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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12일 21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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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계 영국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오브리 메넨(1912∼1989)은 유럽의 갤러리들을 찾아다니면서 전설적인 화가들의 일화 수집을 즐겼다.
이 책은 그가 1980년에 펴낸 ‘예술과 돈(Art and Money)’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면서 재료로 쓰인 황금을 착복했다는 조각가 페이디아스로부터 미술계의 비즈니스 속성을 꿰뚫어본 피카소까지 최고 경지의 미술가들과 돈의 관계를 대중적 필치로 써 내려갔다.
저자는 화려한 캔버스와 숭고한 조각품 뒤에 오간 ‘거래’에 대해 쓰고 있다. 하지만 돈이 미술가들의 절대 동인(動因)이었다고 시종일관하지는 않는다. 가난과 사투를 벌였던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선 풍자보다 연민이 엿보인다. 모네도 비평가들 사이에선 마네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모네가 화가 친구 바지유로부터 매월 50프랑씩 얻어 쓸 때였다. 당시의 50프랑은 현재의 원화로 환산해 보면 3만원 정도 되는 돈. 그는 “지금 내 그림 25점을 몽땅 500프랑에 사 주게” 하는 부탁 편지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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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기성 화단이 인상파에 대해 냉담한 평가를 거두지 않자 화상 뒤랑뤼엘이 인상파를 미국 신흥 부자들에게 소개해 숨통을 틔워줬다.
이 무렵 인상파는 ‘야외’와 ‘빛’이라는 애초의 집착에서 물러섰다. 르누아르는 샤르팡티에라는 부르주아 부인이 거실에 앉아 있는 그림을 부탁하자 기꺼이 응했다. 그림 값은 1000프랑이었다.
동료 피사로는 그를 욕하기보다 “가난이 힘들긴 한가 보군” 하고 말했다. 모네도 ‘전향’ 후에 그린 ‘건초더미’라는 작품으로 3000프랑이나 받을 수 있었다.
진정으로 비즈니스맨 기질에 쇼맨십까지 가졌던 화가는 루벤스였다. 그는 후배들을 동원해 ‘대량생산 라인’을 가동했는데 스페인의 펠리페 4세 등이 한꺼번에 주문해 오면 자신 있게 응했다. 15개월 만에 대형 그림 56점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서명이 진실성을 의심받자 비범성을 보여주는 ‘이벤트’도 열었다. 대저택의 스튜디오에 부유한 구매자들이 들러서 구경하게끔 허용한 것.
이때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비서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게 했으며, 2m나 되는 화려한 곡선을 단숨에 긋는 ‘다작(多作)의 천재성’을 연출했다.
자신이 번 돈으로 후배들의 예술적인 자유를 넓힌 이도 있었다. 19세기 영국 화가 챈트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 속에 소년기를 보냈는데 천재성을 보이면서 조지 4세의 흉상까지 만들게 됐다. 그는 부와 영광의 정점에 섰던 60세로 숨지면서 고향 노튼의 가난한 소년들과 ‘최고 수준의 미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유산을 기증했다. 그는 ‘목살이 늘어진’ 왕과 귀족들을 실제보다 훨씬 훌륭하게 그려내곤 했는데 챈트리의 지원금을 받은 후배들은 ‘고객 입맛’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지은이는 미술사학자가 아닌 만큼 이 책에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재미있게 쓴 거장 미술가들의 야사(野史)’로 읽힐 뿐이다. 한편 국내 편집자와 역자의 불성실함이 번역본에 드러난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책날개에 메넨(Aubrey Menen)의 영문 이름이 잘못 인쇄돼 있으며, 인도에서 숨진 이를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다’고 써놓았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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