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82)/글 황석영

  • 입력 1999년 7월 30일 18시 44분


아마… 이제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그를 당신 못지않게 좋아했던 듯싶어요. 당신이 저 안에서 벽을 바라보며 지켜 나가려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는 나도 조금 알아요. 당신은 오래 오래 침묵하고 있었지만 내 꿈 속에 어쩌다가 몇 년에 한 두 번씩은 나타나곤 했지요. 사는 일에 단순함이란 없어요. 당신의 독방 생활마저 당신 생각처럼 거대하고 복잡하지 않던가요. 우리는 세계적 변화의 가파른 언덕에 서있었답니다. 어떤 이는 초라하게 일상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거나 욕망에 휩쓸렸고 당신 말대로 그맘때 남한 자본주의는 이미 재생산 구조를 갖추었어요. 통제는 받겠지만 내버려두어도 자기 깜냥대로 굴러가게끔 되었어요. 우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놓고 교과서를 펼치며 입씨름 하다가 남들이 겪은 한 세기를 단 몇 년 동안에 거덜을 내버리고 말았답니다. 이것이 밖에서 진행된 나의 삶이었지요. 미안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연하잖아요? 우리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는데 모두들 무대를 떠나 퇴장해버린 거예요. 하여튼 나에게는 당신이 없는 동안에 가까운 사람이 생겨났어요.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그는 당신과 동일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오현우고 그는 또 다른 별개의 사람이었죠.

팔십 사 년 초여름이었을 거예요. 나는 정희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으로 찾아 갔어요. 그 무렵에 어찌된 일인지 우리 자매는 시간이 서로 엇갈려서 집에 들를 때에도 서로 전화는 가끔 하면서도 약속을 했다가는 서로 바쁜 일이 생겨나서 몇 달 동안을 못만나고 있었거든요.

내가 병원 구내의 복도 밖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려니까 가운 차림의 정희가 피곤한 얼굴로 나타났어요.

언니 오래 기다렸어?

응 조금. 바쁘면 그냥 가구.

아냐, 오늘 어차피 당직이야. 미리 말해 뒀어. 같이 저녁 먹자.

다행이구나.

잠깐만 기다려. 옷 갈아입고 나올 거니까.

정희와 나는 대학 구내를 천천히 걸어 나왔어요. 막 신록이 짙어지고 있었고 바람도 싱그러웠지요.

사실은… 언니에겐 좀 미안한데 말야. 내가 겹치기 출연을 하게 되어서 그래.

무슨 얘기?

언니 전화 오기 며칠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어. 누가 자리를 함께 해두 괜찮겠지?

머 괜찮겠지. 근데 누구야?

내 환자. 형 친구래.

나는 정희가 형이라고 부르는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그 즈음에 군의관으로 나간 선배를 말하는 것이었고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가 되었지만요. 어쨌든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만나게 되었어요. 정희는 그에 관해서 아무 얘기도 해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대학의 담을 빙 돌아서 호젓한 곳으로 갔는데 무슨 경양식 집이었을 거예요. 아마도 정희는 맥주라도 먹고 싶었겠지. 그 무렵에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정희는 다른 수련의들과 학교 근처에서 소주를 왕성하게 마셔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우리가 계단을 올라가 격자 유리가 달린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창가의 구석 자리에서 한 사내가 엉거주춤 하면서 일어나 보였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