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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9월 5일 16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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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던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예능계학교인 예원중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말렸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딸이 장래에 예술가가 되는 것이 못마땅해서도 아니었다.
사회적 성취에 욕심 많은 엄마에게는 바쁜 인생이 있었다. 서울 노원부녀복지관 관장이었던 엄마는 그해 8월부터 10월까지 여성지위향상 국제세미나 한국대표로 일본에 체류해야 했다. 엄마는 딸의 진학시험을 곁에서 살뜰히 준비시켜주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딸의 꿈을 접게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딸은 결국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다.
서울시청 인사행정과 이봉화 과장(49)은 그렇게 25년을 ‘일하는 엄마’로 살았다. 25년은 이씨의 아들이 살아온 시간과 일치한다. 73년 서울시 일반직 7급 공채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씨는 77년 결혼해 남편 이태환씨(53·사업)와의 사이에 아들 기백씨(25·일본 리츠메이캉대 3년)와 딸 다영씨(23·이화여대 4년)를 두고 30년째 공직에 몸담고 있다.
● 똑똑한 엄마
72년 충북 충주여고를 수석 졸업한 이 과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집념만큼은 저버리지 않았다. 딸 다영씨를 임신 중이던 79년 대학입학시험을 치러 외국어대 일본어과 야간과정에 진학해 주경야독했고,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석사를 거쳐 2001년 동대학원 행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 여성 공무원 최초의 박사였다.
● 혼자서도 잘한 딸
이 과장은 89년 서울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들과 딸을 ‘강남’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밖에서 일하는 엄마는 초조하다. ‘집에만 있는 엄마’를 둔 아이들에 비해 우리 아이가 괜히 기죽지는 않나, 외롭지는 않나 늘 마음 한구석이 애틋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둘째인 딸 다영씨는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잘 했다. 엄마의 반대로 예원중학교 진학이 좌절된 후에도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갈등도 있었다. 이 과장이 일 때문에 매일 밤 11시가 넘어 퇴근해 딸의 공부방에 들어가보면 딸은 읽던 책을 참고서 밑에 숨겼다. 엄마 몰래 외국 패션잡지나 화가들의 도록을 틈틈이 봤던 것이다. 이 과장은 그때마다 딸 앞에서 그림책을 갈기갈기 찢었다.
고민하던 이 과장은 어느 날 딸의 그림을 한 화가에게 가져갔고, 화가로부터 “미술을 가르치라”는 충고를 들었다. 이 과장은 그때부터 딸을 미술학원에 보냈다. 남들은 수년씩 준비하는 미대 입시를 다영씨는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화여대 도예과에 입학했다.
● 엄마와 어긋나는 아들
이 과장은 아들에 대해 “자라는 내내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고 말한다.
맏이인 기백씨는 중위권 성적을 간신히 유지했다. 엄마가 매주 가정교사를 불러 뒷바라지해도 아들은 잘 따라와주지 않았다. 비오는 날 다른 엄마들이 우산을 갖고 학교에 올 때 자신은 비를 맞고 왔다느니, 엄마가 도시락을 전날 저녁 미리 싸기 때문에 친구들 것보다 맛이 없다느니 하는 불만만 쏟아냈다.
엄격하고 근면절약하는 부모와 풍족한 주변환경 사이에서 아들은 우등생도, 불량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아이로 자랐다. 언제나 부모를 만족시키는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다. 지방대를 1년 다니고 2년반동안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아들은 겉돌았다.
이 과장은 아들을 위해 뭔가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엄마는 ‘부모의 역할이란 결정적일 때 아이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들은 “왜 엄마는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 없냐”고 원망했기 때문이다.
이 과장은 서울시에 해외연수를 신청했다. 아들이 군 제대하는 시기(99년 4월)에 맞춰 99년 3월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대에서 박사과정(사회복지학)을 시작했다. 아들은 제대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왔다.
● 아이들과 함께 한 2년반
이 과장은 99년3월부터 2001년 9월까지 일본 생활 대부분을 아이들과 함께 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친 다영씨는 99년 3월 엄마와 함께 일본에 도착해 교토 외국어대에서 1년과정의 일본어연수를 시작했으며, 아들 기백씨는 4월부터 일본어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이 과장은 매일 6개의 도시락을 준비했다. 오전 8시 자녀와 함께 승용차로 집을 나서 아들과 딸을 각각 학원과 학교에 내려주고 자신도 학교로 갔다. 공부를 마친 아이들은 엄마가 있는 학교로 와서 함께 저녁 도시락을 먹고 도서관을 닫는 밤 11시까지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바쁜 엄마에게 이러쿵 저러쿵 수다떨어 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인생의 고민, 가족에 대한 생각 등을 자연스럽게 털어놓게 됐다. 특히 아들은 “그동안의 시간을 아깝게 보낸 것을 후회한다”며 엄마를 붙들고 울었다.
그해 12월 일본 정규대학 능력시험에서 아들은 딸보다 높은 성적을 얻었다. 늘 ‘동생보다 못했던’ 오빠는 이 시험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2000년 교토 리츠메이캉(立命館)대 국제경영학과에 입학한 아들은 이후 줄곧 A학점을 받으며 ‘새 인생’을 살고 있다.
● 삶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이 과장은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단 한번도 전업주부로 살 걸 그랬다고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또 공부 잘 하는 지방출신 친척들이 이 과장 집에 살면서 대학을 다녔던 것, 파출부 아주머니가 바뀌지 않고 10여년째 일한 것도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누구보다도 든든한 지원자는 남편이었다. 이 과장의 남편은 가족이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에 혼자 남아 병에 걸린 아버지의 대소변을 직접 받아내야 했다. 그러나 남편은 한번도 일하는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유학중인 이 과장의 아들은 지금도 가끔 “난 집에만 있는 여자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해 엄마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러나 이 과장은 “연수를 통해 뒤늦게나마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 뒤 서로 친밀해졌고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자평한다.
“맞벌이 엄마라면 직장 연수의 기회를 통해 경력 관리도 하면서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것을 권하고 싶어요. 중요한 건 그 시기가 너무 늦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죠. 난 좀 돌아서 갔잖아요.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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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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