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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3월 15일 20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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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아, 유리병에 든 종이학 연애할 때 김서방한테 선물한거니?”
“아니, 그이가 대학시절에 사귀던 여자한테서 받은거라던데.”
“….”
“액자 예쁘네, 어디서 났어?”
“언니도 알지, 왜 대학원다닐 때 사귀던 S전자 연구원. 그 사람이 생일선물로 준거야.”
2월말 이지연(29·K전문대 간호대 강사·서울 양천구 목동) 김성호씨(32·국회 비서관)의 신혼 집들이에 간 대학선배들은 경악했다. 결혼앨범 옆에는 신랑 신부의 ‘화려했던’ 이성편력이 자랑스레 담겨 있는 처녀 총각시절의 앨범. 집안 곳곳에는 결혼전 각자의 ‘과거’가 살아 있는 기념품들. “지금의 서로를 충분히 신뢰하기 때문에 과거를 폐기할 필요가 없었다”는 신혼부부의 설명에 선배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끄덕.
결혼전 이성관계 흔적은 결혼과 동시에 완전히 ‘인멸(湮滅)’해야 한다는게 40,50대 ‘중매세대’의 사고방식. 하지만 ‘과거는 용서해도 못생긴건 용서못한다’고 농담해온 신세대들, 이제 실제 결혼하면서도 각자의 과거 추억을 떳떳이 안고 가는 신랑 신부들이 늘고 있다.
3월말 결혼할 예정인 박민정(28·Y대 대학원 박사과정) 윤태호씨(31·H전자 반도체연구소대리)커플. 신접살림집에 각자 책상을 놓고 자물쇠가 달린 서랍에 예전의 편지 일기장 앨범 등을 고스란히 보관하기로 했다. “친정엄마는 반대했지만 그이와 상의한 끝에 서로 훔쳐보지 않기로 하고 추억의 물건들을 보관하기로 결정했다”는게 박씨의 설명.
결혼을 앞두고 예전에 사귀었던 이성에게서 받은 편지를 태우며 만감이 교차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기성세대들. 물론 편지태우기는 과거 인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정리였다. 하지만 “지금 당신과 결혼하는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와 결혼하려면 나의 ‘과거’까지 인정하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신세대들은 그같은 정리절차마저도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과거’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혼전순결 문제에 대한 생각도 성개방풍조에 맞물려 변하고 있다.
첫날밤 신부의 순결에 대한 남성들의 강박관념을 희화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인 이른바 ‘반딧불족.’ 제주 서귀포시 S호텔의 마케팅담당대리 심미영씨는 “오전 1∼2시에 호텔앞 중문 해변가에 나와 혼자 줄담배를 피우는 ‘반딧불족’이 90년대초까지 매일밤 수십명에 달했지만 1∼2년 전부턴 자취를 감췄다”고 전한다. 또 지난 2,3년 사이 급증하고 있는 초혼남성 재혼여성의 결혼도 신세대의 변화된 결혼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결혼문제 전문가들은 이같은 신세대의 결혼풍속도에 대해 “‘과거보다는 앞날을 중시한다’는 생각은 옳지만 과연 결혼하면서 과거를 통째로 드러내는게 현명한 일인가에 대해선 염려가 된다”고 말한다.
여성민우회부설 가족과성상담소 양해경소장. “우리나라 남성은 신세대라고 해서 ‘순결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아내의 혼전성관계나 낙태사실을 알고도 결혼했던 젊은 남편중 나중에 ‘아내의 과거가 눈에 밟혀 견딜 수 없다’며 몰래 상담해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나중에 여성만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인 것이다.
소설가 겸 카운슬러인 우애령씨.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과거까지 이해받고자 하는 욕심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부부간에도 ‘안전거리’는 필요하다. 결혼생활이라는 먼길을 떠나면서 동반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면서까지 ‘고백성사’를 하거나 자신의 추억을 고집할 필요가 있는지 찬찬히 생각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