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1000만시대]<3>100만명 시대의 그늘

  • 입력 2004년 2월 17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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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같은 한국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가 개봉됐을 때(2002년 1월)의 일이다. 모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한 개 스크린에서 금요일에 개봉된 이 영화는 그 다음 날 할리우드 영화와 교차 상영됐다. 그러더니 사흘째인 일요일에는 극장측이 ‘관객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영화를 내렸다. 이성강 감독의 이 애니메이션은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의 하나인 앙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장편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해 세계에 이름을 떨친 작품이었다.

햇빛이 강할수록 그늘도 짙다. ‘실미도’가 1000만 관객의 신화 창조를 눈앞에 두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연일 신기록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더불어 한국영화가 풀어야 할 숙제도 산적해 있다.

17일 현재 ‘태극기 휘날리며’(513개)와 ‘실미도’(220개)의 스크린 수를 합치면 733개. 전국극장연합회가 밝힌 국내 총스크린 수가 1241개임을 감안하면 전국 스크린의 59%를 두 영화가 차지한 셈이다. 그 틈에 작은 영화들은 극장 잡기조차 어렵다. 이달 중순 개봉 예정이었던 ‘러브 미 이프 유 대어’나 ‘8명의 여인들’ 등은 각기 3월과 2월 말로 개봉 시기를 늦췄다.

‘1000만 관객’ 시대의 뒤안길에는 극장의 냉혹한 생존 논리와 배급망 확보의 어려움, 관객들의 ‘편식’ 등을 이유로 잊혀져 가는 작은 영화나 예술영화들이 있다. 영화 ‘마리 이야기(왼쪽)’와 ‘고양이를 부탁해’.

이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양강’(강우석, 강제규 감독)이 사실상 스크린을 독식하고, 이들 영화의 제작비나 마케팅비에 대적할 수 없는 작은 영화나 예술영화들은 개봉이 미뤄지거나 빛도 못 본 채 사장되고 있는 형편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질투는 나의 힘’ 같은 중급 영화나 ‘고양이를 부탁해’ 같은 작은 영화 모두 똑같은 대형 배급라인을 타기 때문에 흥행이 되지 않으면 곧바로 간판을 내려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실패한다’는 인식이 ‘실미도’와 ‘태극기…’ 등의 성공과 함께 사라진 것은 다행이지만 이것이 되레 영화산업을 ‘도박판’처럼 만드는 부메랑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몇몇 대박 작품들의 향방에 따라 투자흐름이 한 곳으로 쏠리면서 시장은 상대적으로 더 불안해지고, 예술·독립영화는 제작 자체가 힘들어 기근 현상이 빚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모든 한국 영화가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흥행대박’의 시대라지만 실제로 ‘쪽박’을 차는 국내 영화는 부지기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최근 펴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한국 영화는 편당 4억3100만원씩 손해를 봤고, 지난해 개봉한 65편 중 흑자를 낸 영화는 3분의 1이 안 된다.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열면서 편당 제작비가 급상승하고 ‘쏟아 붓기’ 마케팅이 본격화하는 등 영화산업의 외형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를 재생산하는 내부 인프라 구축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 한국영화의 해외마케팅을 담당하는 미로비젼의 채희승 대표는 “산업규모에 비해 스태프의 인건비나 법률 인프라가 턱 없이 못 미치는 수준인 데다 해외시장을 리드할 수 있는 한국 감독이나 배우 등 월드 스타급 플레이어가 부족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코미디다, 조폭영화다 바람에 편승하다 망하는 영화들이 많다. 그럼에도 극소수의 성공에 가려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 유행만 좇아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내 영화시장 규모에 맞게 배우 개런티의 거품이 빠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영화제작사 ‘좋은 영화’ 김미희 대표는 “한 작품 할 때마다 전 작품의 20∼30%씩 출연료를 올리는 근거 없는 관행이 한국영화 제작비를 턱없이 올리고 있다”면서 “이런 식으로 배우만 살아남는다면 한정된 국내 시장에서 제작 편수는 줄어들고 투자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제작비 규모가 커지면서 제작보다 자금조달 및 유통(배급)에 무게중심이 쏠림에 따라, 제작과정에 대한 투자자들의 간섭이 심해진 것도 한국 영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한 영화사 대표는 “편집실에 투자자들이 들어와 ‘이것 빼라 저것 집어넣어라’고 종용하면서 제작자의 입지와 감독의 작가정신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며 “요즘 시나리오의 원고량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제작에 문외한인 투자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봉사’의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들에 폭발적 반응을 보이는 최근 국내 관객의 취향과 ‘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태극기…’가 보여주듯 ‘카피(copy) 할리우드(할리우드 모방)’ 자신감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때”라며 “‘우리가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하고 감격하는 것도 민족주의적 나르시시즘을 벗어나지 못한 반응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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