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정지용 문학상 받은 시인 김지하 인터뷰

  • 입력 2002년 5월 6일 18시 07분


《김지하 시인(61)의 새 집은 아직 분양이 채 끝나지 않은 경기 고양시 일산 중심가의 한 오피스텔에 자리잡고 있다. 어린이날을 맞아 인파로 붐비는 호수공원과 김포 일대가 저만치 한눈에 들어왔다. 방 한 쪽에는 말아놓은 난초 그림이 가득했다. 시인은 그동안 각종 매체에서 보아온 ‘불타는 눈초리’ 대신 편안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정지용 탄생 100주년인 올해 정지용문학상을 6일 수상한 그에게서 정지용 문학과의 인연과 이달 말 간행 예정인 ‘김지하 사상전집’(실천문학사) 출간에 대한 소회 등을 들어보았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한국의 ‘대표적 저항시인’으로서 지난 시대의 대표적 서정시인, 또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이념의 희생물이 됐던 시인의 이름을 딴 상을 받는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만….

“인연이 있죠.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3년 내내 국어를 가르친 선생님이 이화여대에서 정지용 시인에게 배운 분이셨어요. 이인순 선생님이라고, 내게 문학을 가르쳐준 단 한 분의 선생님인데, 그분이 갖고 있던 지용시집을 다 내게 물려줬어요.”

-지용의 시가 마음에 와닿았습니까.

“차원이 높지만 어렵다기보다는 세련되고 섬세한 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의 차원이 보통이 아니거든. 민족주의 모더니즘 가톨릭 이 세 가지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개념이 아닌데, 지용의 시에서는 이 세 가지가 ‘따로 놀면서’ 말썽없이 잘 얽혀들어 있어요. 후기의 시 ‘백록담’에는 마침내 이 세 가지가 저절로 어울려들죠. 차원이 달라져 버리는 겁니다. 놀라운 거죠.”

시인의 앞에는 두꺼운 원고지 더미가 놓여 있었다. 구겨버린 파지(破紙)도, 줄을 그어 수정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원고였다. 한 인터넷 매체에 자서전을 연재 중이라고 했다. 인터넷에 육필원고라니….

-스스로 지용 시의 어떤 특질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애린’ 연작을 쓰기 시작한 뒤 줄곧 추구해온 이미지가 흰 빛과 검은 빛의 조화입니다. 나는 그걸 ‘흰 그늘’이라고 얘기하죠. 우리 민족의 미학적 특징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판소리를 섬세하게 듣는 ‘귀 명창’들이 ‘저 소리꾼은 곧잘 하긴 하는데 소리에 그늘이 없어’라고 하면 그 소리꾼은 끝이거든요.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천신만고 끝의 쓴 맛 단 맛 같은 것, 인생의 복잡성을 경험한 뒤에 나오는 ‘아우라(Aura)’ 즉 예술의 경건성과 영적인 면이 ‘그늘’이에요. 그런데 지용의 후기시에 이 ‘그늘’이 완벽할 정도로 추구돼 있어요. 그런 점에서 그는 미당보다 민족적 영성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죠.”

이달 말 간행 예정인 ‘김지하 사상전집’으로, 아니 그의 사상으로 화제를 옮겨보았다. 이달 말 전3권으로 간행될 전집에서 그가 평생 몰두해온 철학 미학 생명학에 대한 사색들을 정리된 형태로 선보이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공격’하는 여러 말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주변 얘기를 듣다 보면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에 김지하가 너무 우주적인 초대담론에 몰두하는 게 아니냐’란 말도 간혹 있습니다.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허허…’ 하고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런 종류의 공격을 받으면 간혹 ‘핏대’를 올리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다소 의외였다.

“물론 요즘은 아날학파의 영향을 받은 ‘미소(微小)’담론이 유행이죠. 그러나 아날학파 경우에도 철새의 이동경로 변화, 곡물 가격 등의 작은 부분에서 환경문제 등의 지구적 관심사를 찾아내는 것이거든. ‘거대’가 밑을 하나로 꿰어서 각 담론에 연계성을 주어야 공론(空論)이 되지 않습니다.”

-왜 과학과 실증의 21세기에 주역 태극 율려(律呂·소리와 가락의 질서) 등을 들고 나오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쇼비니스트(국수주의자)도, 세계주의자도 아닙니다. 단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사상 가운데 오늘날 인류가 맞고 있는 전지구적 문제점에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돼 있는가? 나는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배타적으로 흘러서는 물론 안돼죠. 주역 율려, 물론 그렇습니다. 인류가 맞는 카오스에 대해 창조적으로 답할수 있는 부분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초대담론’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홀로 새로운 사상의 틀을 구축하는 것입니까.

“나 혼자 다 해낼 수 없습니다. 실마리만 제공하는 것입니다. 결과물은 여러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연계해서 작업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문화운동을 포함하는 ‘운동’을 내가 강조해온 이유가 그것입니다. 나는 조직자가 아니라 머리를 쓰는 ‘참모’ 중 하나일 뿐입니다. 얼마전 서울대 조동일 교수(국문학)와도 만나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될 수 없다. 앞으로 올 사람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일 뿐이라고….”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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