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죽은 아내의 환상과 8년간 동거 '진술'

  • 입력 2000년 11월 3일 18시 39분


□진술(陳述) / 하일지 지음 210쪽 7000원 문학과지성사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된 K대 철학과 교수의 ‘진술’을 받은 강력반 형사의 가상 진술 형식을 빌어)

지난밤 관내 정신병원 원장의 사무실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장이 사무실에서 아령으로 두부(頭部)를 맞아 죽었죠. 책상에 국립대학 교수의 진찰카드가 펴져 있는게 심상치 않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감식반이 흉기와 사무실 뒷출입문에서 교수 것과 같은 지문이 찾아냈죠.

‘아, 이 자가 범인이구나!’ 짜르르 감이 왔습니다. 탐문 결과, 그 양반이 오래전 신혼여행을 갔던 해안가 호텔에 혼자 투숙해 있더군요. 수사대를 급파해서 체포해 심야에 서울로 압송했습죠.

정황증거가 워낙 확실해서 술술 자백을 받아내리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닌거라. 철학이 사람 잡았나, 허우대는 멀쩡한 양반이 정신이 완전 갔더라고. 처남을 죽이지 않았다고 뚝 잡아떼서가 아니라니까. 8년전 미국 유학시절 고생고생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동거녀(본인은 아내라고 주장합니다만)가 살아있다는 거라. 막 잡혀온 호텔방에서도 같이 밤을 보냈다고 우기기까지 하는데….

얼마나 차분하고 조리있게 증언하는지, 진술서를 중간밖에 못 본 독자라면 진짜라고 믿었을 겁니다. 고등학교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의 반대에도 결혼(실은 동거)을 했는지, 어떻게 붙잡혀온 호텔로 신혼여행(실은 도피)를 왔었는지, 떨어진 과일을 먹으면서 연명했던 유학시절하며, 파란만장한 연애담도 눈물 없이 못들어줄 신파였다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사망’ 도장이 꽝 찍힌 호적등본까지 코앞에 들이밀어도 도통 믿질 않는거라. 득달을 했더니, 8년전 아내가 죽는 긴 악몽을 꾼 적은 있다고 하더군요. 지난 8년간 아내의 환상과 같이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도 했다는 거지. 취조실에서도 코드가 뽑힌 전화통을 붙들고는 아내와 통화한다면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제 몸보다 사랑했던 아내를 갑자기 잃고나서 꿈하고 실제가 머릿속에서 막 뒤섞인거라. 의사 양반들은 이런 분열증을, 파토로지컬 모링… 딜루전(Pathological Mouring delusion), 병적 애도반응에서 오는 망상이라 그럽디다.

직업상 경험인데, 배운 사람일수록 미쳐도 똑똑하게 미칩니다. 환상도 앞뒤가 짝짝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죠. 그럴수록 사고도 잘 치는 법이고.

나도 불쌍한 그 양반 심정 이해는 됩디다. 진범을 따지자면 교수가 아니라 그놈의 사랑이었던 거지. 유행가 가사도 있잖소, 사랑이 죄인가요…. 아름다웠던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맘이 너무 간절해서 현재를 인정하지 못한 것이지. 하지만 인생사 낙장불입! ‘나 다시 돌아갈래!’ 소리치며 철길로 뛰어들어봐야 소용있남. 모든 치정이 통속인 것은 그 때문이죠. 철학한다는 교수님이 그걸 모르시니 헛똑똑일 밖에.

내일자 신문 사회면에 실린 가십은 안봐도 훤합니다. ‘철학교수 정신착란으로 처남 살해’. 1단짜리 기사가 담지 못한 진실이야 ‘진술’을 읽은 여러분만이 아실겝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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