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遊 說(유세)

  • 입력 2002년 12월 10일 18시 16분


說-달랠 세 遜-겸손할 손矢-화살 시

諸-여럿 제 鳴-울 명覇-으뜸 패

우리나 중국이나 謙遜(겸손)이 美德(미덕)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주는 것이 최선의 處世術(처세술)로 여겨져왔다. 괜히 ‘잘난 척’ 했다가는 뭔가 수양이 덜 된 사람으로 指目(지목)되어 자칫 衆矢之的(중시지적·뭇 사람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됨)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한 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 잘난 박사’들이 판을 쳤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수 백년 동안이나. 유명한 春秋戰國(춘추전국)시대가 그랬다. 수많은 인사들이 수십년 동안 골방에 틀어박혀 터득해 낸 處世術로 ‘나 잘났소!’ 하고 외쳤다. 이런 자들이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班固(반고)가 헤아려 보니 무려 189명에 달했다. 이렇게 많았으므로 諸子百家(제자백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익힌 지식을 실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비록 차림새야 거지나 다름없었지만 당찬 포부, 번뜩이는 지혜, 천하를 주무를 수 있는 術數(술수), 그리고 상대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현란한 세 치 혀를 가지고 있었다. 도처에서 한 목소리로 자신의 治國方策(치국방책)을 외쳤으니 百家爭鳴(백가쟁명)이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는 諸侯(제후)들이 온통 천하를 爭覇(쟁패)할 野慾(야욕)에 불타고 있을 때라 혹 그들의 맘에 들기라도 하면 일약 宰相(재상)에 올라 벼락 출세할 수가 있었다. 魏(위)의 范Q(범수)는 초추검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오줌 멍석을 뒤집어쓰는 굴욕을 참은 끝에 秦(진)의 재상에 올라 ‘靑雲(청운)의 꿈’을 펼쳤으며 찢어지게 가난했던 李斯(이사)는 秦始皇(진시황)을 만나 法家의 통치술을 주장한 결과 하루아침에 宰相에 올라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루게 한다. 이처럼 내가 익힌 지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을 등용하게 했던 것을 두고 司馬遷(사마천)은 史記(사기)에서 ‘遊說’라고 했으며 그런 이들을 說客(세객)이라 했다. 孔子는 최초의 說客이었다.

그러나 遊說가 어디 그리 쉬운가. 李斯같은 이가 있었던 반면 孔子는 14년간 6개국을 돌아 다녔지만 끝내 이상을 펴보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쓸쓸하게 晩年(만년)을 보내야 했다. 이 점은 孟子도 마찬가지였다. 遊說가 어렵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지금 그 遊說가 한창이다. 다음은 遊說의 어려움과 성공하는 遊說에 대해 알아본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