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요리]가정요리 2세대, 취미넘어 사업에…

  • 입력 2002년 11월 21일 16시 49분


가정요리 강사들인 우정욱 황혜정 조현정씨(왼쪽부터)/신석교기자
가정요리 강사들인 우정욱 황혜정 조현정씨(왼쪽부터)/신석교기자
한국사회에서 상류층 여성들이 요리를 배운다는 것은 요리기술 학습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명문가 며느리와 딸들이 지금은 널리 알려진 ‘서울 옥수동 심영순 선생’(62·한식)과 ‘방배동 최경숙 선생’(51·일식과 중식)에게 요리 과외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이 20여년 전. 두 강사의 요리에는 ‘가정에서 만들어 먹기 위한 것’이라는 뜻으로 ‘가정요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초창기 ‘옥수동 선생’‘방배동 선생’에게서 요리를 배웠던 지금의 50대 상류층 여성들은 요리모임에서 다진 친분으로 ‘좋은 집안’끼리의 사돈 관계를 형성했다.

세월과 함께 ‘가정요리’ 수강 문화도 바뀌었다.

1980년대 말부터 1세대 가정요리 선생인 심, 최 두 사람에게 요리를 배운 지금의 30대 후반∼40대 초반 여성들은 ‘압구정동 미성아파트 ××동 선생님’ ‘대치동 미도아파트 ×××동 선생님’ 등으로 이름을 날리며 자신들이 배운 요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2세대 가정요리’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1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우정욱씨 집에서 수강생들이 일본음식 요리법을 배우고 있다./신석교기자

현재 손꼽히는 2세대 가정요리 강사는 서울 대치동 우정욱씨(40), 압구정동 황혜정(40) 조현정(40) 김정은씨(37), 개포동 신수연씨(39)등이다. 압구정동 이정임씨(37)와 서초동 조수지씨(41)도 수년간 요리를 가르쳤다.

‘2세대 가정요리 선생’들에게서 요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초창기의 극소수 상류층 여성에서 20, 30대의 경제력 있는 젊은 인텔리층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2세대 가정요리에 대하여

14일 오전 10시반 서울 압구정동 미성아파트 21동 ×××호. ‘압구정동 미성아파트 21동 선생님’ 황혜정씨의 56평형 집으로 요리 수강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7년 동안 외국생활을 한 뒤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정윤희씨(30), EBS 영어강사 김혜림씨(33), 무역업체 지프로젝트 대표 지은혜씨(37), “요리 좀 배워야겠다”는 시댁 식구들의 권유에 이날 처음 요리수업에 합류한 주부 김유정씨(28) 등 5명의 수강생이 서로 인사를 나눈 뒤 황씨의 아일랜드형 주방의 작업대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황씨는 조리법이 적힌 인쇄물을 수강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흰살생선탕수 비취탕 참소라무침 등 중국음식이 이날 배울 요리. 수강생들은 황씨의 설명을 빠짐없이 인쇄물에 받아 적었다.

“오늘은 제가 10여년 전 배웠던 방배동 최경숙 선생 요리를 가르쳐 드릴 거예요. 참소라와 비취탕에 들어가는 칡전분은 갤러리아 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살 수 있어요. 신사시장에서도 웬만한 재료는 구할 수 있죠. 참소라는 냉동실에서 단단해질 정도로 얼려야 얇게 썰어져요.”

20분 동안의 설명이 끝나고 요리가 시작됐다. 가정요리 수강생들은 직접 팔을 걷고 요리하지는 않는다. 대신 요리선생의 요리과정을 유심히 지켜본다.

“선생님(황씨)의 요리는 집에서 쉽고 빠르게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좋아요. 방배동 선생과 옥수동 선생에게서 직접 요리를 배워봤는데,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대신 조리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번거로웠거든요. 요리하며 만난 사람들과 음식이나 살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지은혜씨)

“평소 집에서 남편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3년째 배우고 있어요. 입맛 수준이 높아져 외식할 식당을 고를 때도 깐깐해집니다.”(정윤희씨)

수강생들은 예쁘게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완성된 요리를 함께 먹고, 1시간여 동안 요리와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2세대 가정요리는 향신즙을 비롯해 12가지 자연양념장을 개발한 옥수동 선생이나 정교한 계량요리로 명성을 얻은 방배동 선생의 요리처럼 강사 개인별로 독특한 음식 맛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스승으로 삼아 배운 옥수동 방배동 선생을 비롯해 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의 일식 요리선생 전경애씨(54), 지난해 83세로 세상을 뜬 반가(班家) 전통음식 전문의 강인희씨(늘 자신의 칼을 들고 출장교습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남동 외국대사관저의 외국인 요리강사 등 여러 명의 조리법이 혼재돼 있기 때문이다.

대신 2세대 요리선생들은 요리시간을 30분∼1시간 정도로 단축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며 조리과정을 단순화했다. 한 사람이 수강생들의 입맛에 맞는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을 모두 가르친다.

더덕튀김, 냉호박찜, 약식 춘권피, 느타리전과 생표고전, 고추 닭고기 볶음, 연근빈대떡, 차돌박이 구이와 겉절이, 해파리 냉채, 겨자 마요네즈 냉채, 갈비와 나물무침, 만두피 샐러드, 타르타르소스와 튀김, 깻잎멸치젓장아찌…. 수년간 수강생들의 호응을 관찰해 황씨가 주로 가르치고 있는 가정요리들이다.

●2세대 가정요리 선생들

2세대 가정요리는 주로 알음알음 인맥을 통해 수강생들이 모인다. 요리선생과 수강생 모두 고학력에 중상층 이상의 경제적 여유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국생활 경험이 있고 요리에 관심이 있는 프리랜서 전문직 여성이나 전업주부들이 수강생의 주류를 이룬다. 재벌가 여성들과 연예인들도 있다.

올 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둘째딸 이서현씨와 작고한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씨의 손녀 정유희씨가 함께 우정욱씨를 찾아와 요리를 배웠으며, 탤런트 유호정 오연수씨도 함께 팀을 이뤄 황혜정씨에게서 ‘보안을 유지하며’ 요리를 배웠다.

서울 서초동의 102평형 빌라인 자신의 집에서 재벌가 여성들을 상대로 요리와 꽃꽂이를 가르쳤던 조수지씨는 “돈 벌려는 목적으로 요리를 가르친 것이 아닌 만큼 수강료는 수강생들과의 사교에 주로 썼다”고 말했다.

2세대 가정요리 선생들은 대개 5∼10명으로 구성된 2, 3개 팀에 요리를 가르친다. 수업은 2주에 한번 진행되며 수업료는 재료비를 포함해 1회에 3만5000∼4만원. 외국연수 등으로 아이들 방학 때 더 분주한 학부모들의 스케줄을 감안해 방학 때는 수업을 일시 중단한다.

90년대 중반부터 서울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에서 요리를 가르쳤던 2세대 가정요리 선생들은 속속 50평형대로 집을 넓혀 이사했다. 세금을 단 한푼도 내지 않는 가정요리 수업료의 성격상 요리선생들의 수입이 짭짤했던 것이다. 의사 남편을 둔 이정임씨, 은행 지점장 남편을 둔 황혜정씨, 건축가 남편을 둔 우정욱씨는 “요리수업을 한창 많이 할 때는 월 수입 500만원을 거뜬히 넘겼다”고 회고했다.

한편 2세대 가정요리 선생 중 일부는 당초 취미로 시작한 요리를 사업으로 적극 확장하고 있다. 취향이 고급스러운 수강생들을 가르치며 늘 신경 써야 했던 집안 인테리어, 테이블 세팅 등을 사업아이템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7동 선생님’ 이정임씨와 ‘서초동 선생님’ 조수지씨는 4월 강남구 청담동에 자신들이 직접 요리하는 식당을 열어 영업 중이다.

97년부터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27동 선생님’으로 명성을 떨쳐온 조현정씨는 3년 전 토털 인테리어업체를 열어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조씨는 여기에 더해 그동안 배운 각종 요리 비법을 활용해 조만간 케이크 전문점을 차릴 구상을 하고 있다. 황혜정씨는 5년 전부터 요리 이외에 포크 아트(folk art:가구 장식 공예)도 가르치고 있다.

변호사 남편을 둔 중산층 주부로서 요리하고, 집안 꾸미고, 정원 가꾸는 고급스러운 노하우를 상업화해 거대 미디어회사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버스’를 설립한 미국의 마사 스튜어트. 2세대 가정요리 선생들 중에서 한국판 마사 스튜어트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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