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러시아 연해주·사할린

  • 입력 1997년 12월 31일 18시 12분


《정부수립 50주년이 되는 1998년 새해 아침, 세계 1백49개국 5백20만여명의 한민족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동아일보는 시련속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는 1998년 새해를 맞아 세계 1백49개국으로 뻗어 나간 한민족, 그중에서도 구한말 역경속에 러시아 연해주, 중국 간도, 일본열도,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 떠나간 초기 해외 이주민들의 역정(歷程)과 오늘을 반추해 보는 「한민족 유민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러시아고려인협회장 이 올레그씨(52)는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모스크바 로마롭소바 대학원에서 역사와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했으며 우크라이나 하리코브 농대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를 그만두고 모스크바에서 1937년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피해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는 고려인협회장 일이 강제이주된 다음에도 한인 학교와 신문을 내고자 힘쏟았던 조부와 외조부의 뜻을 잇는 것이라고 생각, 자신의 일에 만족해한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1906년 함경도 길주에서 태어난 김형국씨. 길주에서 대를 이어 살던 그의 집안은 금세기초 거듭된 가뭄과 흉작으로 기근에 시달리다 못해 두만강을 넘었다. 당시 함경도에는 조선조 말부터 수십종의 세금과 학정에 시달리다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건너가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 이주한 김형국씨 집안은 러시아인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뼈가 녹아내리는 힘든 고생 끝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집안은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 한숨을 돌리자 김씨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김씨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 교수가 됐다. 조선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이렇게 두만강 건너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기아로부터의 탈출구를 향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러시아는 1860년 청(淸)과 베이징조약을 맺고 연해주를 병합한 후 러시아인들을 이주시키면서 월경하는 조선인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이주를 장려하기 까지 했다. 1863년 조선인 농가 13호가 국경 가까운 포시예트에 처음 정착한 이래 한일합방 이전까지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5만여명에 달한다. 전직 소련 정보기관 간부였던 황 아나톨리씨(57).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다 정보기관에 특채됐다. 그의 가족은 한일합방 이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는 “할아버지는 회령 출신의 독립군으로 1929년 일본군과의 대접전을 앞두고 가족을 포시예트로 옮긴 후 전사했다”고 말했다.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이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을 때 황씨의 아버지는 15세. 황씨는 “할머니는 손자인 나에게는 항일 독립군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했다. 한일합방 이후 1914년까지 6만여명의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 시기 이주민의 상당수는 의병이었다. 이들은 13도의군(道義軍) 성명회(聲明會) 권업회(勸業會) 등을 결성,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1923년 연해주에는 10만7천여명의 한인이 있었다. 이 가운데 7만2천명 가량이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이같은 한인들의 낮은 동화율이 1937년 한인 강제이주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에 이어 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인들을 첩자로 이용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이것이 강제이주의 구실이 됐다. 강제이주는 1천여명의 한인 지식인들을 처형시키는 총성으로 시작됐다. 9월초 갑자기 동포들의 여행이 금지됐으며 그달 11일 밤부터 대이주가 강행됐다. 연해주의 18만 한인들은 그로부터 두 달 동안 곡식 씨앗과 옷가지 책꾸러미들만을 보따리에 싸든 채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천신만고 끝에 일군 삶의 터전에서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 사는 퇴역 철도기관사 손군현씨(68)는 제주 출신. 징용가는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그는 “징용 1세대 중에는 한소 수교 전 언젠가 있을 귀향을 기다리며 무국적으로 지내다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진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일이 한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한(恨)으로 남아 있다. 연해주의 한인들이 대부분 스스로 그곳을 찾아갔다면 사할린의 한인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정착해야 했던 경우. 일제는 1939년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한반도에서도 한인들을 강제징용, 그들의 점령하에 있던 사할린으로 끌고가 광원이나 노무원으로 혹사시켰다. 징용자들은 관부(關釜)연락선으로 현해탄을 건너고 청함(靑函)연락선으로 북해도에 도착, 다시 치박(稚泊)연락선으로 물길 3천리를 건너 사할린에 도착한 다음 혹독한 노예노동에 투입됐다. 일본은 패전후 사할린의 일본인은 본국으로 귀환시키면서도 일본국적을 부여했던 우리 노무자들에 대해서는 “일본국적을 상실한다”고 선언, 송환의무를 저버렸다. 이 올레그회장은 “한인 동포들의 근면함은 러시아 전역에 정평이 나있다”며 “한국의 ‘세계화’는 이역만리의 동포에 대한 관심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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