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붓 대신 펜으로 풀어낸 한국화단사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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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대기자
박영대기자
올해 아흔한 살로 살아 있는 현역 화가 중 최고 원로인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화백이 15일 회고록을 냈다. ‘화단(畵壇) 풍상 70년’(미술문화 간)이란 제목의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예술인의 삶이 담담히 실려 있다.

이날 서울 종로구 팔판동 월전미술관에서 만난 월전은 “내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것이 쑥스러웠고 많은 사람과 연관된 일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진실하게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펜을 들기까지 무척 망설였다”며 “그러나 기록을 남기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고 회고록 출간 동기를 밝혔다.

얼굴의 검버섯과 약간 약해진 청력(聽力)을 빼고는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그는 늘 그렇듯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회고록 집필을 시작하면서 좋아하던 골프마저 놓았던 그는 지난해 허리 통증을 심하게 앓아 몇 달간 병원신세를 졌다. ‘아, 이대로 눈을 감으면 책 쓰는 일도 수포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암담했는데 다행히 병세가 호전되어 이후 미술관에서 숙식하며 집필에 전념했다.

“글 쓰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보다 더 어렵더라”는 그는 힘들여 써 놓고 보니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이나 애틋함보다는 “애 많이 썼다”는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이 책에는 1930년 스승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의 낙청헌에 입문하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은 사연부터 30년대 예술인들의 낭만적 공간이었던 다방 ‘낙랑’ 이야기, 서울대가 수묵 중심, 홍익대가 채색 중심으로 나눠지게 된 사연, 전쟁 직후 이념 갈등을 겪었던 화단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소설가 이상, 화가 운보 김기창, 수화 김환기 등과의 교류는 물론 술 동무였던 월탄 박종화, 지훈 조동탁과의 사연도 재미있다. 월탄은 귀빈이 오면 추사의 병풍을 자랑했고 지훈은 고무신에 술을 따라 마셨다고 한다. 사연마다 함께 수록된 사진들도 흥미롭다.

“이제 너무 오래 살아 염치가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는 그에게 쓸쓸할 때가 없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답은 이 책의 후기에 있었다.

‘남들처럼 재물을 축적하지도 못했고 영화를 누려본 적도 없다. 다만 바르게 살고 신의를 존중하며 살아온 것은 자부한다. 구십 당년의 나는 아직 신상에 별 지장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도 기울인다. … 나는 지금도 울창한 원시림 속에 살고 있는 듯 흐뭇하고 행복하다.’

월전은 덕수궁미술관이 기획한 중국 근대미술의 거장 리커란(李可染)과의 합동전(11월 19일∼2004년 2월 29일)을 앞두고 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생존 현역 화가 중 최고 원로인 월전 장우성 화백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예술인의 삶을 담담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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