교 옆 파란색 2층짜리 목조건물’로 불렸던 조선광문회는 또 주시경(周時經)이 한국 최초의 국어사전 편찬을 시도한 한글운동의 발상지이자 민족운동이 모의되고 전국의 애국운동 정보가 모이던 곳이었다. 한용운(韓龍雲), 홍명희(洪命憙) 변영로(卞榮魯), 송진우(宋鎭禹), 안창호(安昌浩), 이승훈(李昇薰),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피신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광문회 건물은 1969년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됐다. 당시 육당의 아들인 최한웅(崔漢雄) 서울대 교수,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등 문화계 인사들이 정부에 건물 보존 또는 이전 복원을 요구했고 언론도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서울시는 조선광문회 터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독일 베를린장벽의 일부를 가져와 내년 8월까지 100m²(약 30.3평) 규모의 베를린광장을 조성할 계획이지만 조선광문회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검토를 하지 않고 있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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