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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0월 10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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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삼릉계곡에서 머리와 손발이 잘려 나간 여래좌상을 보는 순간이었다. …사갓계곡에서는 여래입상이 두 동강 난 채 처박혀 있었고, 약수골 여래좌상의 머리도 잘려 나간 채 좌대는 거칠게 파헤쳐져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용장계곡 용장사 절터 삼륜대 위에 모셔진 여래좌상의 머리도 누군가에 의하여 모질게 잘려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웃고 있는 부처의 목을 잘랐는가. 소설가 정동주는 조선왕조 500년간 계속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당시 절을 망하게 했고, 승려들을 혹독한 부역에 내몰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불교 자체를 없애려 했다고 주장한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가 제도와 사회 습속(習俗)의 골격이었으나 화려함과 장엄함을 지나치게 추구해 고려의 멸망을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에 불교는 사라져야 할 지난 시대의 이데올로기이자 극복해야 할 모순으로 탄압받게 됐다는 것.
저자는 조선 유생들이 불교를 근원적으로 말살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승려가 되려는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허가 없이 승려가 된 사람은 구속해 중벌로 다스렸다. 그래도 승려의 수가 계속 늘어나자 사찰과 승려에게 수백 종류의 부역을 짊어지게 했다.
정조 시절 전북 순창군에 있는 사찰들에 부과된 종이 부역은 7000속(束). 한 속이 10장으로 모두 7만장이 되는 셈이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드는 작업은 시간과 일손이 꽤나 드는 일이었다. 1780, 90년대 과도한 부역으로 인해 단 한 명의 승려도 남지 않게 된 절이 속출했다.
사찰에도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졌다. △절을 기생방으로 만들고, 비구니를 기생으로 삼아라(원각사) △절에 조상의 묘를 세우라(회암사) △부역을 감당할 수 없다면 절이라도 바쳐라(범어사, 불갑사)
불교 억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불상이 땀을 흘리거나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등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다. ‘변고’라 불리는 일이 생기면 유생들은 불상을 물에 던져 넣거나 불에 태우고 또는 목을 쳐서 불상의 머리를 떼어냈다. 불교는 인간을 현혹시켜 나라를 어지럽힌 죄를 지었으므로 사형에 처한다는 뜻이었다. 목이 없는 불상만 버젓이 그 자리에 남겨 둔 것은 부처를 공경하고 따르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협박이자 시위였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불교에 대한 국가의 정책과 관리, 각종 사건과 통계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썼다. 이 밖에 조선시대 유생들이 쓴 ‘부처를 죽이라’는 107편의 상소문을 한 장(章)에 묶어 실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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