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55세 주부 추정림씨 '나홀로 영국 어학연수기'

  • 입력 2001년 4월 10일 18시 36분


추정림 주부
추정림 주부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사는 50대 주부인 추정림씨가 최근 영국에 6개월 과정의 어학연수를 홀로 다녀왔다. 그는 중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연수를 결심한 과정과 현지 생활, 이로 인해 바뀐 인생관 등을 적어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내 나이 55세.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자식을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 내기 위한 여성의 본분에서 나 또한 예외 없이 소임을 다하며 보람과 자부심으로 살았다. 느닷없이 찾아올 빈 둥지의 어미새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랬다. 남편의 퇴직, 각자 인생을 찾아 홀연히 어미 품을 떠나는 자식들을 보며 텅 빈 가슴이 됐다.

독립적인 자아와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우선 하고 싶었던 것을 행동에 옮겼다. 바로 여행을 겸한 언어연수였다. 비교적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던 내가 느낀 것은 그 나라 언어의 필요성이었다. 20년 전 대만 유학 중인 남편을 따라 그 곳에 살 때 TV를 통해 배운 서툰 중국어로 그들과 우정을 키우고 문화를 알게 된 일은 신선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영국 어학연수.’ 지난해 9월 홀로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틈틈이 집에서, 미국 유학중인 아들 내외를 만나러 가서도 학원을 다니며 영어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나 나이 탓인지 쉽지 않았다.

굳이 영국을 택한 데는 6년 전 작은아들과의 배낭여행 중 아들의 권유로 런던에 남아 영어를 배우다가 집안 사정으로 급히 귀국해야 했는데 그 아쉬움도 잊지 못하거니와 기댈 곳 없는 곳에서 의지를 다시 한번 시험하고 싶어서였다. 이틀 간의 유스호스텔 숙박 후에 홀로 어학원을 수소문하고 영국인의 가정을 숙소로 정했다.

20세 전후의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외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칼란스쿨에서 수업을 받을 때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나를 의아해 했다. 내가 머문 가정의 영국인 부부도 수상히 여겼으나 모두들 스스럼없는 친구로 대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용기 있는 여성으로 격려해 주었고 그 칭찬은 자신감이 되었다. 한국에서 오는 남편의 사랑과 격려의 편지들이 그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다시 스무 살의 꿈 많던 시절로 돌아간 착각 속에서 새로운 삶의 희열을 맛보았다.

여행 때마다 즐겨 찾는 벼룩시장에서 지나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구경했고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영국사람들의 모습과 검소한 생활을 통해 학원의 영어공부 외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세계의 어머니들 모습, 절도 있는 어느 할머니의 자세, 맞벌이 부부의 철저한 역할분담과 육아방법 그리고 폴란드 친구가 ‘시간제 아기보기’로 소개해 준 폴란드 이민가정의 생활 엿보기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던, 그래서 중년을 넘기고 노년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서글픔에서 지금은 인간의 수명 연장으로 나는 아직도 살아온 세월만큼이 남았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황혼은 인간에게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당당히 맞섬으로써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계기가 된 런던생활. 이를 지원해 준 남편에게 감사한다.

추정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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