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레바논의 휴전 소식이 전해지자 피란민들이 고향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며 V자 포즈를 한 채 환호하고 있다.
카스미예=신화 뉴시스
홍진환 사진부 차장 지난달 17일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휴전 소식이 전해지자,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남부 국경 지역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이불과 매트리스 등 생활용품을 가득 실은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취재진의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 V 포즈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중동 지역에서 이 포즈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동작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실 V자 포즈의 기원에 관한 공인된 역사 사료는 없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했던 1941년 대중매체를 통해 처음 언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벨기에 출신 정치인 빅토르 드 라벨레예가 영국 BBC 라디오 방송에서 프랑스어로 ‘Victorie’(승리)와 네덜란드어 ‘Vrijheid’(자유)의 앞 글자를 따 연합국의 단결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쓰자고 제안한 것이 시초였다. 이를 계기로 BBC는 모든 프로그램의 마무리 인사로 V를 사용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역시 공식 석상에서 이를 자주 활용하면서 V는 유럽 전역의 유행을 넘어 연합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호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V 사인는 미국으로 건너가 권력의 역사와 궤를 함께했다. 해리 트루먼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선거 승리를 기념하며 이 손짓을 즐겨 사용했다. 반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낙마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용 헬기 머린원에 마지막으로 탑승하면서 두 팔을 들어 V자를 만들어 보여준 모습은 불명예 퇴진의 순간을 스스로 달래려 한 서글픈 장면으로 꼽힌다.
닉슨의 퇴임 무렵, V 사인은 정치 지도자들의 손끝을 떠나 ‘거리의 언어’로 변모했다. 대학생들과 시위대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데 이 손짓을 적극 활용했다. 히피 문화와 록 음악이 시대정신을 이끌던 ‘우드스톡 시대’를 거치며 V 사인은 ‘반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 저항의 상징은 곧 중동으로 옮겨갔다. 1969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스라엘과의 투쟁을 강조하며 치켜든 V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후 이 제스처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반군 등 무장 단체의 상징적 표식으로 굳어졌다.
이란 역시 1979년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독재 체제에 저항하고 혁명을 완수하는 ‘승리의 상징’으로 이 손 모양을 폭넓게 사용했다. 공교롭게도 2009년 대선 부정선거 의혹에 맞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이란 녹색운동’ 당시에도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알리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의 뜻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 포즈가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데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1968년 일본 야구 만화 ‘거인의 별’에서 V 사인이 등장한 데 이어, 일본의 유명 밴드 ‘스파이더스’의 보컬 이노우에가 코니카 카메라 광고 촬영 도중 즉흥적으로 선보인 V자 포즈가 유행의 불씨를 지폈다. 이후 1980년대 카메라 보급이 대중화되고 귀여움을 내세운 ‘가와이’ 문화의 인기가 맞물리면서, V 포즈는 ‘평화와 친근함’을 상징하는 국민 포즈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한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력 속에 중국과 홍콩, 대만은 물론이고 한국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젊은층의 대표적인 사진 포즈로 정착했다.
한편 V자 손짓은 문화권에 따라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손등이 바깥으로 향한 V자는 영국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에선 가운뎃손가락을 세운 것과 비슷한 모욕적 제스처로 여겨진다. 1992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다가 농민 시위대를 향해 친근함의 표시로 손등이 보이는 V자 제스처를 취했다가 ‘최악의 외교적 결례’라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두 손가락이 만든 V 표시는 단순한 신체 동작에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는 격동의 시대정신과 묵직한 역사적 맥락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소소한 일상을 친근하게 기록하려는 동아시아 젊은이들의 가벼운 포즈와, 잔혹한 전쟁의 포화를 견뎌내고 고향 땅을 밟는 레바논 피란민들의 손짓은 겉모습만 같을 뿐, 그 안에 담긴 삶의 농도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고향을 향해 달리는 차량 행렬 속 레바논인들의 손끝에 담긴 본질은 명확해 보인다. 그것은 가혹한 전쟁의 현실을 온몸으로 견뎌낸 인간이 세상에 던지는, 가장 절박하고도 위대한 ‘평화와 생존’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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