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경제위기 극복 위해 중동건설사업 진출 주도

동아일보 입력 2013-07-30 03:00수정 2013-07-3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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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9>중동 특수
1976년 이란의 가친 중공업단지 안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있는 우리 기술자들. 동아일보DB
1975년부터 한국경제는 미증유의 호황을 맛보게 된다. 1973∼1974년에 기름값이 4배로 오르는 1차 오일쇼크를 경험하면서 한국 경제의 허약함에 너나없이 절망하는 목소리가 팽배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달러 박스’가 등장하니 바로 ‘중동 특수’였다.

1960년대 서독으로 진출한 광부 간호사들이 순수하게 노동력만 갖고 진출했다면 70년대 중동 진출은 인력과 기업(건설업 용역업)이 동반된 노동력 수출이라는 점에서 달랐다. 비록 외국회사의 하청이긴 했지만 한국 건설업체가 주 계약자가 되어 공사를 따낸 것은 큰 발전이었다.

중동 진출 첫해인 1974년 해외 수주액은 2억6000만 달러였으나 이듬해 1975년에는 226.3%나 늘어난 8억5000만 달러나 됐다. 75년 해외진출 건설업체 수는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아건설 등 32개사에 달했다.

해외진출 기능사에게는 군복무 면제, 기능사 자격증 부여, 최고 연봉 등의 특전이 주어졌다. 한국 근로자들은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해외 업체 및 중동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 업체는 공기(工期)를 맞추는 데 만족하지 않고 완공 일정을 단축해 신뢰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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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인력 수출은 오일쇼크를 타개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벌인 정책이었다. 이를 강력하게 추진한 사람은 중화학공업화 등 중요한 경제 정책의 브레인 역할을 한 오원철 경제수석이었다. 그는 회고록 ‘한국형 경제건설’의 ‘중동 진출’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일쇼크로 1974년 국제수지적자폭이 17억1390만 달러였다. 적자를 어떤 식으로든 메우지 못하면 나라가 부도날 판이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찾아오는 외국 손님들마다 붙잡고 “석유파동 대책을 어떻게 세우고 있느냐” 물으니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원유값이 올라 중동 산유국에 달러가 흘러넘치고 있다. 그 나라들이 지금 이 돈을 갖고 경제 건설을 한다고 한다. 여러 나라가 뛰어들고 있지만 특히 일본은 6·25전쟁 때나 월남전 때 돈을 벌어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중동에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옳다,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74년 1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동 진출 전략을 보고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비교우위가 있습니다. 우선 중동은 고온이고 사막지대로 작업환경이 지구상에서 가장 나쁩니다. 그러나 한국은 우수한 인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쁜 조건은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둘째, 선진국 기술자들은 아무리 돈을 준다 해도 갈 사람이 없지만 우리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경제는 어린 여자 근로자가 수출을 해서 지탱해왔지만 이번에는 남자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남자 기능공 인건비는 선진국보다 훨씬 싸고 기술 수준은 후진국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셋째, 우리 건설업체는 이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공기 단축 기법을 익혔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보고를 다 들은 박 대통령이 “오 수석, 소신이 있어 좋구먼” 하고 웃자 그는 내친 김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각하! 중동에 진출하자면 뒷거래가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또 이 방면에는 소질이 있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이 파안대소를 했다.

박 대통령은 74년 4월 25일 중동에 첫 번째 각료급 사절단을 파견한 데 이어 9월 18일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며 중동건설 진출 진흥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어 건설부와 중앙정보부에도 “중동 진출 업체들을 철저히 감독해서 부실공사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한국 업자끼리 부당한 덤핑 입찰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중동건설 수주액은 1975년 7억5000만 달러에서 1980년 82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1975∼1979년의 GNP 증가율 7.2%와 수출증가율 25.0%를 훨씬 뛰어넘는 연평균 76.1%의 성장률이었다.

오일쇼크로 신음하던 한국 경제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1977년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하면서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은 중동 건설 붐에 따른 달러 수입에 힘입은 바 컸다. 실제로 76년과 77년 사이에 국내 투자율은 15%에서 27%로, 경제성장률은 각각 14%, 13%를 기록했다. 냉장고 판매증가율은 89%에서 148%로, 흑백텔레비전은 31%에서 46%로, 자동차는 65%에서 111%로 늘어났다.

중동 특수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이 바로 현대다.

현대는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다. 1975년 중동 진출 이후 1979년까지 현대가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64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회사 총 매출 수익 가운데 60%나 됐다. 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경쟁사가 써낸 15억2000만 달러보다 6억 달러나 낮은 액수로 공사를 따내고도 훌륭한 성과를 냈다.

이런 비약적 성장에 힘입어 현대는 1976년 미 경제전문지 ‘포천’이 뽑은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한다. 79년엔 78위로까지 등재된다.

하지만 75년부터 시작된 대호황기는 짧았다. 곧 인플레에 신음하기 시작한 한국경제는 중동건설경기의 급속한 냉각으로 건축업체 중에 부실기업이 속출하기 시작하고 79년 1차때보다 더 큰 ‘2차 오일쇼크’까지 닥쳐 휘청인다. ‘대통령의 경제학’을 쓴 이장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돈이 시중에 흘러넘치고 여기저기서 새 공장을 짓고 고층 빌딩이 올라갔다. 당연히 물가가 올랐다. 정부가 발표한 1977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0%였으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멘트 공장도 가격은 포대에 810원, 대리점 고시가격은 900원이었으나 시장에서는 1900∼2000원을 주고도 사기가 어려워 줄을 서야 했다… 호황의 끝이 코앞인 줄도 모르고 기업은 과잉 투자에 열을 올렸고 79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수출은 급속히 추락했다. 국내 기업들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한 부동산 투기 열풍에 국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했고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조세저항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돌아갔다. 정치는 차치하고 경제 쪽에서도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오면서 박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 위기는 쓰나미가 되어 박정희 정권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박정희#경제위기#노동력#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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