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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1월 26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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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냥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했는데요. 두 번은 바깥으로 두 번은 안으로….”
“아, 우리는 세로로 무늬를 잡은 걸 이쪽은 가로로 잡은 모양이다.”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 메리어트 호텔의 멤버십 라운지. 건장한 세 명의 남자가 각자 지금까지 뜨개질한 ‘작품’을 서로 비교해 가며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웠다.
대화의 주인공은 이 호텔에 근무하는 고은찬(30·객실관리부), 이건직(27·시설부), 백승진씨(25·판촉부). 옛날 어른들이 보면 “남자들이 할 일이 없어서…”라며 혀를 찰 일이다. 목도리를 뜨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손에 대바늘이 쥐어진 것은 10월 초. 호텔에서 올겨울 이웃 돕기의 하나로 마련한 행사에 동참한 것이다. 직원들이 직접 목도리를 떠서 경기 안산시에 살고 있는 사할린 교포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다. 지원한 80여명의 직원 가운데 10명이 남자다. 세 사람은 “처음엔 그냥 성금만 내고 말까 하다가 직접 만들어 드리는 게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뜨개질을 배우게 됐다”고 밝혔다. 직원들은 다음달 초 직접 만든 목도리를 사할린 교포들에게 기증할 예정이다.
처음 잡아 보는 대바늘을 이리저리 움직여 한줄 한줄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게 보기만큼 쉽지 않았다. 백씨는 “첫 몇 줄을 뜬 다음 너무 어려워 한 일주일가량 내팽개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고등학교 때까지 럭비 선수였던 백씨에게 섬세함이 요구되는 뜨개질은 어렵고도 따분한 일이었다.
고씨가 만든 목도리는 초반에 모양을 제대로 잡지 못해 울퉁불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랑스럽게 목도리를 내밀며 “이처럼 서투르게 만들어진 목도리를 할머니들에게 드리면 더 좋아하실 것”이라고 자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 사람의 손놀림에 속도가 붙었다. 고씨는 “처음에는 TV를 켜놓고 뜨개질을 할 때 화면을 쳐다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솜씨가 붙어 TV를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눈이 TV를 향해도 손은 자동으로 움직인다는 것. 세 사람 모두 이제 실 한 타래만 더 쓰면 목도리가 완성될 정도로 진도가 나가 있는 상태.
백씨는 뜨개질을 하면서 여자 친구와 더욱 친해지는 소득을 얻었다. 여자 친구는 처음에는 “별걸 다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서투른 남자 친구를 도와 주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아예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중. 백씨는 “카페나 차에서 여자 친구와 한 줄씩 번갈아 하는데 재미를 붙였다”면서 “무언가를 함께하다 보니 사이도 훨씬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세명 중 유일한 유부남인 이씨는 아직 뜨개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집에 알리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으며 야근을 할 때가 가장 집중이 잘 되기 때문에 회사에서만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것. 이씨는 “뜨개질하면서 다른 생각을 못하고 대바늘 끝만 쳐다보는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이씨의 목도리가 가장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생후 2개월된 딸이 있는 이씨는 “딸이 조금 더 큰 뒤에도 이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으면 딸의 모자라도 하나 만들어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세 사람은 “뜨개질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번 손을 대면 쉽게 멈출 수가 없다는 것. 몇 줄만 더, 몇 줄만 더 하다 보면 한두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린다.
고씨는 “저녁에 집에서 뜨개질을 하다 보면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되돌아볼 수도 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뜨개질을 배운 뒤로는 좋아하던 술도 많이 줄었다고.
인터뷰를 마친 뒤 세 사람은 또다시 머리를 맞댔다. 이씨의 목도리 중간 부분에 조금 이상한 부분이 발견됐기 때문.
“여기가 왜 이렇게 볼록하지?”
한참을 들여다보던 고씨가 무릎을 쳤다.
“여기가 틀렸네. 다른 줄에 비해서 한 코가 더 들어갔잖아. 거기만 풀어서 다시 해야 되겠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