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삶과 죽음사이… ‘아름다운 최후’는 없나

입력 2003-12-11 16:27수정 2009-09-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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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절실하다. 사진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무의미한 치료 대신 가족 품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SBS 주말드라마 ‘완전한 사랑’. 사진제공 SBS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는 영애(김희애)는 특발성 폐섬유증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았다. 길어야 6개월의 시한부 삶에 현재까지 알려진 치료법은 없다. 역시 아내밖에 모르는 남편 시우(차인표)는 “포기하지 말자”며 입원해 치료를 받자고 애원한다. 그러나 영애는 “좁은 병실에서 무의미한 치료를 받으며 남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며 “가족들 곁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영애는 잦아드는 호흡 속에서 시우의 어깨에 기대며 자연스러운 죽음을 기다린다. 최근 안방극장에서 시청자들의 눈물을 쏟게 하는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줄거리다. 이를 보는 동년배 주부들은 “내가 만일 죽음을 앞두게 된다면…” 하는 상황을 그리며 ‘아름다운 죽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 삶의 연장 vs 죽음의 지연

한국에서 죽음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내과의사 A씨(38)는 얼마 전 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뗐다.

그 환자는 폐가 다 망가져서 최근 몇 년간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이어왔다. 의식은 가물가물했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너무 힘겨웠다.

가족 한 명이 ‘가족의 뜻’이라며 호흡기를 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A씨는 10여명의 가족과 친척들을 불러 모아 “호흡기를 떼면 편하게 돌아가실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모두 동의했고 각서도 썼다.

A씨는 또 잠깐씩 의식이 돌아오는 환자에게도 여러 번 의사를 물었고 그때마다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기를 뗀 지 몇 시간이 안돼 환자는 생을 마감했다.

그 환자는 인공호흡기로 연명할 때 행복했을까.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삶의 질 향상 연구과’ 윤영호 과장(가정의학 전문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기 암 환자들을 담당하는 그의 화두는 ‘품위 있는 죽음’이다.

임종이 가까워진 말기 암 환자들은 극심한 통증과 환각, 발작, 구토, 혼수상태를 거쳐 죽음에 이른다. 보통은 이들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뒤 인공호흡기를 부착한다.

그것은 ‘삶의 연장’일까, 아니면 단지 ‘죽음의 지연’일 뿐일까.

○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품위 있는 죽음’은 이런 의문점에서 출발한다.

품위 있는 죽음의 첫 단계는 더 이상 의학적 치료로는 생명 연장이 불가능한 시점의 환자에게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치료법의 작용과 부작용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뒤 환자가 의식을 잃더라도 생명 연장 수단을 사용할지 판단하게 한다.

환자는 진지하게 생각한 뒤 ‘생명을 유지하는 인위적 수단이나 치료를 (나에게) 사용하지 말라’는 소망을 사전의사결정서나 ‘생전 유언(living will)’ 등으로 남길 수 있다.

그러면 의사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대신 통증을 완화하는 데 최선을 다해 환자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아직까지 윤 과장의 소망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환자나 가족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했을 때 의사, 성직자, 학자 등으로 이뤄진 병원 윤리위원회를 거쳐 결정하지만 법적인 효력은 없다. 가족이 의사를 살인방조 등의 혐의로 고소해 법정에 세우면 단지 정상 참작 요소가 될 뿐이다.

미국은 1977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품위 있는 죽음 법(the death-with-dignity statute)’을 시행한 이후 환자의 생전 유언과 같은 명백한 증거가 있으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했다. 대만은 임종에 이르렀을 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도록 하는 사전의사결정 제도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사진제공 강남성모병원

○ 자신의 삶 바라보기

몸의 근육이 점차 굳어져 사망에 이르는 루게릭병을 앓던 미국 브랜다이스대 사회학과 모리 슈워츠 교수는 회복 불능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16년 만에 찾아온 대학 제자와 매주 화요일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숨을 거둔다.(‘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윤 과장이 생각하는 품위 있는 죽음은 바로 모리 교수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인위적인 죽음의 연장이 아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것.

의학이 발전하면서 의료진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써야 하는 의무와 같은 강요에 휘둘리는 일이 많아졌다. 미국간호사연합 인권윤리센터 회장 콜린 스캔론은 “사람으로서의 환자는 사라지고 ‘육체’와 (의료진의) 싸움만이 격렬해졌다”고 말했다.

모리 교수는 자신의 죽음에 국외자가 되지 않고 삶을 정리해 나갔다.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환자들에게도 모리 교수 같은 마지막 시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환자 자신의 선택에서 온다. 의사는 환자의 선택을 따라야 한다. 단 환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도 의사의 역할이다.

윤 과장은 “사람마다 생명에 대한 가치관은 다르다. 짧지만 의미 있게 사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고 의미보다는 길게 사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우리는 환자들이 결정했을 때 그것을 충분하게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 ‘미끄러운 언덕’

품위 있는 죽음을 ‘소극적 안락사’라고 간주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품위 있는 죽음이 결국 연명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죽게 방치한다는 것이다.

반대론자의 주장은 ‘미끄러운 언덕(slippery slope)’효과로 요약될 수 있다.

품위 있는 죽음이 허용되면 처음에는 환자의 상태, 가족과의 관계, 다른 가능한 치료법 등을 모두 고려하지만 어느 순간 언덕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회생 가능한 환자의 치료까지 포기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아도 끝없는 통증과 고통을 겪는 환자들까지 서둘러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 또 사회적 경제적 압력에 시달리는 환자들은 자칫 가족 등으로부터 치료중단 선택을 강요당하는 극한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 과장은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임박한 회복 불능의 환자가 생명 연장기구에 의존해 하염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그 환자의 자율적 선택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문제는 당사자가 생략된 채 가족이나 의료진의 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삶을 마감하는 시간은 너무나 중요해서 환자는 훨씬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로저 S 마그누손, ‘죽음의 천사:지하세계의 안락사 해부’(예일대 출판부·2002)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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