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계,세계연극제 통해 「문화충격」체험

  • 입력 1997년 9월 23일 20시 12분


개막시간이 다 될 때까지 사람들은 공연장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공연장 문이 열리고도 관객들은 창고에 짐 쟁이듯이 어디론가 꾸역꾸역 들어가 마냥 서있어야 했다. 『뭐야, 뭐야』『아이구다리아파』 한숨과 투덜거림이 터져나올 무렵, 관객사이를 헤치고 배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선 자리가 무대임을 깨달은 관객들. 그 사이를 한바퀴 돈 배우들은 객석으로 올라가 판을 벌이기 시작했다.한 관객이 속삭였다. 『우리가 트로이의 백성이 된 것 같아…』 서울 드라마센터에서 지난 21일 폐막된 「트로이의 여인들」의 도입부. 「세계연극제 97서울/경기」에 초청된 미국 라마마극단과 우리나라 동랑연극앙상블의 합작연극이다. 이 작품이 무대와 객석을 뒤바꾸고 관객의 자리부터 의식과 문화를 보는 시각까지 흔들어 놓은 것처럼, 이제 중반을 넘어선 「세계연극제 97서울/경기」가 우리 연극계에 격렬한 「문화 충격」을 주고 있다. 세계연극제가 던진 가장 큰 「문화 핵폭탄」은 연극이라는 예술장르의 폭발적 힘과 에너지의 확인이다. 몇년째 관객기근에 허덕이면서 네댓명의 손님앞에서도 감지덕지 공연을 해온 국내 연극계는 세계연극제에서 자리가 없어 돌아서는 관객(프랑스 「카포니노」, 이탈리아 「셰헤라자데」 등)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계마당극제가 열리고 있는 과천에는 당초 예상보다 2, 3배 많은 관객이 몰려 개막 2주만인20일11만6천명을돌파했다. 한 연극인은 『지금까지 연극계 불황을 관객과 TV탓으로만 돌렸다. 이번 연극제에서 완성도 높은 외국공연을 보며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작품을 만들었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세계연극제는 또 「몸의 연극」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단순히 체모까지 드러낸 누드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한미 「트로이의 여인들」, 베네수엘라 「아무도 대령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등) 배우의 「몸」에서 뿜어내는 철철 넘치는 기와 원시적 에너지로 무대와 객석을 가득 메웠다. 그리스의 「안티고네」, 일본의 「도쿄 게토」, 우리나라의 「리어왕」 「오우제」도 이에 포함된다. 이때문에 설령 몸을 드러냈다고 해서 이들 연극이 외설이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극평론가 김방옥씨(청주대교수)는 『스펙터클은 영화가 가져가고 「가벼움」은 TV가 좌우하는 오늘같은 영상시대에서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사람의 몸뿐』이라며 세계연극제는 이같은 세계 연극의 흐름을 우리 관객에게 잘 전달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과학발전과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살냄새를 낼 수 있는 장르는 연극뿐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도 세계연극제가 열어준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문화교류가 거의 없었던 남미 동구권 연극을 감상하고,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든 작품을 보는 등 문화의 진정한 국제화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일 개막된 세계연극제는 10월15일까지 계속된다. 02―766―0766 〈김순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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