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오늘부터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주유소 과다 보유-판매 기피 불허
해상 면세유 불법유출 특별단속도
韓銀 ”장기화땐 초과수요 등 부작용”
주유소 극과 극 12일 전국 최고가로 꼽힌 서울 강남구 한 주유소의 휘발유 가격이 L당 2598원으로 표시돼 있다(위쪽 사진). 같은 날 서울 노원구의 한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휘발유(1769원)와 가격 차이는 829원에 달했다. 박형기 oneshot@donga.com·송은석 기자
정부가 정유사 공급가격에 상한선을 두는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를 도입한 것은 중동 전쟁으로 국제유가 변동성이 커지면서 국내 기름값 상승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졌다는 판단에서다. 중동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소비자 부담과 물가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사전에 억제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이번 조치는 대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미봉책인 만큼 시행 기간이 길어질 경우 수급 불균형 확대 등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주유소 휘발윳값 1800원 안팎 될 듯
12일 정부가 발표한 석유 최고가격제의 핵심은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석유제품 가격에 상한선을 설정하는 것이다. 적용 품목은 보통휘발유, 경유, 등유 등이다. 고급 휘발유는 아니다.
최고가격은 정유사 공급가격을 기준으로 최고가격 조정 주기인 2주 단위의 싱가포르 석유제품 가격(MOPS) 변동률을 반영하고, 교통·에너지·환경세·부가세 등 제세금을 더해 산정한다. MOPS는 국내 정유사들이 참고하는 대표적인 국제 유가 반영 지표다.
향후 2주간 적용될 정유사의 휘발유 공급 최고가격은 L당 1724원이다. 2월 넷째 주 정유사의 공급가격을 기준으로 결정됐다. 이날 기준 정유사의 평균 휘발유 공급가격(L당 1830원)보다 106원 낮다.
주유소 판매가격은 정유사 공급가격에 주유소 운영비와 임차료, 인건비, 물류비, 마진 등을 더해 결정된다. 이날 기준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은 1900원 수준으로 정유사 공급가격보다 70원가량 높게 형성돼 있다. 최고가격이 L당 1830원보다 100원 이상 낮게 확정된 만큼 정유사 공급가격은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급가격이 낮아지면 일정 시차를 두고 주유소 판매가격도 1800원 안팎으로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울릉도 같은 섬 지역의 기름값은 이보다 다소 높게 책정될 수 있다. 해상 운송으로 별도의 운송비용이 소요되는 도서 등 특수 지역은 5% 이내의 범위에서 별도의 최고가격을 설정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도서지역의 휘발유 공급 상한선을 L당 1743원으로 결정했다.
● 공급량 줄이기 ‘꼼수’ 방지… 부작용 우려도
정부는 석유 최고가격제가 시행될 경우 손실을 우려한 정유사와 주유소가 석유제품 판매량을 줄이는 상황을 막기 위해 매점매석 금지 고시에 나선다. 이에 따라 정유사는 휘발유·경유·등유 월간 반출량을 지난해 같은 기간 반출량의 90%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정당한 사유 없이 주유소에 판매를 기피하거나 특정 업체에만 과다하게 공급하는 행위도 금지된다.
주유소는 폭리를 목적으로 휘발유·경유·등유를 과하게 구입하거나 보유할 수 없고, 정당한 이유 없이 소비자에게 판매하지 않는 행위도 막힌다.
고시 기간은 13일부터 5월 12일까지다. 필요할 경우 기간 연장이 가능하다. 산업통상부와 지방정부는 매점매석 행위 신고센터를 설치·운영하고, 위반 시 물가안정법에 근거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른 불법 행위 차단에도 나선다. 관세청은 16일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6주간 해상 면세유 불법 유출을 막기 위한 특별단속에 나선다고 이날 밝혔다. 최근 국제 유가 급등에 따라 국제무역선에 적재돼야 할 면세유 일부를 빼돌리는 불법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 탓이다.
정부가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시장 석유 가격에 직접 개입하면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2주마다 수요가 급변하면서 시장에 인위적인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다음 최고가격 조정 시점에 가격 인상이 예상되면 소비자들이 가격이 오르기 전에 기름을 채워 두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특정 시점에 주유 수요가 몰려 일부 지역에서 재고 부족이나 ‘주유소 줄서기’ 현상이 재연될 수 있다.
가격 통제가 장기화될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최적의 가격을 정한다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해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제도가 오래 지속되면 정유사 입장에서 무작정 손실을 감수하며 판매를 계속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준다고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책정한 손실이 100이라고 가정할 때 국가 재정으로 이를 전부 지원해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은 이날 최고가격제와 관련한 국회 질의에 “국제 유가 급등과 같은 큰 외부 충격 발생 시 소비자 부담을 일시적으로 줄여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서도 “도입 기간이 길어질수록 초과 수요 발생 등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밝혔다.
정유사 단체인 대한석유협회는 이날 최고가격제에 대해 “정부 유가안정 대책에 충실히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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