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사회주의 승리’ 포기?…北헌법에서 뺐다[주성하의 ‘北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11일 12시 00분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지난달 23일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에 참석한 김정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지난달 23일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에 참석한 김정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일까요, 아닐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과거에도 실질적으론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아닙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는 누가 빼앗은 것도, 3자가 부인한 것도 아닙니다. 저들 스스로가 이제부터 북한은 더 이상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북한은 지난달 23일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를 마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으로’ 개칭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북한은 헌법에서 왜 사회주의란 단어를 빼버렸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회주의란 말로는 더 이상 현재의 북한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죠. 새로 제정된 개정 헌법 조항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2019년 8월 수정 보충된 헌법 기준으로 봐도 최근 몇 년 동안 결정된 북한의 정책들은 사회주의헌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북한이 법 따로 현실 따로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가다 보면 헌법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주의헌법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빠르게 제거해버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김정은입니다.

2019년 개정된 북한 사회주의헌법 조항은 모두 172조로 구성됐는데, 이중 국가기구의 임무, 권한, 수도, 국장, 국기 등을 규정한 조항을 빼면, 주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조항은 86개뿐입니다.

김정은은 헌법에서 사회주의를 어떻게 도려냈을까요. 사례는 많지만, 86개 조항 중 중요한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2019년 개정된 북한 헌법. 사회주의란 명패를 단 마지막 헌법이다. 동아일보 DB
2019년 개정된 북한 헌법. 사회주의란 명패를 단 마지막 헌법이다. 동아일보 DB


● 헌법에 위배되는 김정은의 정책
북한 헌법의 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북한은 헌법 1조에 명시된 사회주의란 단어를 헌법 명칭에서 빼버렸습니다.

9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을 힘 있게 벌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김정은은 2023년 12월 3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이자 ‘전쟁 중인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며 민족 및 통일 개념을 폐기했습니다.

한국 언론들은 지난달 최고인민회의 직후 북한이 헌법에 두 개 국가 조항을 신설해 넣었는지, 아닌지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해당 조항이 헌법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이 사회주의를 헌법에서 빼버렸다는 점입니다.

조국 통일 조항 못지않게, 앞에 명시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도 유명무실한 조항이 됐습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작금의 김정은 정책은 사회주의와 반대로 가기 때문입니다.

23조는 농촌에 대한 규정인데, ‘협동단체에 들어있는 전체 성원들의 자원적 의사에 따라 협동단체 소유를 점차 전인민적소유로 전환시킨다’고돼 있습니다.

이는 김정은이 2022년 제시한 ‘새 시대 농촌혁명강령’과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새 시대 농촌혁명강령은 약 20명으로 구성됐던 협동농장의 경작 단위를 3~5명 수준으로 세분화하고, 생산 자율성 및 인센티브 확대해 중국식 포전 담당제와 유사한 방향으로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5조는 ‘세금이 없어진 우리나라에서 늘어나는 사회의 물질적 부는 전적으로 근로자들의 복리 증진에 돌려진다. 국가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먹고 입고 쓰고 살 수 있는 온갖 조건을 마련하여 준다’고돼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사용료라는 이름으로 전기세와 물세, 자릿세 등 온갖 세금을 징수하고 있고 배급과 월급도 유명무실해진 지 오랩니다.

28조는 ‘국가는 협동농장의 생산시설과 농촌문화주택을 국가 부담으로 건설하여 준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북한 농촌들에서 최근 건설되는 주택들은 모두 현지 주민의 부담으로 건설됩니다. 30조 ‘근로자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이다’라는 조항도 의미 없어진 지 오래된 사문화된 조항입니다.

지난해 11월 평양 외곽 강동군병원 준공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김정은. 강동군병원의 치료비는 북한 전국 치료비의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신문 뉴스1
지난해 11월 평양 외곽 강동군병원 준공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김정은. 강동군병원의 치료비는 북한 전국 치료비의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신문 뉴스1


● 사회주의의 핵심 논거 상실
위의 조항들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최근 김정은이 헌법에 명시된 사회주의의 핵심 조항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정책들을 고의로 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에게 “자본주의 제도와 비교해 볼 때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100% 확률로 “우리 사회주의 제도에서는 무상치료, 무료교육을 받습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반세기 넘게 무상치료, 무료교육을 사회주의의 핵심 장점처럼 선전해 왔습니다. 이미 30년 전부터 무상치료는 유명무실한 제도였지만, 적어도 최근까지 선전은 그렇게 해왔습니다.

또 이는 북한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헌법 47조는 ‘국가는 모든 학생들을 무료로 공부시키며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준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56조는 ‘국가는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공고 발전시키며 의사담당구역제와 예방의학 제도를 강화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며 근로자들의 건강을 증진시킨다’고돼 있습니다.

72조에도 ‘공민은 무상으로 치료받을 권리를 가지며 나이 많거나 병 또는 불구로 노동 능력을 잃은 사람, 돌볼 사람이 없는 늙은이와 어린이는 물질적 방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무상치료제, 계속 늘어나는 병원, 요양소를 비롯한 의료시설, 국가사회보험과 사회보장제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적시됐습니다.

앞서 헌법에 적시된 무상치료나 무료교육, 사회보장제 등은 모두 국가가 부담해야 할 의무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은 최근 그 의무를 내팽개쳤습니다.

김정은이 최근 밀고 나가고 있는 ‘보건 혁명’은 치료비 도입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모든 병원에서 현재 접수비, 진단비, 치료비, 약값, 처방비, 입원비 등의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있습니다. 병원 비용은 일반 주민은 치료받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고액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이 2023년 12월 21일 제정한 ‘교육후원법’은 기관·기업소·단체와 공민이 교육 발전을 위해 ‘교육후원기금’을 내는 체계를 의무화하고 처벌 규정까지 마련했습니다. 완전 무료교육이라는 국가의 의무를 벗어던진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이제 사회주의 제도의 장점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상치료, 무료교육이란 단순한 구호를, 세계를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서도 앵무새처럼 말할 수 있게 세뇌가 됐었는데, 지금은 그 핵심 논거를 상실한 것이죠.

김정은이 지난달 ‘경찰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것도 사회주의 색채를 빼버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지난달 19일, 딸 주애가 운전하는 전차에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김정은. 그의 올해 행보는 딸을 데리고 국방 분야를 시찰하는데 집중돼 있다. 노동신문 뉴스1
지난달 19일, 딸 주애가 운전하는 전차에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김정은. 그의 올해 행보는 딸을 데리고 국방 분야를 시찰하는데 집중돼 있다. 노동신문 뉴스1


● 딸을 앞세운 김정은 어디로 가나
이렇게 헌법에서 사회주의적 조항을 유명무실화시키면서 김정은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어디일까요. 아직은 그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정은이 선대와는 다르게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헌법에 명시된 기존의 사회주의 시책들이 더 이상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반세기 넘게 공염불로만 존재하던 국가의 약속들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기초하는 경제 및 정치 철학으로, 사유 재산 소유와는 대조적인 개념입니다. 김정은이 사회주의적 약속들을 지웠다면, 그 자리엔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새 약속들이 헌법이란 이름으로 들어설까요. 사유 재산이 인정되면 시장 경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합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북한은 시장 경제로 전환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습니다. 김정은은 사회주의는 버렸지만, 세습과 우상 숭배, 강력한 독재는 더욱 단단히 틀어쥐고 있습니다.

강력한 전제군주제라는 정치 형태는 절대 버릴 생각이 없는 것이고, 새로운 4세대 군주로 김주애를 내세우려는 움직임도 최근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변화는 단지 사회주의 시책이라는 악성 채무에 대해 지급 불능을 선언했을 뿐입니다.

반면 시장 경제는 체제 불안 때문에 도입을 못 하겠기에, 당분간은 사회주의적 경제 형태와 시장 경제 사이의 갈팡질팡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이한 경제 체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런 형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배급도, 월급도, 무상치료와 무료교육도 사라진 북한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오직 절대적 복종만 요구하는 김정은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친 인민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오는 것이 없으면 가는 것도 없기 마련입니다. 북한 인민도 조만간 김정은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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