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래미 어워즈’에 참여하는 복수의 한국인 투표위원을 만났다. 내년 2월 열리는 시상식의 주요 부문 후보에 가수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APT.’,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제곡 ‘골든(Golden)’이 진출해 관심이 많은 상황이다. 거액의 자본과 인맥이 동원된 막후 로비전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여럿 들었다. 그중 한 위원이 지나가듯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최우수 뮤직비디오’ 부문 이야기다. 투표위원만 볼 수 있는 예비 후보에 한국 작품이 절반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 비주얼 팝의 강국이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최종 후보에는 단 하나도 오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APT.’와 ‘골든’도 아파트와 K팝이라는 키워드가 한국적일 뿐, 노래 자체는 아메리칸 팝 스타일의 작품이다. 4인 이상의 멤버가 파트를 나눠 한국어 가사를 부르며 군무도 살아 있는 ‘K팝적인 K팝’은 아직 본상에 못 오른 게 맞다. 하긴 그래미란 애당초 미국 음반 업계가 미국 음악 발전을 위해 만든 시상식. 미국 시장의 작품, 미국적인 작품 위주로 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차제에 우리가 국제적 대중음악 시상식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국제’를 표방한 시상식이 없는 건 아니다. ‘마마 어워즈(MAMA AWARDS)’가 대표적이다. 1999년 엠넷의 ‘영상음악대상’으로 출발한 이 상은 2000년대 한류 약진과 함께 마카오, 싱가포르, 홍콩, 베트남, 일본 등지로 개최지를 확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명칭도 ‘아시안’을 품은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MAMA)’로 바꿨다. 그러나 여기서 ‘아시안 뮤직’을 찾기란 힘들다. 올해 저우룬파(주윤발)가 시상자로 나오긴 했지만, 결국 K팝 가수가 출연해 K팝 무대를 하고 K팝 상을 받는 자리다. 그래미가 미국 상이듯, MAMA도 한국 상이다. 현지인들은 개최지를 제공하거나 객석을 메우고 팬 투표를 하는 역할에 그친다.
몇 년 새 우후죽순 생긴 수많은 가요 시상식이 아시아 도시에서 열리며 ‘글로벌’을 과시하지만 노림수는 따로 있다. 수익성이다. K팝 콘서트가 적은, 그래서 많은 돈을 내고라도 유치하려는 현지 프로모터나 팬의 심리를 이용해 서울에서보다 더 큰 수익을 올린다는 계산이다. 국내 가요 제작사들이 동남아 음악계를 백안시하는 경향도 여전하다. 젊은층의 인구가 많고 한국 문화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상의 화제 몰이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스트리밍 정산액 등 ‘객단가’가 낮아 매출 신장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 팝 음악 수준은 K팝과 함께 높아지고 있다. 대만 밴드 선셋 롤러코스터는 북미 최대 팝 페스티벌 ‘코첼라’에 출연하고 한국 밴드 혁오와 합작 앨범도 냈다. ‘P팝’을 표방하는 필리핀 아이돌 SB19, 비니는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1억 회 안팎에 이른다.
‘한국 문화의 힘’을 말하며 그래미와 빌보드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건 또 다른 사대주의다.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 음악 시상식을 우리가 먼저 주창하면 어떨까. 단기 매출에 몰두하는 민간 말고 정부나 공영방송의 차원에서 말이다. 유럽방송연맹이 주최하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처럼 노래로 겨루면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대화의 창구를 여는 평화의 음악 올림픽이 된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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