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점령군’ 논란, 비겁한 변명 말고 역사관 당당히 밝히라

이기홍 대기자 입력 2021-07-09 03:00수정 2021-07-0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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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美 포고문에 있으니 점령군”식 해명 말고
실질적으로 점령세력이었다 생각하는지 밝혀야
대선 후보 역사관은 정책방향 가늠할 핵심 지표
주요 후보 되면 누구나 한미동맹 호국보훈 강조
돌출 발언과 과거기록 통해 본심 철저히 검증해야
이기홍 대기자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자 좌파진영이 들고나온 반격 논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점령군 표현은 미군 포고령에도 나오는 ‘팩트’인데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다. 둘째는 이런 걸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철 지난 색깔론’이라는 주장이다.

첫 주장부터 따져보자.

이 지사는 “미군 스스로 포고령에서 ‘점령군’이라고 표현했다”며 “역사지식 부재”라고 역공한다. 즉 점령군이라는 표현은 기술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인데, 당당하지 못한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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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발언은 미 군정기 미군의 법적·제도적 지위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이 지사도 그런 기준으로 표현을 고른 게 아닐 것이다.

만약 실질적 내용 평가를 배제한 채 공식적·형식적 지위만을 기준 삼는다면 구한말 일본공관 경비, 갑오농민전쟁 진압 지원 등의 구실로 한반도에 들어와 침탈한 일본군을 침략군, 제국주의 점령군이 아니라 경비군, 지원군으로 불러줄 것인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중심적 표현으로는 1945~1948년을 미 군정기라 표현한다.

이 지사가 ‘자주독립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짓밟은 외세(미군)의 점령’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점령군 표현을 했다면 그런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게 당당한 자세다.

그런데 이 지사는 미 군정기의 미군을 실질적으로도 점령세력으로 보는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 주장을 밀고 나가는 김원웅 광복회장이 더 일관성 있다.

다만 그 일관성이 무지와 편견, 균형감각 상실의 산물이라는 점이 문제다.

저명 사학자인 노먼 네이마크 미 스탠퍼드대 교수의 저서 ‘The Russians In Germany’(하버드대 출판부·1995년)에는 소련군이 1945~1949년 동독 등 점령지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스탈린은 소련 군인들의 동구권 점령지에서의 만행에 대해 “장기간 전쟁을 치르며 죽을 고비를 넘긴 우리 군인들이 좀 그런다해서 뭐 그리 대수냐”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1945년 8월부터 5개월간 황해도 평안남북도에서 소련군의 행태를 조사해 작성한 보고서도 우드로윌슨센터가 발굴해 공개했다. 보고서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가 만연해 있다”고 적고 있다.

필자가 최근 읽은 함경남도 북청 소작농 출신 월남민의 자서전 대목이다.

“우리 고장에는 그해 9월 초에 처음으로 소련군이 들어왔다. 미국산 G.M.C. 군용트럭을 타고 다니는 소련군을 보니 난생 처음 보는 서양사람인데다 최전방 선발대여서인지는 몰라도 무척 지저분하고 무서워 보였다. 소련 군인들은 ‘흘래발’이란 커다란 식빵 같은 것을 갖고 다니면서, 잘 때는 그것을 베개 삼아 베고 자고 식사 때는 뜯어 먹었으며, 항상 해바라기씨를 주머니에 가득 넣고 다니면서 까먹는데, 그들이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솜씨는 참새가 곡식을 까먹는 기술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들은 미개하고 아주 난폭했다. 부녀자들을 보면 무조건 끌고 가서 욕을 보이기가 일쑤여서 그들이 나타나면 부녀자들을 숨기느라 야단들이였으며, 행인들의 손목시계도 다짜고짜 뺏어 팔목과 팔뚝에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 (이학섭 저 ‘발자취’)

점령군 발언이 논쟁거리가 되자 좌파진영은 “색깔론”이라 비난한다. 하지만 후보의 현대사 인식 검증은 색깔론이나 퇴행적인 논쟁이 아니다.

대선 후보가 현대사를 어떻게 보는지는 집권 시 어떤 정책을 펼칠지의 가늠자다. 특히 한국에서의 반미 문제는 종교나 수탈관계 논쟁에서 빚어지는 중동이나 중남미의 반미와 달리 이념적 성향과 밀접히 연관된 문제다.

집권자의 이념 성향에 따라 외교·경제·사회정책은 물론 교과서 내용과 학교 시스템까지 바뀌는 게 우리 사회다. 이념적 스탠스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지표가 현대사와 미국·북한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데 어느 후보든 당선권을 넘보는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생각은 숨긴 채 공약집과 TV토론, 연설 등에선 한미동맹과 호국보훈을 강조한다. 다들 현충원도 참배한다. 평소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온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이들이 6·25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대해, 3만6000여 젊은이의 목숨을 바친 미국의 참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들의 희생을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면 6·25 내전설·남침유도설·통일전쟁 등의 주장이 횡행하며 중고교생들에게 전파되고, 중국이 노골적으로 항미원조를 찬양하고 전쟁진실을 왜곡하는데도 왜 침묵만 하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때로 본심은 준비 없이 툭 던져지는 말이나 당선권 후보가 되기 이전의 기록들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국민은 후보의 역사관을 끊임없이 묻고 검증해야 하며, 후보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혀야 한다. 투표일까지 가면 뒤에 숨으려하는 건 당당하지 못하다.

대선은 정부라는 거대한 논에 어느 저수지의 물을 댈지를 정하는 일이다. 선거 때는 중도 온건을 강조하지만 막상 집권하면 수문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으로까지 활짝 열리고, 진영 내에서도 가장 과격한 인사들이 수많은 자리를 점령해 역사를 재단하고 사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을 우리는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혹독하게 겪고 있지 않은가.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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