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넘어 ‘워라블’ 시대… 퇴사보다는 직무 바꿔 ‘덕업일치’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더 나은 일상, 베터 노멀]〈3〉덕업일치 성공하는 비결
즐기는 취미생활, 덕업일치 첫걸음… ‘한 우물 파기’보다 다양한 경험해야
의사에서 웹툰작가 된 장봉수 씨… “정말 좋아하는 취미 가볍지 않아”
160만 유튜버이자 CEO 대도서관… “알바하며 촬영-편집 익힌 게 발판”

직장인 조모 씨(28)는 명문대를 졸업한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 대학생들에게 ‘취업하고 싶은 직장’으로 꼽히는 소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 좋은 기업이다. 하지만 정작 회사에선 무기력하다. 그는 “아침에 눈뜨는 게 두렵고 회사에서 영혼 없이 앉아 있는 삶이 지겹다”고 말했다.

반면 증권사에서 일하는 이모 씨(30)의 일상은 정반대다. 야근이 잦지만 즐겁다. 대학 시절부터 주식 투자에 관심 있었던 그는 퇴근 후에도 투자 관련 정보를 샅샅이 찾아보고 자정 넘어 해외 주식시장을 지켜보다가 잠든다. 그는 “격무에 시달려도 성장하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일과 삶을 기계적으로 구분했던 ‘워라밸’을 넘어 일과 삶의 조화로 몰입을 강조하는 ‘워라블(일과 삶의 혼합·work and life blending)’의 시대를 맞아 덕업일치는 모두의 화두가 됐다. 궁극의 ‘일잘러’가 될 수 있는 덕업일치에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덕업일치를 행한 이들에게 그 비결에 대해 들어봤다.
○ 일에 매달리며 행복하지 않은 한국인
‘워라블’이 최근 각광받는 것은 코로나19로 업무 환경이 바뀌고 디지털 기반의 산업군이 확산하는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린 영향이 크다. 과거엔 ‘칼퇴’와 동시에 일에서 사생활을 분리하는 게 가능했지만 재택근무 등으로 일과 삶의 완전한 분리가 무의미해졌다. MZ세대 위주로 임금 자체보다 가치관, 취향을 더 중시하는 경향도 짙어졌다.

하지만 한국 직장인의 평균적인 삶은 대체로 행복과 다소 거리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인은 직장에서 약 7.8시간을 보낸다.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지만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한국의 행복지수는 5.85점(10점 만점)으로 OECD 회원국 37개국 중 35위에 그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만성 과로와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산업재해는 8105명(2018년 기준)에 이르러 20년 새 약 6배로 많아졌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조직 생산성을 해치고 사회경제적 비용을 낳는다. 경기개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스트레스 비용은 연간 21조7000억 원에 달했다. 특히 직장 스트레스로 갉아먹는 생산성은 2조4000억 원으로 추산됐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덕업일치의 비결을 탐색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 ‘한 우물’은 옛말…취미를 다시 보면 직업이 보인다
그렇다면 덕업일치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흔히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이들만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하고 있는 일과 별개로 진짜 즐기는 취미생활을 재점검해보는 건 덕업일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내 롯데아쿠아리움 관장인 고정락 상무는 원래 학자가 되고 싶었다. 해양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연구원을 하면서 틈틈이 수족관과 박물관을 다녔다. 주변에선 고리타분하게 일한다고 타박했다.

하지만 물고기를 좋아하는 그는 다이빙까지 배우며 물속에서 물고기를 마주하는 게 큰 기쁨이었다. 귀국 후 해양수산부 산하기관에서 연구직으로 일하다가 수족관 운영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일을 찾게 됐다. 학자의 길을 포기했지만 후회는 없다. 그는 “스스로 즐거워서 한 일이 천직(수족관장)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한 우물을 파라는 건 옛말이다. 다양한 경험은 원하는 걸 찾는 밑천이 된다”고 했다.
○ ‘부캐’가 ‘본캐’ 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취미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이럴 땐 현재 하는 일과의 시너지를 노려보는 것도 좋다. 유재경 국민대 경영대 겸임교수는 “자신의 본업과 관련된 분야의 취미나 부업을 시도해보는 게 좋다”며 “직장인이라면 직무 관련 책을 쓰거나 플랫폼에서 강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의사 출신 장봉수 작가는 의사직을 버리고 웹툰 작가로 전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만화 공모전에 도전했던 그는 의대 공부를 하느라 취미로만 만화를 그렸다. 그러던 중 재미 삼아 의사 커뮤니티에 웹툰 ‘내과 박원장’을 올려봤다. 의외로 동료 의사들이 열광하며 네이버 웹툰에서 정식 연재를 제의했다. 웹툰이 드라마로도 제작되면서 의사 20년 차인 지난해 8월 전직을 결정했다. 그는 “모두 급작스럽게 결정되며 순식간에 프로 만화가가 됐다”고 했다. 이른바 ‘부캐’가 ‘본캐’가 된 것. 문하생 3명을 두고 웹툰에 전념하는 그는 생애 최고의 소득을 올리며 의사 때보다도 더 많이 벌고 있다.

장 작가는 “어떤 일을 해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을 동경하는 게 아니라 그 일 자체를 동경하는 사람이 진정한 덕업일치를 할 수 있다”며 “순수하게 좋아해서 몰입하는 취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했다.

○ 덕업일치 계기, 우연한 기회에 온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생각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유튜버 대도서관은 인터넷 강의 제작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엔 전혀 관심 없던 분야였다. 하지만 여기서 ‘인생 첫 롤모델’을 만났다. ‘당시 사수였던 대리님이 너무 멋있어 보였던’ 것. 누가 시킨 적도 없지만 ‘대리님’과 같이 일하며 같이 퇴근하다가 회의까지 따라 들어가며 촬영, 편집 기술도 자연스레 익혔다.

그는 현재 구독자 160만 명을 거느린 유튜버이자 ‘엉클대도’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대도서관은 “나와 전혀 무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지만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며 “어떤 경험에도 열린 마음을 가지면 덕업일치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 직장보다 ‘이루고 싶은 일’ 찾아야
덕업일치에 성공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회사 자체보다 업(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강수희 LG CNS 선임은 어릴 적부터 PD를 꿈꾸며 방송국 입사를 준비했지만 현재 삶에 매우 만족한다. 금융회사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하며 콘텐츠를 직관적이고 흥미롭게 기획하는 일이 PD의 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콘텐츠로 세상에 효용을 주고 싶다는 꿈의 본질은 PD나 개발자나 동일하다”며 “덕질의 근본적인 지향이 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란 점을 깨달았을 때 진로를 바꿔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업황이 저문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해당 산업군 안에서도 자신의 흥미를 찾고 업의 본질을 고민해보며 여러 시도를 할 수 있다. 10만 구독자를 거느린 ‘민음사TV’를 이끈 조아란 민음사 마케팅부장은 “본질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라”고 했다. 출판업계에서는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 등의 비관론이 나왔지만 책을 사랑하는 그는 오프라인 판매가 온라인 중심으로 옮겨가면 어떻게 책을 더 잘 팔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가 유튜브 민음사TV다. 조 부장은 “‘책을 잘 알리자’란 강력하고 확실한 동기가 있었기에 직업을 바꾼 것과 다름없는 도전적 시도도 모두 즐거웠다”고 했다.

커리어 전문가들은 섣부른 이직이나 퇴사를 감수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직무 변경 등을 통해 현재 직장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전재경 탑커리어 대표는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일, 꼭 하고 싶어 하는 일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고 최종 후보군 중 회사에서 실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직무 변경 등을 통해 이루는 것이 최적”이라며 “회사에서 실현하기 어렵다면 관련 직업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며 노출 시간을 늘려가라”고 말했다.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
#워라밸#워라블#덕업일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