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가 가까운 우리 집은 늘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로 오후 한 때를 맞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매서운 바람이 아이들의 소리를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바야흐로 겨울이 찾아 온 것이다.
겨울은 바깥보다 집 안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 아이들에게는 무척 길고 지루할테지만, 대신에 참고 견디어 내는 힘을 기르게 한다. 동식물들도 그렇지 않을까? 땅 속에서 혹은 굴 속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내노라면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러 낼 거라고, 개울물 소리가 정겹게 들릴 거라고 믿고 있지 않을까?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자연’은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라고 스스로 깨닫는 것은 아닐까?
주변의 작은 생물에게도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권정생 님의 글과, 연필화로 우리 나라 겨울 산의 분위기를 마음껏 표현한 송진헌 님의 그림이 어우러진 책이다.
완만한 기울기의 산 봉우리에서 내려다 보면 고작 집 몇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이 보이고, 마을 뒤 야트막한 산을 둘러싸고 바닥이 보일 듯 말 듯한 개울이 있다. 그 산 속 곳곳에서는 동물 가족들이 말없이 겨울을 보내고 있겠지.
너구리네 가족도 굴 하나를 차지하고 겨울잠을 자는데 갑자기 잠을 깬 막내 너구리의 울음 소리 때문에 가족이 모두 잠에서 깨어버렸다. 엄마 너구리가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로 다시 잠을 청하려 하지만, 한번 깬 잠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쉬이 들지 않는다.
결국 아기너구리 세 남매는 조심조심 굴 들머리까지 나와 바깥 세상을 보는데, 차갑고 새하얀 것이 거센 바람과 함께 아기너구리들이 있는 곳까지 들이닥친다. 아직 눈이 뭔지 모르는 아기너구리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좀 더 먼 곳을 바라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잎을 뽐내던 단풍나무, 은사시나무, 산사나무도 모두들 잎을 떨군 채 조용히 기다리고 서 있다.
이제서야 겨울엔 잠을 자야한다는 걸 깨달은 아기너구리들. 봄 맞을 꿈을 꾸면서 잠이 든다. 어느 새 개울물이 불어나고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 꽃을 피우며 봄이 찾아왔다! 봄은 온통 연둣빛으로 아기 너구리네 가족을 반갑게 맞이 한다.
연필로 그린 회색 빛 겨울 산은 텅 빈 놀이터를 보는 것 만큼이나 쓸쓸하면서도 우리 나라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겨움과 포근함을 준다.
오혜경(주부·서울 강북구 미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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