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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8월 25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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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예 안에서 보조 일을 했고, 형은 발송부라 한 달 동안 잡역으로 짐만 날랐어예.
둘이서만?
언제예. 스무 명도 넘게 갔는데 우연히 같은 데로 배치가 안됐심니꺼.
어떻게 들어갔어?
노학연대 한다꼬 선배들이 진작에 들어가 있심더. 기독교 선교 기관도 있고예.
그 친구 피서 갔다온줄 알았더니.
피서두 했어예. 형은 일 끝나고 해운대 놀러 왔습디더. 부산 집으로 전화 와서 내가 나갔거든예. 갈비에 냉면에 실컷 얻어 묵었어예. 형은 할껀 다합니더.
그렇겠지….
지는예 부미방이 터졌을 때 그 선배들이 미친 사람들인줄 알았어예.
뭐가 터졌다구?
부산서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안일어났습니꺼.
아, 그랬어. 대단한 사람들이었어. 내가 아는 이도 있었구.
꼭 흐르는 물 맨치로 뒤를 잇는다 아입니꺼.
이젠 우리 눈 좀 붙일까? 들어가서 자자.
자리를 깔고 미경이와 나는 나란히 누웠다. 불을 끄고 누웠는데 미경이가 곁에서 부시럭거렸다.
언니 자요?
아니, 왜 잠이 안 와?
언니한테 가끔 와도 됩니꺼?
그래, 전화하구 와.
사실은 저 이번 학기에 등록 안했어예.
집에 의논없이?
학교 때리치아 버릴라꼬요.
나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는 말라든가, 저질러 버리라든가 하는 어떠한 말도 부질없게 생각되어서였다. 나는 잠깐 정희를 생각했고 그네의 신랑을 떠올렸다. 조금 있다가 돌아누우니 미경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새어 들어온 불빛으로 어느 결에 방안이 부옇게 밝아져 있었다. 베개 뒤로 흐트러진 그네의 계집아이 같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나는 잠든 미경의 가슴 아래로 내려온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언제나의 생활 습관대로 열 두 시가 다 되어서였다. 커튼을 쳤지만 방안은 이미 훤했고 옆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부자리는 잘 개켜져서 웃목에 놓여 있었다. 내가 화실로 나오니 싱크대에 쌓아 두었던 설거지감들은 모두 사라졌고 전기 밥솥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깨끗이 치워진 식탁 위에 리본 편지가 놓여 있었다. 편지를 펴보니 큼직큼직하고 줄이 고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한 윤희 언니께
먼저 일어나서 언니를 기다리다 곤히 주무셔서 깨워드리지 못하고 갑니다. 어제는 어리광만 부린 것 같아서 아침이 되니 부끄러웠어요. 비는 그쳤습니다. 언제든 무슨 대사건이 일어나든 아침의 햇볕에 당당히 견딜 수 있는 정서를 유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에 심심해서 언니의 스케치북들을 몰래 훔쳐 보았습니다. 영태 형이 무식하게 시건방을 떨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어나시면 해장을 하시도록 요 아래 내려가서 콩나물 사다가 멸치 넣고 맛있는 국을 얼큰하게 끓여 놓았습니다. 물론 끓이고나서 제가 먼저 한 그릇 실례를 했지요. 밥도 해놓았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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