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은 결국 사라진다…그래서 더 강하게 말할 수 있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20일 16시 46분


올해 3월 홍콩 센트럴 하버프론트에서 열린 현대미술 아트페어 ‘2026 홍콩 아트센트럴(Art Central Hon Kong)’에서 색다른 전시로 눈길을 끈 작품이 있다.

‘2026 홍콩 아트센트럴’ 전시장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얼음 작품 ‘Frozenism’ 앞에 서 있는 성서 작가.
‘2026 홍콩 아트센트럴’ 전시장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얼음 작품 ‘Frozenism’ 앞에 서 있는 성서 작가.


벽에 붙은 얼음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녹아내렸고, 얼음 속에 한지 종이 위에 프린트 돼 있던 자연의 이미지들은 물에 녹아내리고, 찢어지고 스며들었다. 이 것은 정지된 회화도, 완성된 조각도 아니었다.살아있는 동안에만 작품이었고, 사라지는 과정까지도 작품이었다.

그 장면은 묘하게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불편했다. 아름다운 풍경이 녹아내리는 모습은 곧 지구의 풍경이 사라지는 속도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기후위기, 빙하의 소멸, 수면 상승, 인간이 초래한 환경 파괴를 이야기한다. 그가 붙인 이름은 ‘프로즌이즘(Frozenism)’. 얼음과 시간, 기억과 감정,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한 자신만의 예술 언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성서 작가에게 왜 하필 얼음을 예술 언어로 선택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그를 사로잡은 것은 포스터였다. 불조심 포스터, 자연 보호 포스터,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가 담긴 그림, 우리 산을 푸르게 만드는 나무 심기를 장려하는 그림들…. 당시 학생들에게 포스터는 숙제였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사회를 향해 말을 거는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열 살 때부터 미술을 했어요. 그때 처음 빠져든 게 사회 포스터였어요. 불조심, 자연을 지켜주세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메시지를 담는 그림을 그리다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죠. 어느 날에는 밤새 그린 포스터 위로 아침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어요. 뭔가를 창조했다는 뿌듯함이었죠.“



당시의 기억은 성서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의 원형이 이미 들어 있었다. 그에게 미술은 예쁜 것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과 마주하는 행위였던 셈이다.


그는 홍익대에서 광고와 디지털 미디어를 공부하고, 시카고 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사진, 영상, 설치, 조각을 넘나드는 다매체적 예술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얼음이라는 재료를 붙잡게 된 건 조금 더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다.

출발은 냉동실의 얼음 큐브였다. 얼음 안에 ‘글자’와 ‘이미지’를 넣고 얼린 뒤, 그것이 녹으며 사라지는 과정을 작업으로 옮겼다.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오르고, 인간이 만든 도시가 그 위기를 외면할 수 없게 된 지금, 얼음은 가장 직접적인 언어가 된다. 그는 “지구의 눈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지구가 녹고 있다는 사실을 차갑고도 서정적으로 보여주는 매체, 그것이 그의 얼음이다.

그래서 성서 작가의 작품은 얼음조각이라기보다 ‘시간의 조각’에 가깝다. 그는 완성된 오브제를 만드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은 녹아야 하고, 변해야 하며,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얼음조각 크기가 작은 작품은 3시간 안에 녹기도 하고, 큰 얼음은 하루가 지나야 형태를 잃는다. 그의 전시는 한 번 걸어두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냉동고를 이용해 매일 다시 얼리고, 다시 설치해야 하는 ‘라이브 아트’다.


그는 이 점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다. 작품이란 이미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은 결과물을 감상하는 대신, 자연이 붕괴하는 시간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각인된다. 어떤 이는 슬픔을, 어떤 이는 위기감을, 어떤 이는 사라짐의 아름다움을 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프로즌이즘(Frozenism)’이라고 부른다. 처음 작품 제목은 단순히 ‘Frozen(프로즌)’이었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나온 뒤 그 단어는 대중문화의 이미지에 강하게 덮여버렸다. 그래서 그는 ‘-ism’을 붙여 하나의 개념, 하나의 사조, 하나의 독자적 방법론으로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프로즌이즘은 단순히 얼린다는 뜻이 아니다. 얼음 속에 이미지를 가두고, 그 이미지가 시간이 흐르며 변형되고, 관객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내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성서 작가는 최근 논문에서 이를 ‘시간과 기억, 감정을 설계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변화하는 이미지, 완결된 조형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조형. 그는 얼음을 통해 사진의 개념마저 다시 쓰고 있다.

그의 작업이 환경 문제와 맞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구온난화, 빙하 소멸, 수면 상승은 통계와 그래프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몸으로 체감되지는 않는다. 성서 작가는 그 간극을 예술로 메운다. 얼음이 녹는 속도를 눈앞에서 보는 경험은 기사 한 줄보다, 보고서 한 장보다 훨씬 직접적이다.

“뉴욕은 해수면 상승에 대비해 1조7000억원을 들여 맨하튼 지역에 높이 5m의 방파제를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뉴욕이 베네치아처럼 변할 수도 있어 잠길 때를 고려해 건물마다 1.5층을 비우는 규정을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부산도 해수면 상승에 대비해 항구나 해변 방파제 보강공사를 하고 있어요. 해수면 상승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10년도 안남았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지요.”



그가 만드는 이미지는 풍경 자체를 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풍경이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시와 자연을 한 작품 안에 겹쳐 올리는 이유도, 파괴가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뉴욕, 아이다호, 도시와 빙하, 물과 건축은 그의 얼음 안에서 한 지층으로 포개진다.

그의 작업은 시적이지만 감상적이지 않다. 차갑지만 무심하지도 않다.

얼음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늘 경고와 함께 온다. 그래서 프로즌이즘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태도, 눈앞의 변화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예술이 여전히 사회적 메시지를 품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그의 ‘프로즌이즘’ 작품은 구입은 가능한 것일까.

“ 실제로 얼음은 보관이 어렵고, 판매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레진 조각, 사진, 영상 같은 다른 매체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어요. 그러나 관객들이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순간은 역시 ‘얼음이 사라져가는 장면’입니다. 완성된 오브제보다 소멸의 순간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요. 예술은 시장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팔리는 작품, 오래 보존되는 작품, 수집 가능한 작품만이 예술의 전부일 수는 없죠.”

성서 작가의 얼음 작품은 늘 녹아 사라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라짐이야말로 더 오래 남는다. 전시가 끝난 후 질문은 시작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 녹아내리는 시대를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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