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들여다보기]김종서/생태중시하는 「환경신학」

  • 입력 1997년 10월 28일 08시 16분


보름달 속에 계수나무와 토끼는 더이상 없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의 시작은 자연의 신비를 철저히 벗겨낸 것이다. 나무는 재목, 강은 수력발전 자원일 뿐이다. 자연은 문명의 반명제(反命題)로서 수동적이고 심지어 완고한 여성으로 보인다. 반면 인간은 공격적이고 호기심 많은 폭력적 남성이 되었다. 오늘날 환경문제는 무엇보다도 이같은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재난의 극복이라는 점에 일차적 관심이 모아졌다. 공기 물 땅의 오염이 우선 질병과 관련하여 쟁점화하였다. 점차 자신의 복지적 관심을 넘어서 후세들에 대한 의무를 고려하게 되었다. ▼ 과학이 자연파괴 대체로 물고기나 재목 같은 재생가능한 자원에 대해서는 「이자만 쓰고 원금 안 건드리기」식의 양보가 미덕이 되었다. 반면 화석연료나 광물질 같은 재생불가능한 자원에 대해서는 적어도 기술에 의해 연장될 수 있는 것보다는 더 빨리 파괴되거나 없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폭넓은 환경윤리가 인간적 실용주의를 넘어 환경 전체에 대한 관심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오늘날 생태윤리이론의 원조격인 레오폴드는 섣불리 「잡초」「해충」이니 하는 식으로 갈라서 제거하는 것은 결국 땅을 죽일 뿐이라 한다. 황소개구리와 말벌떼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산처럼 생각하라」고 말했었다. 얼마전 미국에서는 한 자연보호단체가 법정에서 산에 있는 돌은 제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 현대의 생태위기는 단순한 과학 기술적 대처보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더 밑바닥으로부터의 혁명」을 요청한다. 기왓장이나 지푸라기, 오줌에까지 불성(佛性)이 있으며 자연이 대우주라면 인간은 소우주로서 대 소우주는 일치한다는 동양종교의 폭넓은 자연관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번창하고 땅을 채우고 정복하라」는 성서적 자연관때문에기독교가생태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 프란체스코는 땅을 자매로, 새를 형제로 여기며 자연에의 깊은 사랑과 합일을 실천했었다. 최근 신학계에는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땅」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땅을 오염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고난이요, 십자가에 못박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환경운동은 이같은 과학적 실용적 안목이나 전통종교적 통찰력을 넘어서 자연 생태계 그 자체를 하나의 궁극적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즉 생태계 자체에 대한 신비화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 지구는 하나의 생명 미국의 대기생물학자 러브록은 지구가 스스로를 유지해나가는 유기체라고 가정하여 고대 그리스 지모(地母)신의 이름인 가이아로 부르며 그 안정성을 신화화해냈다. 그린피스의 창시자 헌터는 이 시대의 십자군으로 불린다. 그린피스가 비폭력적인데 비해 폭력까지도 불사하는 새로운 생태행동주의단체가 바로 미국인 환경운동가 포먼에 의해 창설된 「지구우선」이다. 그는 성스러운 어머니, 지구를 강간하려는 판에 비폭력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한다. 폭력은 자연을 모시는 극단적 제의의 일종이다. 아무튼 이들 모두에게 자연 생태계는 믿음과 실천이 철저히 요구되는 절대적 신비인 셈이다. 사실상 환경문제 해결에 과학적 실용적 패러다임은 늘 근본적인 한계가 지적된다. 반면 전통종교적 패러다임은 지구의 물리적 운명에 너무 무관심해왔다. 그 사이에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현대 「환경교」운동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진 땅에 왜 계수나무와 토끼를 다시 그리고 있는가. 김종서(서울대·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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