渡美앞둔 고은, 새 시집 「머나먼 길」 선보여

  • 입력 1999년 1월 19일 19시 24분


시인 고은(66)이 길을 떠난다.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시를 강의하기 위해 하버드대와 버클리대 교수가 되어 20일 1년 일정으로 한국을 떠난다. 행장을 꾸미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는 왕성한 ‘시력(詩力)’을 발휘해 시집을 냈다. 떠남에 걸맞게 시집 제목도 ‘머나먼 길’(문학사상사)이다.

가장 한국적인 시인이 자본주의의 심장부 미국에서 서기 2000년을 맞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떠난다는 건 그 자체가 시 아닙니까…. 빈 손으로 돌아오진 않겠습니다. 사람이 어딜 다녀오면 계란 한줄이라도 들고 오는게 우리네 인정 아닌가요.” 고은의 일성(一聲)은 의외로 담담하다. 하지만 그의 신작시를 읽으면 이번 여정이 보인다.

‘머나먼 길’은 연어를 소재로, 떠나고 돌아옴을 노래한 한편의 장시다. 그러나 고은은 연어의 모천회귀(母川回歸)를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귀 이탈’을 노래한다. 몇해 전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북태평양산 연어들의 상당수가 모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 저 북시베리아 해역같은 데서 새로운 순례를 시작한다는 걸 알고나서, 그도 은밀하게 이탈을 꿈꾸어왔다.

‘새로운 때가 온다/고향과/조국과/뜻이 맞아 떨어진 당파로부터 떠나/무아(無我)/일체의 자아가/얼마나 어이 없는 거짓인가를/조용히 타이르는 것 같은/무아/음악의 뒤처럼/새로운 침묵의 음악이 꽃피는/무아’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존재이자마자/그것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존재가 아니라/행(行)!’(‘머나먼 길’중)

모든 것은 이행(移行)이다.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연어도 그렇고 이번 시집도, 그의 삶도 그렇다. 모두가 ‘머나먼 길’이다.

그래서 그는 떠난다. 좋든 싫든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새 1천년의 시작을 맞이하는 것도 의미가 있음직하다는 생각에서다. 우리가 변방으로 남아선 안되겠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초청해준 미국의 두 대학에 대한 화답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의 미국 일정은 빡빡하기 짝이 없다. 시차도 만만치 않을텐데 동부 보스턴에서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매주 한번씩 왔다갔다 하며 강의하고 연구 결과물 준비도 해야 한다. 국내 원고도 써야 한다. 강행군이다.그럼에도 “소년처럼 춤춰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청춘이다.

시인으로서의 사색도 게을리할 수 없다.

“한국에서 바라본 한국이 관념에 가까웠다면 외국에서 바라보는 조국은 아마 실경(實景)이 될 수도 있으니….”

회귀와 이탈을 아우르는,화엄(華嚴)과도 같은 장시를독자곁에바치고그는길을떠난다.

‘나는 꿈꾼다/…/소위 철학과 과학과 종교와/허울좋은 도덕 따위를 버린/알몸의 연어/나는 그 형용사 없는 세계를 꿈꾼다/내 살 속 가시에 찔리는 햇살의 아픔을 위하여’(‘머나먼 길’중)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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