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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3월 3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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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어느날, 런던 언어학회는 한 장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새롭고 방대하며 획기적인 영어 사전 편찬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원봉사자는 특정 시대의 책을 읽고, 특별한 용례에 따라 쓰인 단어를 찾아 카드에 기록한 뒤 사전 편찬자에게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수백 명의 자발적 노력으로 사전에는 각 시대별 어휘의 풍부한 용례가 수록될 것이었다.
사전 편찬의 책임을 맡은 제임스 머리는 오래지 않아 한 자원봉사자의 두드러진 활동에 주목하게 됐다. 그는 책에 나오는 여러 단어를 무작위로 찾아 보내지 않고, 편찬팀에 먼저 어떤 단어의 용례가 필요한지 물어본 뒤 자료를 정확히 찾아 보냈다. 머리의 편찬팀은 그 덕에 훨씬 쉽게 일을 진척시킬 수 있었다. ‘특별한’ 자원봉사자의 이름은 닥터 마이너였다.
편찬팀과 자원봉사자를 위한 파티가 여러 차례 열렸지만 마이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깍듯한 예의를 차린 편지와 자료만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을 뿐. 어느날 머리는 우연히 방에 들린 미국 하버드대 사서의 입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는데….
‘옥스퍼드 영어 사전’. 1857년 계획에 착수, 1928년 처음 발매되었으며 전12권에 40만개의 단어와 200만개 가까운 인용문이 초판에 실린 기념비적 역작이다. 여러 시대의 문서에서 일일이 인용문을 발췌한 이 사전은 한 단어가 수세기 동안 의미 철자 용례등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영어의 산 사서(史書)’로 꼽힌다.
사전 편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닥터 마이너는 과연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그는 착란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정신병원에 수감된 광인이었다. 남북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 끔찍한 전쟁 속에서 정신적 상해를 입은 뒤 런던으로 건너갔고, 결국 사람을 죽여 수십년간의 유폐생활에 들어가게 됐다. 미국 군인연금을 받으며 병원에서 ‘유복한’ 생활을 했던 그는 두 개의 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며 지식욕을 불태웠고, 사전 편찬을 돕는 일에서 좌초된 자신의 삶에 다시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작가 겸 자유기고가로 활동중인 저자는 수많은 가지를 뻗친 텍스트로 독자 앞에 이 책을 내려놓는다. 이 책은 풍부한 탐구와 암호풀이로 수놓아진 추리소설이며, 동시에 사전 편찬과정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 역할도 한다. 광인 마이너와 일생을 사전편찬에 헌신한 머리 두 사람의 생애를 대비시키며 깊은 공감과 감동을 안겨주는 문학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각 장의 서두에는 그 장의 내용을 축약하는 단어를 옥스퍼드 사전 수록 형태 그대로 제시, 사전 편제(編制)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공경희 옮김 279쪽 8500원.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