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賞을 받은 한국인들]<1>'칸' 영화제 감독상 임권택

  • 입력 2004년 1월 4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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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시대, 천형과도 같았던 개인사의 불행을 독특한 휴머니즘의 영화예술로 승화시킨 임권택 감독.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념의 시대, 천형과도 같았던 개인사의 불행을 독특한 휴머니즘의 영화예술로 승화시킨 임권택 감독. -동아일보 자료사진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받고 자신의 분야에서 한국인의 긍지를 떨치는 인물들이 국내외에 적지 않다. 이들은 어떤 노력의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서게 됐을까. 매주 월요일 시리즈를 통해 이들이 ‘정상’에 오르기까지 기울인 뼈를 깎는 노력과 수상 뒤 또 다른 성취를 위해 정진하는 모습 등을 소개한다. 이런 인고(忍苦)의 초상화가 도약을 준비하는 모든 한국인, 특히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세계에는 수많은 영화제가 있다. 그 영화제 중에서 여왕을 뽑으라면 단연 칸 국제영화제다. 그만큼 화려하고 그만큼 콧대가 높으며 또 그만큼 검증된 거장을 편애한다.

그런 칸에도 가끔은 예외가 있다. 26세의 ‘약관’에 황금종려상을 탄 스티븐 소더버그(89년)가 그랬고, 비디오가게 종업원 출신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쿠엔틴 타란티노(94년)도 그랬다. 범죄자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54세에 첫 영화를 만든 러시아의 비탈리 카네프스키(89년 신인감독상)와 검열의 가시밭 속에서 꽃을 피워낸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97년 황금종려상)도 있다.

2002년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林權澤·70) 감독도 칸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그에게 영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일제강점기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을 빨치산의 장남으로 버텨내야 했고, 휴전 뒤에도 그 꼬리표를 안고 혹독한 감시와 가난 속에 뒹굴어야 했다.

어머니는 음독자살을 기도했고, 아버지는 무능한 농부로 일생을 마쳤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열여덟 나이의 가출은 그런 굴곡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쟁 중 부산에서 군화장사를 하며 하루 번 돈을 몽땅 소주 값으로 털어 넣곤 했다. 스물한 살 때 충무로에 뛰어든 것도 함께 군화장사를 하던 사람들에게 묻어간 것이었다.

소품 담당으로 시작해 8년간 바닥을 구르던 그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62년)로 감독에 데뷔한다. 그러나 그 뒤 10년간 그가 찍은 50편은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날품 팔듯 찍어낸 것들’이란 그의 말대로 졸작들이었다. 1970년 한 해에만 무려 8편을 찍어냈으니 영화공장이 따로 없었다.

당시 그는 지독한 자기모멸감으로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수전증으로 술잔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입으로 술잔을 집어 마실 정도로 자기학대를 일삼았다.

“내가 지금 ‘하류인생’을 찍고 있지만 당시 내 삶의 급수가 하류였소.”

그것은 그의 평생을 눌러온 이념의 낙인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가 북한에서 반공영화를 가장 많이 만든 감독으로 기억되는 것도 자신을 규정해 온 삶의 멍에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좌우익 갈등이 내 평생 삶을 결박 지었소. 결국 내가 왜 이런 고통 속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느냐는 성찰이 나를 ‘경계인’으로 만들어간 거요. 그것은 내 아버지가 구현코자 했던 삶을 부인하는 것인 동시에 나를 옥죄고 있는 자본주의적 삶의 조건에 대한 저항이었소.”

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됐을 때 임 감독이 기뻤던 것은 초청 그 자체보다 금단의 땅이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꿈꾸던 삶의 구체적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지독한 물자부족으로 립스틱이 그렇게 귀한데도 어떻게든 립스틱을 구해다 바르고 살아가는 러시아 여자들이었어요. 립스틱도 제대로 바를 수 없는 평등보다는 그나마 립스틱이라도 바르고 살 수 있는 자유가 숨쉬기 쉽다는 결론을 내렸소.”

그의 작품이 어떤 이념성보다 휴머니즘을 앞세웠던 것은 그런 치열한 자기극복의 소산이었다. 그런 휴머니즘적 작품세계를 처음으로 의식하고 만든 영화가 51번째 작품 ‘잡초’(73년)였다. 그의 말대로 “불혹을 넘기고 결혼도 하면서 이대로 주저앉아선 안 된다는 자기성찰의 결과”였다. 처음으로 직접 제작에도 나섰지만 흥행은 대실패였다. 그러나 이 영화를 계기로 임 감독은 ‘진지한 영화도 찍는 감독’으로 처음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길게 봤을 때 가장 크게 번 영화”라고 말했다.

그 뒤 ‘만다라’(81년), ‘씨받이’(86년), ‘서편제’(93년), ‘춘향뎐’(2000년), 그리고 ‘취화선’(2002년) 등 그의 작품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듯 한국적 삶의 풍경과 내면세계를 담아낸다. 그의 영화에는 두 개의 중심점이 있다. 내용면에서 ‘한국인의 미적 감흥을 담아내자’는 것이요, 형식면에서는 ‘작품마다 안주하지 말고 철저히 거듭나자’는 것이다.

2002년 칸영화제 폐막일 심사위원 중 4명이 그를 찾아와 개인적 경의를 표한 것은 미학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에서 그의 영화가 갖춘 세계적 경쟁력을 말해준다. 그중 두 명은 “‘취화선’은 올해 출품작 중 가장 아름다운 필름”이라고 치하했고, 다른 두 명은 “매 컷이 완벽했고 영화 전체가 완벽했다. 당신은 지독한 완벽주의자임에 틀림없다”며 경탄했다.

미학적 측면에서 ‘임권택 영화’의 최대 덕목은 ‘절제’와 ‘생략’이다. 그는 원하는 장면을 위해서는 찍고 또 찍는 인내를 지녔지만, 작품 전체를 위해서는 이를 군더더기 없이 잘라내 버리는 결단을 보인다.

기술적 부분은 평생 100편에 가까운 영화를 찍으면서 매번 다른 영화를 찍으려 했던 실험정신에서 우러난다. 사실 삶의 밑바닥에서 뒹굴던 시기의 영화에서조차 그는 액션, 사극, 멜로, 전쟁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화면의 구도와 촬영기법, 그리고 필름의 색조변화까지 자기만의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또 그는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이청준, 김성동, 조정래, 이문열 등 동시대 한국작가들의 소설을 섭렵했고, 판소리와 동양화, 도예 등 한국적 소재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와 고증을 했다. 중퇴 학력이 전부인 그의 영화가 종합예술적 품격을 지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누군가 내게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내 대표작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답해요. 내게는 항상 지금 만드는 영화가 대표작일 뿐이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임감독과 칸의 18년 '연애' ▼

2002년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발표가 난 뒤 인증서를 들고 기념촬영하는 임권택 감독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흐른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임권택 감독에게 칸은 ‘콧대 높은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존재였고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길소뜸’(85년)이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올랐을 때 임 감독은 칸영화제의 질 자콥 집행위원장을 소개받았다.

“그때 그가 얼마나 거만하게 굴던지 속으로 내가 그랬소. ‘내가 칸에 출품을 하면 성을 갈겠다’고.”

그런 임 감독의 맘을 녹인 것은 89년 임권택 회고전이 열린 낭트영화제에서 두 번째로 만난 자콥 위원장의 태도 변화였다. 칸이 지나치게 임권택을 외면한다는 비평가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들어간 탓일까. 그는 겸손한 자세로 다음 해의 출품을 부탁했다. 완성시기가 늦어진다면 마감시간을 늦춰 주겠다는 특별대우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임 감독은 이에 응할 수 없었다. 당시 액션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고 속편 제작이 이어지면서 다시 5년이 흘렀다. 임 감독은 칸을 겨냥한 첫 작품 ‘서편제’(93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 다시 콧대가 높아진 칸은 비경쟁부문 초청장만 보내 왔다.

“5년 만에 철저히 잊혀진 존재가 된 거요. 그때 내 영화 수준에 대한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해 본선 진출작의 면면을 훑어보며 그건 아니라고 확신했소. 그래서 퇴짜를 놨지.”

그러나 칸은 다시 무릎을 쳐야 했다. 93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 회고전과 ‘서편제’의 개봉으로 임 감독의 작품들이 프랑스에서 새로 조명되면서 칸의 심미안에 대한 비판이 다시 일었던 것.

칸과의 연애는 다시 시작됐다. ‘축제’(96년)가 비경쟁부문에 초청됐으나 임 감독은 퇴짜를 놨다. 그리고 ‘춘향뎐’(2000년)이 한국영화로 처음 본선에 진출하며 칸의 손목을 잡았고, 두 번째 출품작 ‘취화선’(2002년)이 마침내 입술을 훔쳤다.

임 감독은 자신이 왜 칸과 그처럼 밀고 당기기를 벌였는지를 이렇게 털어놨다.

“세 가지 이유가 있소. 첫째는 감독으로서 개인적인 욕심, 둘째는 한국영화 전체의 자존심, 그리고 셋째는 사람들이 내게 건 희망과 기대였소. 사실 ‘서편제’ 이후 내가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모두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줬어요. 그게 내겐 빚이나 다름없었거든. 그래서 수상통보를 받고도 기쁨보다는 이제야 멍에를 벗었다는 후련함이 먼저 찾아온 거요.”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임권택 감독은 ▼

△1934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

△1981년 ‘만다라’, 베를린영화제 본선 진출 △1985년 ‘길소뜸’, 베를린영화제 본선 진출

△1986년 ‘씨받이’,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1987년 ‘아다다’, 몬트리올 영화제 여우주연상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1993년 ‘서편제’, 제1회 상하이 영화제 감독상, 여우주연상 △1995년 ‘태백산맥’, 베를린영화제 본선 진출

△2000년 ‘춘향뎐’, 칸영화제 본선 진출 △2002년 ‘취화선’, 칸영화제 감독상

△2003년부터 ‘하류인생’ 촬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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