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남성대상 첫 성희롱 판결전말

  • 입력 2002년 5월 16일 14시 43분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진 것은 1994년. 당시 국내 최초로 남성에 의한 ‘성희롱’ 여성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인 획기적인 판결이었다.

이로부터 8년이 지난 최근 이번에는 여성에 의한 ‘성희롱’남성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가 받아들여져 화제가 됐다. 이 사건은 특히 중년의 기혼 여성 직원이 많은 블루 칼라 직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성희롱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한 의류업체.

여성복 분야에서 국내 브랜드로서는 꽤 이름있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직원 300명 규모의 의류회사다.

장모씨(28)는 지난해 이 회사 생산부에 속한 기계실 기계수리기사 보조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의류회사 생산부의 모습은 봉제공장을 연상하면 비슷하다. 이 회사 생산부에는 재킷 스커트 등으로 세분화된 8개의 생산라인이 있다. 생산라인마다 10여대의 미싱이 설치돼 있고 한 대의 미싱에 미싱사와 미싱보조가 붙어 함께 일한다.

미싱사나 미싱보조사원은 평균 연령 40대의 기혼여성 직원들이 대부분. 그 중에는 생산부 A라인에서 미싱사로 일하는 올해 40세의 A씨와 35세의 B씨도 있었다.

장씨가 하는 일은 정기적으로 미싱을 점검하거나 고장난 미싱을 고치는 일이었다.

장씨가 성희롱 진정을 제기한 서울동부지방노동사무소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해 1월 8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씨는 미싱을 고치러 생산부 A라인에 올라갔다. 장씨가 기계를 수리하는 사이 A씨가 갑자기 장씨를 등 뒤에서 껴안으며 “○○는 덩치가 있어서 좋아” 등의 말을 했다. 장씨가 거부의사를 표시했지만 A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B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A씨를 향해 “장○○는 내 거야. 너는 ○○(다른 남자직원의 이름)하고나 놀아”라고 말했다.

이틀 뒤인 1월 10일 다시 장씨가 생산부 A라인에 올라갔을 때는 A씨와 B씨가 장씨의 엉덩이와 옆구리를 번갈아 만지면서 “○○는 영계같아서 좋아” 등의 말을 했다. 장씨는 “당시 심한 모멸감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생산부에는 여자 직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자 직원은 기계실 재단실 등에 10여명이 있을 뿐인데 여자직원은 무려 160여명에 달한다. 중년의 기혼 여성직원들이 주를 이루다보니 작업장에서 남성을 상대로 한 질펀한 농담과 행동도 수시로 오간다. 노동부 여성정책과 윤흥수 근로감독관은 “중소업체에 근로감독을 나가보면 중년 아줌마들의 거침없는 입담을 통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런 농담과 행동은 그녀들 자신에게 ‘직장생활의 윤활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 회사 관계자는 “생산라인별로 회식이라도 있으면 기계실의 젊은 남자사원들도 끼어 함께 술도 먹고 노래방 나이트클럽 등에도 같이 간다”며 “그러다보면 아줌마 직원들과 기계실의 젊은 남자 사원들은 누나 동생 사이처럼 허물없어지고 진한 농담도 주고 받는다”고 전했다.

장씨가 입사한 것은 2000년 5월. 회사 관계자는 “장씨 역시 회사 생활에 적응한 2000년 8, 9월경부터 사건이 터진 작년 1월경까지 아줌마 직원들과 회식도 같이 하고 함께 어울렸다”고 전했다. 회사에서는 아직도 장씨의 사건을 ‘친밀감의 표시’나 ‘다소 짓궂은 장난’정도로 인식하는 이들이 있다. 장씨의 사건이 알려진 후 나이 든 남자직원들은 문제의 여직원들을 만나 “나도 누가 뒤에서 한 번 껴안아 줬으면 좋겠다”느니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장씨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장씨가 성희롱을 당할 당시 A라인 미싱보조사원이었던 장씨의 여자친구 C씨(29)가 다른 여직원 3명과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건 이후 ‘A씨 등이 장씨를 갖고 논다’는 소문이 회사에 돌았다. 둘은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성희롱 사건이 일어난 서울 성수동의 한 의류업체 빌딩. 이 빌딩 지하 1층에 생산부가 있다.

두 사람은 작년 3월 생산부장을 찾아가 문제를 제기했다. 부장은 처음에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미싱사와 장씨의 여자친구인 C씨 같은 미싱보조 간에 흔히 있는 불화가 밑바탕에 깔린 사건이라 생각하고는 A라인 직원들을 모두 불러 ‘미싱사와 시다들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취지의 훈계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며칠 뒤 다시 부장을 찾아왔다.

부장은 이번에는 “A씨 등이 정말 그런 일을 했다면 당사자의 자인서나 목격자의 진술서를 받아오라”며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퇴사시키겠다”고 질책했다. 서로 언성이 높아졌고 부장은 사무실을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두 사람을 업무방해로 파출소에 신고해 연행케 했다. 두 사람은 결국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 둔 장씨와 여자친구 C씨는 보름쯤 뒤인 4월 12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에 있는 서울동부지방노동사무소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처음에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분했던 것은 잘못한 일도 없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직장에서 쫓겨난 것과 해고수당도 받지 못한 데 있었다.

당시 이들의 진정사건을 조사한 유명자 근로감독관(현재 서울 금천고용안정센터 근무)은 “두 사람이 자발적인 형식으로 사직서를 내 버린 상황이어서 해고수당 지급여부를 다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유 감독관은 퇴사경위를 들은 뒤 장씨에게 ‘직장내 성희롱’으로 관점을 바꿔 문제를 제기해 보자고 조언했다. 장씨는 “남자도 성희롱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유감독관은 “될 수는 있는데 해 봐야 알겠다”고 했다.

유 감독관은 A씨 등을 불러 조사를 했으나 이들은 장씨 등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증언을 해 줄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성희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것인가. 장씨의 여자친구 C씨는 당시 자신과 같이 미싱보조로 현장에서 성희롱을 목격한 D씨를 설득했다. 결국 D씨는 C씨의 설득에 못이겨 노동사무소로 나와 사실을 털어놓았다.

유 감독관은 “동료 직원인 D씨의 증언 덕분에 장씨 사건이 성희롱으로 판정받긴 했지만 당시로선 장씨가 법원의 손해배상 판결까지 받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성희롱 장본인인 A씨 등과 피해를 당한 장씨간의 관계가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료 직원의 관계였고, 장씨가 신체건강한 남자여서 여직원들의 성희롱을 물리적으로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그 이유였다.

법원은 성희롱임을 인정했다. 남성 성희롱 문제를 다룬 마이클 크라이튼 원작의 ‘폭로’라는 영화를 보면 “성희롱은 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관한 문제”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말은 성희롱은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남녀고용평등법은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동료직원 관계에서도 성희롱을 인정하고 있다.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성희롱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다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노동부 여성정책과 윤흥수 근로감독관은 “여자는 남자들만 있는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지만 남자는 여자들만 있는 곳을 얼굴 똑바로 들고 지나가기 힘들다”며 “다수의 여자들과 한 남자의 관계도 심리적으로는 쉽게 극복하기 힘든 권력관계로 성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성희롱을 인정한 외에도 ‘회사를 사직할 의사가 없는 장씨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게 한 경우’로 봐서 해고무효를 확인하고 회사가 장씨가 복직할 때까지의 임금을 지불하도록 판결했다. 성희롱과 관련한 위자료는 300만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회사가 장씨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은 1000만원이 넘어선다. 회사측은 1심 판결결과에 불복해 항소할 예정이다.

최근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작년 접수된 직장내 성희롱 상담건수는 1340건으로 전년도의 1044건에 비해 28.4% 증가했다. 이 가운데 12건이 성희롱으로 인정돼 해당업체가 과태료 처분 등을 받았으며 이 중 한 건이 바로 장씨의 사건으로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후 처음으로 인정된 여성에 의한 남성 성희롱 사건이 됐다.

미국의 경우 행정부 소속기구인 고용기회평등위원회(EEOC)에 따르면 남성들이 제기한 성희롱 소송이 전체 성희롱 소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2년 9.1%에서 2000년 13.6%로 늘어났다. 성희롱 소송건수는 1997년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기업체의 적극적인 성희롱 교육 등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직장내 남성에 대한 성희롱 보고건수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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