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자의 등불」로 40년

  • 입력 1998년 10월 25일 19시 51분


70, 80년대 ‘도시산업선교회’란 이름으로 이땅에 노동운동의 싹을 틔워온 영등포산업선교회(위원장 인명진·印名鎭목사)가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산업선교회는 창립40주년을 맞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선교회관에서 30일 오후2시 ‘산업선교 40주년 정책토론회’를, 31일 오후3시부터는 ‘영등포산업선교회 40년사’ 출판기념회와 기념예배, 축하공연, 총동문과의 만남 행사를 갖는다.

84년 영등포산업선교회로 이름을 바꾼 도시산업선교회는 개발독재시절 ‘도산(都産)’이란 약칭으로 불리며 산업현장에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떨쳐온 선교단체. 재야와 노동 운동가들에겐 노동기본권과 인권의 버팀목으로, 그러나 공안기관과 사업주들 사이에선 “도산(都産)이 회사에 들어오면 도산(倒産)한다”는 악소문이 돌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노동기본권 획득에 주력했던 70년대, 노조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80년대에 비해 역할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도산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12개의 노동상담소를 운영중이며 회원은 2백여명.

도산의 노동선교는 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산업전도위원회가 생기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10여년간은 말 그대로 전도에만 주력하다 차츰 노동운동의 첨병으로 나서게된 경위를 한 관계자는 이렇게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늦은 저녁 선교 모임에 나온 노동자들에게 성경속의 노동관에 대해 한참 설명한뒤 질문 있느냐고 물었죠. 그러자 한 노동자가 졸린 눈을 비비며 쭈볏쭈볏 ‘기계에 손가락이 잘렸는데 어떻게하면 치료비를 탈수 있느냐’고 묻는거예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동문제가 날로 심각해지자 선교활동의 초점은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에 쏠렸다. 종교의 장벽을 떠나 비신자들도 참여했고 68년엔 이름을 도시산업선교회로 바꿨다.

노동의 ‘노’자만 꺼내도 빨갱이로 몰아부쳤던 70년대, 1백여개를 헤아렸던 도산의 소모임은 권익찾기에 나선 노동자들에겐 작은 등불이나 다름 없었다. 노조간부나 운동권대학생중 이곳의 ‘노동교회’(83년 ‘성문밖교회’로 개칭) 집회에 한번쯤 참석해보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10월유신 이후 공안기관은 도산에 대해 강경 대응했다. 걸핏하면 압수수색이 실시됐고 75년, 78년엔 인명진목사 등 지도부가 구속됐다. 특히 82년 콘트롤데이타사와 원풍모방 사건을 계기로 도산은 ‘기업의 적(敵)’ ‘빨갱이 집단’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교회내에서도 활동을 중지시키려는 안건이 총회에 상정되기도 했다. 도산 모임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한 노동자도 숱하다.

90년대 들어 산업선교회는 노동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 대신 노조간부들에 대한 교육, 노동자 경영참가 교육, 협동조합 운동 등에 주력해왔다.

그러다 IMF경제난이 터지자 정리해고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노동현장에 닥친 새로운 시련에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02―633―7972)

〈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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