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대를 선생님께"…이근삼作 희곡 제자들이 무대올려

  • 입력 2003년 3월 5일 1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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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연습실을 찾은 원로 희곡작가 이근삼씨(가운데)와 연출가 고승길씨(왼쪽), 권성덕씨. -원대연기자
제자들의 연습실을 찾은 원로 희곡작가 이근삼씨(가운데)와 연출가 고승길씨(왼쪽), 권성덕씨. -원대연기자
추위가 잠시 주춤했던 2월의 마지막 월요일, 투병 중인 원로 희곡작가 이근삼씨(74·예술원 회원)가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했다. 아끼는 제자들이 자신의 희곡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를 무대에 올린다는 얘기를 듣고 모처럼 대학로의 연습실을 찾은 것.

이른 봄기운마저 느껴지는 날씨였는데도 연습실 안은 난방이 안된 탓인지 썰렁했다. 낡은 소파에 몸을 기댄 그의 발치께에 누군가 작은 난로 하나를 끌어다 놓았다.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는 고승길 교수(61·중앙대 연극학과)가 연출을, 국립극단장을 지낸 원로배우 권성덕씨(63)가 주연을 맡은 작품. 두 사람 모두 연극계에서 ‘원로’ 소리를 듣지만 노(老)스승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긴장이 되는지 “연습 중이라 미흡하다”며 미리 ‘한 자락’ 깔기에 바빴다.

“선생님, 그냥 중간 발표 정도로만 생각하고 봐주십시오.”(고승길)

“아직 대사도 덜컹덜컹합니다.”(권성덕)

연극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연가'

연습이 시작됐다. 권씨가 맡은 역은 68세의 원로 배우 서일. 이씨는 특유의 평양 사투리로 “이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사가 긴 연극이야”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권씨의 첫 대사는 무려 15분간 이어졌다.

극중 노배우가 자신이 출연한 연극평을 실은 신문을 꺼내 흔들며 “1945년 5월, 동아일보. 여러분 동아일보입니다…”라는 대목에 이르자 이씨와 스태프는 물론 연기를 하던 권씨까지 기자를 쳐다보며 웃었다. 어느덧 긴장은 풀리고 연습실은 훈훈해졌다.

‘어느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는 몇 년 전 ‘아카시아 흰꽃을 바람에 날리고’라는 제목으로 초연됐던 작품. 악극단 출신 노배우의 쓸쓸한 말년을 작가 특유의 유머와 풍자, 위트 있는 대사로 담아냈다. 모노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주인공 비중이 크고 연기력을 필요로 해 중견 남자배우들이 한번쯤 탐낼 만한 작품. 지난해 극단 차이무도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고 했으나 이씨의 반대로 무산됐다. 1인 다역으로 독특한 시도를 하려 했지만 “진지한 작품인데 ‘장난치면’ 안 된다”는 대선배의 뜻을 존중해 연습까지 들어갔던 작품을 중단한 것. 아직까지 선배에 대한 도리와 정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연극판’이다. 그의 막내딸인 무대디자이너 유정씨(37)가 무대미술을 맡은 이번 작품은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었으며 12일부터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나를 사랑한 사람들, 나를 외면한 사람들, 그리고 관객 여러분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독백과 함께 1시간40분 동안 잊혀진 노배우가 됐던 ‘진짜 노배우’의 연기가 끝났다. 이씨가 박수를 쳤다. 얼굴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권씨가 스승에게 다가와 “아직 미흡한 게 많습니다” 며 송구스러워했다. 연습이라기보다는 스승 한 사람을 위한 공연 같았다.

권씨는 “이 작품은 삶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느껴지는, 인생이 흐르는 희극”이라며 “40여년간 연기를 해왔지만 권성덕 하면 이 작품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요즘 연극에 대해 “인간 부재”라고 비판했다. “관객을 깜짝 놀라게만 하려다 보니 무대에 테크닉과 쇼 의식만 가득해. 어떤 인간이 무슨 얘기를 하는가는 없고 사건만 벌어진단 말이야.”

대중문화에 밀려 점점 설 땅이 좁아지는 연극계. 어쩌면 이 작품은 평생 연극계를 지켜온 노작가와 노배우의 마음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연극 속에서 기자가 원로 배우에게 묻는다. 왜 연극을 했느냐고, 후회는 없느냐고.

“…좋아했으니까. 후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해. 인생은 살다 보면 말년기는 후회하기 마련인데. 그리고 결국 이건 내가 택한 일인데, 수많은 역 중에서 내가 맡은 역이 연극이야. 그럼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 역을 해야 하는 게 아냐?”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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