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아멜리 노통 '두려움과 떨림'/경직된 조직생리 해부

  • 입력 2000년 1월 14일 18시 50분


벨기에 여성이 도쿄의 종합 무역상사에 취직했다. 처음 맡겨진 업무는 회의실에서 차를 따르는 일. 쓸데 없이 일본어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업무는 철회되고, 그에게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서류 복사 심부름만이 맡겨진다.

옆부서의 유제품 담당 부장을 만나 실력을 발휘할 기휘가 주어지지만, 공들여 작성한 서류는 ‘타인의 일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적성에 맞지 않는 경리일로 실수를 거듭한 끝에 화장실 정리라는 기막힌 업무가 맡겨지는데….

99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아멜리 노통의 소설 ‘두려움과 떨림’(Stupeur et Tremblement)이 번역 출간됐다. 지난해 9월 프랑스에서 발매된 뒤 ‘명석한 통찰력과 유머’(르몽드) ‘빈정거리는 듯 하면서 억제할 수 없는 재치’(르 피가로)라는 찬사 속에 일찌감치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의 유력한 후보로 점쳐진 작품.

‘잔인함과 웃음’이라는 특징으로 잘 알려진 작가 특유의 빛나는 시니시즘(냉소주의)는 작품 전체에서 불쑥 불쑥 솟아나오면서 독자를 분노와 폭소 속으로 끌어들인다.

화려하기까지 한 비유의 세계는 일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에 능통한 작가의 어학실력과 신화에 대한 지식이 밑바탕을 이룬다. 그 세계가 낯설더라도 걱정할 건 없다. 역자의 친절한 주석이 부가돼 있다. 신화의 세계가 아니라도, ‘왼쪽 눈에는 히로시마, 오른쪽 눈에는 나가사키를 품고 그녀가 다가왔다’와 같은 표현에서 웃음을 참기란 힘들다.

조직의 우스꽝스러움을 해부하는 작가의 시선은 때로 카프카의 ‘성’을 상기시킨다. 불합리의 정점에는 사장이 있다. 사장은 관대하고 친절하며 모든 불합리의 정체를 알고 그 희생자를 동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구원은 내려지지 않는다.

남는 상념 한가지. 작가의 창백한 조소와 유머에 우리는 마냥 낄낄거릴 수 있을까. “맞아, 일본인들은 사디스틱하면서 위선적이야….”라며 동조의 조소를 보낼 것인가. 혹은 “동양에 관한 모든 것을 괴물스럽게 보는 서양인들의 비뚤어진 시선이 먹이감을 찾은 것”이라며 염려의 눈길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소설은 소설일 뿐” 이라고 말할 것인가.

저자는 일본에서 출생했고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25세때인 92년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이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를 받으면서 작가로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열린 책들 펴냄.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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