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창작집 '미성년', 소설속-현실속 작가 욕망 풀다

  • 입력 2000년 2월 18일 19시 23분


소설쓰기라는 행위가 소설의 소재가 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작가가 소설 속의 현실과 실제의 창작행위를 넘나들며 텍스트를 엮어나가는 것 역시 한물 간 유행일 수 있다. 그러나 김연경(25)의 새 창작집 ‘미성년’(문학과 사회 펴냄)은 작가를 텍스트 안에 끌어들이는 방식에서 사뭇 독특하다.

‘피아노, 그린비의 상상’에서 작가의 글쓰기 행위와 소설 속 작가의 행위는 명확한 구분점을 갖지 않은 채 섞여든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제법 긴 축에 들어가는 문장을 관계사가 부재하는 한국어 특유의 연결 어미와 몇 개의 쉼표로 이어 놓은 뒤, 나는 몇 년 전에 산 보랏빛 파카로 중무장을 하고 파카에 달린 보랏빛 모자까지 쓴 채,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런 식이다.

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선택하고, 성격을 부여하는 과정을 가감없이 독자 앞에 공개한다. “스물이 넘은 나이에, 아이들이 치는 ‘바이엘’ 하권을 시작한 여자는 은영과는 대비되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내 소설의 주요 인물이 된다….”

표제작 ‘미성년’에서는 서두에 글쓰는 주인공이 등장, “맹세코 이것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수기”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말미에서는 서두에 등장한 주인공조차 작가가 지어낸 허구의 인물임이 밝혀진다. ‘소설 속의 소설 속의 소설’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셈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고연경으로, 또 고희경으로 한 자씩 변주되며, 이런 이름바꾸기 조차도 ‘게으르다’며 작가의 야유를 받는다. 시점 뒤집기와 ‘거리두기’ 가 양파껍질처럼 켜켜히 쌓인 텍스트 앞에서 독자는 한동안 길을 잃고 만다.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를 몽상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자유도 부여되지 않은 ‘미성년’의 껍질 앞에서 작가는 현실을 끊임없이 해체함으로서 주인공의, 혹은 작가 자신의 욕망에 채워진 빗장을 풀려 한다. 그러나 단편 ‘심판’의 그로테스크한 법정처럼 억압과 보복은 어김 없이 돌아온다.

책 말미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손종업은 ‘김연경의 소설은 ‘나’라는 초라한 존재 위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대한 진지한 탐색’ 이라고 평하며, ‘소설 속에서 에고이즘을 뛰어넘어 타자와 생동하는 관계를 맺기를’ 당부했다.

작가는 96년 스물한 살의 나이로 계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데뷔했고 97년 첫 창작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을 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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