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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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기홍 대기자입니다.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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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0~2024-04-19
칼럼100%
  • [이기홍 칼럼]김건희 여사 엄정한 사법처리만이 尹정권 살길이다

    총선 며칠 후, 총선 결과보다 더 놀라운 얘기를 여권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전언이었다. 김건희 여사가 머지않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덧붙여졌다. ‘수많은 보수 지지자들이 울분과 절망감을 겪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 부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건가?…’ 귀를 의심하면서, 그들이 잘못 관측한 것이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의 관측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일들이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별로 변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16일 국무회의 발언에 이어, 17일 새벽엔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설 파동이 비선라인의 활동재개를 다시 확인시켜줬다. 총리·실장설은 공식 인사·정무·홍보 라인이 아니라 대통령 부부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의 원인이 한동훈 대표와 당의 잘못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공천 개입을 자제하는 등 당을 위해 “그렇게 해줬는데도” 선거를 망쳤다는 것. 부정확한 인식이다. 참패의 원인은 99% 대통령이 제공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든 허물을 안고 가야 한다는 도의적·정무적 차원에서의 표현이 아니다. 객관적·실질적으로 분석할 때 거의 전적으로 대통령이 패배요인을 제공한 선거였다. 물론 윤 대통령 이외에도 패배 원인은 100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백개를 다 합쳐도 총량에서 전체 원인의 1%가 안된다. 윤 대통령이 국민 과반수의 미움을 사게 된 근본 원인은 자신의 최대 장점이고 경쟁력인 공정 이미지와 정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부인을 감싸고 돌며 사과마저 거부하고, 오만과 불통 이미지를 끊임없이 각인시켜준 결과다. 조국 추미애가 대통령 윤석열 탄생의 1등 공신이었듯, 이젠 품앗이하듯 윤 대통령이 조국 추미애 부활의 1등 공신 역할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이 힘과 권위 신뢰를 되찾으려면 공정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김 여사 문제를 국민 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수준으로 처리해 매듭짓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 다수는 이념적·당파적 스펙트럼을 좌 극단 1, 우 극단 10으로 가정할 때 4~8사이의 중도 온건진보 온건보수 성향 사람들을 뜻한다. 대통령 주변의 비선 강경파들은 “하나를 내주면 열을 요구할 것”이라고 만류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3 좌파는 하나를 받으면 열을 요구하겠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든 그러는 세력이니 대책을 세울 때 아예 고려의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다. 오로지 3~8 국민들만 바라보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들이 외면하면 정권은 고립된다.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지, 계속 감싸기만 하면 하나가 아니라 전부를 잃게 된다.첫걸음은 검찰의 엄정한 사법처리다. 김 여사를 빠른 시일 내에 공개 소환하고, 압수수색을 포함해 적극적 수사의지를 갖고 임해야 한다. “탈탈 털었다”가 대통령의 입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 저절로 나올 수준이 되어야 한다.김 여사의 유죄를 예단하는 게 아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동원된 계좌주 91명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명이고 그나마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법리적으로 따져 결국 김 여사가 무죄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해도 엄정한 사법절차를 거쳐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명품백 사건도 김영란법 조항에 따르면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수수는 직무연관성이 있는 경우만 처벌대상이 되므로 김 여사는 법리적으로 무혐의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해도 철저한 조사와 사법절차를 거쳐 결론이 나야 한다.물론 아무리 엄혹한 수사와 재판을 거쳐도 야당은 더 거세게 특검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여론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여당 내 이탈도 없을 것이다. 국민도 특검 만능론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윤 대통령은 김 여사와 처가에 대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 대안이 없다. 감싸려 해도 결과적으로 똑같은 코스로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 소환 조사조차 안 받은 현 ‘봐주기’ 상태에서 특검법이 상정되면 여당 새 지도부가 사실상 동조해주거나 이탈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설령 이번에 특검을 피한다 해도 다음 대선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여사 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느 정권이든 비선 실세로 지목된 인물과 관련한 의혹이 불거진 뒤 그냥 덮고 갈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전두환 때 전경환이 그랬고. 노태우 때 박철언이 그랬고, 김영삼때 김현철이 그랬고, 김대중때 홍삼트리오가 그랬고, 이명박 때 이상득이 그랬다. 문재인 전 대통령 가족만 예외인 것은 윤 대통령이 문 전 대통령을 건드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기 때문인데, 다음 정권도 그럴까? 만에 하나 김 여사가 구속된다고 가정하자. 여야 모두 으스스 떨고 국민 사이에 동정론이 일 것이다. 판사들도 이재명, 조국 사건에 대해 야당 눈치 보기를 하기 어렵게 된다. 수백 건 쏟아질 선거사범 수사, 경기동부연합 등 종북세력 수사도 힘을 받게 된다. 비리 발생 시점이 재임 중이라면 가족의 구속수감이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이 되지만,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12년도 더 지난 결혼전 얘기다. 부인마저 심판대에 세운 대통령에게서 뿜어 나올 춘풍추상의 기세는 국정 주도권을 확실히 쥐여줄 것이다. 지도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할 때 국민에게 말이 먹히고 기강이 잡힌다.오만·불통과 부인 감싸기는 같은 맥락에서 생기는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니 가족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다는 오만, 법에 규정된 특별감찰관이라도 내가 싫으면 비워둘 수 있다는 생각, ‘내가 뭉개고 가자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라는 권위의식이 진솔한 사과 대신 “아쉽다”고 눙치고 가는 KBS 대담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을 상황을 자초했다.권위의식은 윤석열 리더십의 근본적 문제다. 취임 초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컨보이’(convoy·경호차 행렬)를 너무 좋아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참모들에게 버럭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실 주변에 ‘오대수’란 은어가 돈다. ‘오늘도 대충 수습하고 간다’는 뜻이다. 이래선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50분’이란 별명(회의 내내 본인이 말한다는 비유)이 붙을 정도로 경청보다는 가르치려드는 대화 스타일도 바꿔야 한다.당장 나라에 닥칠 상황은 험난하다 경제 환경은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고, 미국 대선, 중동전 등등 악재가 겹겹이 쌓여간다. 이를 헤쳐가며 4대개혁을 하려면 국민 신뢰가 절실하다.혹여라도 윤 대통령이 ‘여태 103석으로도 꾸려왔고 이제 108석인데 여태 해왔듯 밀고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 ‘개혁만 꾸준히 해나가면 국민이 평가해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렇게 불신당하는 상태에서는 개혁이나 정책도 힘을 받을 수 없고, 우파 대통령의 권위주의 일방통행 불통에 5년간 진저리를 친 국민은 다음 대선에서 좌파로 기울 것이다. 지금 근본적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앞으로 3년을 까먹는 건 물론이고 보수의 미래,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앞날을 망치는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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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한국 국민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권력자의 오만

    사람들이 요즘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다. ①“도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판세가 정반대로 뒤집힌 거야?” ②“만약 야권이 200석 가져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야?” ③“남은 기간에 판세가 바뀔 수도 있나?” 오랜 기간 정치를 지켜봐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해 들었다. 원인 진단은 거의 일치했다. ①번 질문, 즉 불과 2,3주전만 해도 ‘비명횡사’ 공천으로 야당이 대패할 듯한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야당의 압도적 우세 판세가 형성된데 대해 전문가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 이미지’가 다시 부각된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권력자가 건방지고 오만한 것이다. 국민은 자기가 뽑은 지도자가 일하다 실수를 저질렀거나 국가경영에 차질을 빚어도 의외로 관대하며 금새 잊어준다. 그런데 국민 앞에서 오만하다든지, 뻔한 거짓말을 한다든지, 가르치려 드는 건 절대 용서치 않는다.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강서 보선 참패 직후 바뀌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민생토론에 몰두했으며, 명품백 논란 이후엔 별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김건희 여사도 사라졌다. 지지율이 올랐다.그러나 대통령은 3월 둘째 주부터 논쟁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의대 증원 반발에 직접 나서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나만이 정답’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거기다 호주 대사 문제에 대해 ‘런종섭’ ‘도피 출국’ 프레임을 건 좌파와 야당의 공세가 너무 악의적이고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중도층과 온건 보수 시민들 마저도 “이대로 출국시키면 야당에 먹잇감이 될 수 있으니 출국은 총선 뒤로 미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으나 대통령은 아랑곳없이 바로 출국시킴으로써 ‘역시 자기 고집대로만 하는 사람’ 이미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윤 대통령은 정치를 너무 쉽게 봤다. 외교와 안보, 경제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꾸려왔는데 정치는 스스로 모든 걸 아는 양 손에 쥐고 흔들려 했다. 사실은 가장 어려운 분야가 정치다. 리더십, 사회통합, 반대세력과의 관계, 언론, 선거, 민심관리, 이미지관리 등 모든 게 정치의 영역이고 그야말로 고단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평생 정치를 한 정치 9단 대통령들도 매주말 전문가들과 심층 토론을 하고 컨설턴트의 조언을 받아 선거를 치렀다.물론 오만한 권력에 대한 심판은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조국 대표 등을 비롯한 야권 지도자들은 뻔뻔함과 위선, 그리고 상대방을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계급론적 낡은 세계관까지 결합된 위험천만한 오만함을 지니고 있다.하지만 그들은 영악하다. “수년간 탈탈 털렸다” “일가도륙” 등의 주장을 끊임없이 퍼뜨려 자신들을 동정론의 대상으로 포장한다.이 대표는 판세가 유리해지니까 오만함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말이 거칠어지는데, 만약 그가 더 단수 높은 정치인이었다면 “재판 안 가도 된다”고 호언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21대에서 국민이 민주당에 많은 의석을 주셨는데 오만해서 실망시켜드렸다. 깊이 반성한다. 우리가 잘해서 지지해주시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이번에 한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그건 정부 감시 잘하면서 민생 위해 협조하라는 지시로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겠다….”현재의 야당 우세에는 한국 언론들의 무책임한 행태도 한몫했다. 좌파 진영에서 팩트들 가운데 자의적으로 뽑아 교묘하게 엉뚱한 그림을 만들면 대다수 언론은 우르르 따라간다.대파논란도 한 예다. 윤 대통령은 “875원이면 합리적”이라고만 한 게 아니다. 농협의 온갖 할인적용으로 낮춰진 가격임을 지적하며 “다른 데서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쏙 빼고, 조작된 가격에 속아 ‘이게 지금 물가수준이군’이라고 만족하며 돌아온 ‘민생과 괴리된 우둔한 지도자’ 이미지를 연출해 버린다. 대다수 언론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은채 야당 주장에 확성기를 들이대 중계하고, 대통령실이나 여당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어?어?’ 하다 당하는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돼 왔다.또한 지금의 판세에는 △비명반윤 표가 3지대로 가면 야권 표가 분산될 수 있었는데, 지역구를 내지 않는 조국 당이 등장하면서 야권표의 지역구 투표 분산을 막은 점 △더 거세진 호남권의 권력의지와 전략적 투표 행태 △집단 병리현상에 가까운 세상 뒤집기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②번 질문, 즉 야권이 200석을 넘길 경우 상황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예상은 비슷했다.개헌선을 확보하면, 문재인 대통령 시절 추진했던,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에서 ‘자유’ 문구를 삭제하는 게 강행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외교안보 분야도 대변화가 불가피하다. 특히 트럼프 집권 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가 거세질 텐데, 국회가 이를 받아줄 리 없어 결국 미군 감축론이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각국이 반도체 산업 지원 경쟁에 나섰지만 한국 국회에선 재벌특혜 논란이 거세져 결정이 미뤄지거나 지원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거부권이 없으니 특검이 양산되고, 퍼주기 포퓰리즘 입법이 속출할 것이다. KBS 등 공영방송을 영구적으로 좌파진영이 장악할 수 있는 법도 강행될 것이다. 좌파 영구집권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③번 질문, 즉 사전투표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판세가 변할 수 있느냐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과거 선거 전례를 들며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필자는 가능하다고 본다.선거에 임박해 이번처럼 갑자기 여당의 수도권 지지율이 15%씩이나 떨어진 예는 없었다. 이는 과거 총선의 정권 중간평가는 국정 방향에 대한 찬반 의사 표시였던 데 비해 이번에 중도층이 민감하게 반응한 주제는 국정방향 자체가 아니라 대통령의 태도이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정책과 국정방향에 대한 평가는 선거 직전 쉽게 바뀌지 않는데 비해, 사람의 태도에 대한 호감 비호감도는 태도가 바뀌면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다.따라서 윤 대통령이 이제라도 그간 오만하게 비친 대목들을 사과하고 달라지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주면 표심은 변할 수 있다. 국무회의 등에서 “호주 대사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제 본의와 다르게 국민이 납득 못 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건 결국 제 책임이다. 귀중한 젊은이의 희생과 관련된 문제였는데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서둘러 내보낸 건 경솔했다”고 유감을 표한다면 국민의 화는 상당 부분 풀릴 것이다. 이종섭 대사 본인을 위해서도 더 나은 길이다. 수사나 재판에서 결백이 입증된다면 앞으로 더 중요한 공무를 맡을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반면 만약 유죄가 된다면 지금 대사직을 유지한다한들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의대 증원에 대해서도 “협상 대표가 전권을 갖고 국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타협안을 찾아오라”고 해야 한다. 강한 리더십은 국민의 박수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때 이뤄지는데, 너무 오래 끌며 피로감과 환자 가족의 걱정을 키워왔다.남은 3년은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다. 요즘 3년은 예전의 30년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자존심과 고집을 내세우면 정권 망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보수의 미래, 자유민주주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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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이재명의 당 장악… 그걸 가능케한 보이지 않는 리모컨

    더불어민주당의 공천파동은 한국 정치사에 기록을 세웠다. 축구에 비유하면, 반칙은 어느 팀 어느 경기에서나 발생하지만 질적 양적으로 이렇게 노골적이고 저급한 반칙이 양산된 경기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의도의 노골성, 숙청의 과격성, 수단의 저급성 차원에서 과거의 공천파동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또 하나 놀라운 현상은 반발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있다는 점이다. ‘비명횡사’당한 비명(非明)의 비명(悲鳴)이 금세 잠잠해졌다. 임종석의 잔류를 분기점으로 공천탈락자들 가운데 좌파 성향이 강한 이들은 대부분 잔류를 택했고, 김부겸의 합류 등 어느새 대동단결 모드로 접어들었다. ‘비명계 횡사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한 그룹은 온건 중도 성향의 인사들인데 대부분 진작 탈당했거나 이번에 탈당했다. 다른 그룹은 이념적 성향으로는 개딸 못잖게 좌파 성향이 강한 친문 인사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백의종군을 다짐하고 있다. 좌파 성향이 강할수록 잔류를 택하는 경향인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침묵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 온갖 세상일에 다 간섭하고, 심사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해 안달이던 인사가 자신이 직접 신신당부했던 최측근들마저 대부분 ‘횡사’당했는데도 침묵한다.필자는 이런 흐름 속에서 좌파 진영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리모컨의 존재를 감지한다. 거역할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이들의 순종을 간접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리모컨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백낙청 임헌영 함세웅 김상근 등등 이른바 원탁회의 멤버로 불리는 좌파 진영의 ‘정신적 호메이니’들일 수도 있고, 그 너머에 좌파 지휘부가 나침반으로 삼는 더 큰 힘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거대한 힘은 특정인이나 조직일 수도 있지만, 슈퍼컴퓨터가 데이터를 종합해 답안을 제시하듯, 좌파 진영의 ‘집단적 권력의지’에서 도출되는 무형의 합의가 가이드라인처럼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리모컨이 지시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결론은 ‘이재명 중심 단일대오’로 내려졌으니, 억울해도 ‘대의’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우파정권 무력화와 좌파권력 창출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대오에서 이탈하는 자에겐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무음의 경고가 양들의 이탈을 막는 전자펄스 펜스처럼 진영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지지자 개개인도 행동대원처럼 단결한다.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에 대한 좌파 지지자들의 호응은 아무리 이 대표가 싫어도 좌파(진보)라면 모두 ‘윤석열 심판’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야 한다는 친문 지지자들의 권력의지의 발현이다. 친문 학살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지역구에서 이재명당을 찍어주겠다는 것이다.이런 흐름의 바탕에는 민노총 전교조 등 온갖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종으로 횡으로 얽혀서 거미줄같이 구축한 촘촘한 네트워크가 깔려 있다.백낙청 전교수는 대선 패배 일주일도 채 안 된 2022년 3월 16일 오마이TV에 출연해 “이재명은 김대중 이후 최고의 정치지도자”라며 민주당 장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촛불혁명을 이어가려면 우리가 반드시 점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충지 가운데 하나가 민주당”이라며 “어떻게 우리 세력이 (민주당을) 지배하고 장악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요충지의 중요성이 옛날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고, 옛날에 비해서도 의미가 더 커졌다…게다가 이재명이라는 정치지도자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이미 2년 전 대선 패배 직후부터 이재명을 거점으로 민주당 장악을 연구해온 그들에게 이 대표의 도덕성, 공인의식 수준은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다. 온갖 범죄 혐의를 받고, 은밀한 관계였다고 폭로한 상대 여성을 허언증 환자로 몰아붙이는 뻔뻔함과 도덕적 저열함이 드러나도, 입에 담을수 없는 욕설을 서슴지 않는 인성이 드러나도, 법인카드로 일제 샴푸를 사는 비천한 공인의식이 드러나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낙점의 기준은 목적 달성을 위해 안면몰수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생존력, 전투력이다. 사전투표까지 남은 시간은 3주일. 좌파 지휘부는 진영의 모든 화력을 윤석열 심판에 집중하라는 지침을 내릴 것이다. 총선 프레임을 이재명 vs 한동훈이나 좌 vs 우 대결이 아닌 오로지 윤석열 심판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다.진영 내에서 막말 파문이 터지면, 설령 그 내용이 평소 같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속으로는 말 잘했네 하고 웃고 넘겼을 수준의 발언이라도 신속하고 강한 처방을 내릴 것이다. 친명 후보 교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당과 이 대표는 온건 부드러움의 대변신 쇼를 해 중도층에 영합하고, 강경파의 불만은 조국혁신당 등에서 흡수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우파에는 그런 리모컨 존재가 없다. 진영을 견인할 정신적 지주도, 원로그룹도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국힘 지도부가 돌발 악재에 대응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의사결정 시 뭔가를 염두에 두는 듯 미적대며 자꾸 내재적 관점으로 덮으려 하고, 대통령실은 호주대사 문제 같은 악수(惡手)를 두고, 의대 증원 문제에 굳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경 대응을 거듭 외치는 바람에 한동안 잊혀진 경직된 이미지를 다시 상기시키는 국면인데도 아무도 신속히 바로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리모컨을 쥔 자들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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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문재인·이재명 부부가 상징하는 좌파의 公人의식 수준

    공천 파동 뉴스에 묻힌 감이 있지만, 요즘 정말 경각심을 갖고 주시해야 하는 야권의 움직임은 더불어민주당이 반미친북 성향 세력에 최소한 10석의 국회 비례대표 의석을 할애해주기로 했다는 뉴스다.민주당은 총선용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진보당, 새진보연합, 연합정치시민회의 후보 10명을 당선 안정권에 배치키로 했다. 진보당은 해산된 통진당의 후신이고, 연합정치시민회의는 반미친북 활동가들이 만든 급진 좌파 단체다.정상적인 대의민주 시스템에선 대표권을 갖기 힘들 반체제 성향 인사들이 면책특권 등 수백가지 의원 특권을 등에 업고 국가 기밀과 정책 형성 과정에 깊숙이 접근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예고된 것이다.국가 안보에 미칠 영향과 더불어 이들의 국회 진출이 우려되는 또 하나의 대목은 나라 금고에 미칠 폐해다.사람은 누구나 공짜를 좋아한다. 회사 탕비실 디저트를 보면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자제한다. 마음속에 셀프 경계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정치권의 경우 그 셀프 자제의 강도가 좌우파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우파는 크게 한탕 해먹을지언정 좀스럽고 치사하게 보일 일은 자제하고 조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좌파는 자기 권리를 찾아먹고 공짜를 챙기는 데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대표적인 게 조국 전 장관이었다. 나라를 뒤흔든 논란 끝에 2019년 10월 14일 결국 경질되자 사직서 결재 22분 만에 서울대에 복직신청서를 냈다. 복직 신청 기한이 한 달이나 되는데도 챙길 수 있는 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먼저 타먹는다는 뇌 구조다. 이재명 대표 부부의 경기지사 시절 법인카드 사용 행각도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나 법카를 사적으로 쓰고 싶은 욕구를 때로 느끼겠지만 일제 샴푸를 사오게 하고 집에 초밥을 시켜 먹는 걸 다반사로 하는 대담함은 상상조차 어렵다.섣부른 일반화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좀스러운 거지 근성이 상대적으로 좌파에서 더 심하다’는 추론을 떨치지 못하게 만드는 화룡점정의 얘기를 최근 들었다.2022년 5월 정권 교체 시기에 청와대 업무에 관계했던 인사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를 떠나면서 관저의 집기와 가전제품은 물론 접시 수저 등 식기까지 다 가져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봄 전언식으로 돌았지만 설마 그랬을 리가 있을까하고 반신반의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해외 주재 대사관에 물어봤다. 대사가 바뀌면 대사관저 접시 한 개까지 다 재고목록에 기재해 인수인계한다고 한다. 전임자가 비품을 한 개라도 들고 가면 총무담당자가 배임으로 처벌받는단다. 대사관 관계자는 “만약 서방국가에서 퇴임하는 총리나 대통령이 관저 물품을 가져갔다면 사회 전체가 난리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에 근무할 때 장면이 생각난다. 2009년 6월 백악관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그해 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오찬을 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경선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대통령이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에서인지 시종 뒤편에서 조용히 따라다니던 클린턴 장관은 테이블 위 접시들을 들어 바닥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백악관 안주인 자리를 떠나면서 인계해 주고 간 그 접시들인지 살펴보며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문 전 대통령 부부처럼 다 가지고 떠난다는 건 아프리카 독재국가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100% 다 사비로 산 것이라 치더라도 그렇다면 입주할 때 있었던 기존 비품을 다 인계해 주고 가야 한다. 사용연한이 지나 폐기했다면 폐기 처분 기록이 있어야 한다. 김정숙 여사의 옷 최소 178벌과 장신구들도 특수활동비로 구입한 게 있다면 국가 재산으로 반납돼 있어야 한다.이런 행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심리학자에게 물었더니 “아웃사이더 심리에서 비롯된 주인의식의 결핍 탓”이라 분석했다. 즉 공짜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가미됐다는 설명이다. 오너가 회삿돈을 펑펑 쓴다고 여기는 직원이 탕비실 음식을 왕창 가방에 넣으며 상대적 보상심리를 느끼듯, 친일매국세력의 나라에서 어차피 기득권자들이 다 해먹는데 나는 이거라도 챙겨 손해를 일부 만회하겠다는 본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랏돈, 공공 재원을 아까워하고 소중히 여기는 심리가 실종된다는 것.나랏돈을 임자 없는 돈으로 여기고, 한발 늦으면 나만 바보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국회와 지자체에 진출했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결과물이 온갖 선심성 사업과 내 편 지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시민·민주 등의 수식어를 붙인 단체가 급팽창하더니 서울에서만도 2016~2020년 3339곳의 단체가 7111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평생을 제도권 밖에서 활동해온 골수 좌파 인사들이 권력에 접근할 경우 이런 행태는 극에 달할 것이다. 이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진실 공개와 법적 통제다. 관사 물건을 다 들고 갔다면 심각한 범죄 행위일 수 있는데도 왜 지금까지 공식 문제 제기가 안 됐을까. 대통령실은 문 전 대통령 부부의 행태에 개탄하면서도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좀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해 법적 대응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게 묻어버릴 일이 아니다. 좀도둑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문 전 대통령은 소상히 내역을 설명하고, 감사원은 청와대 재산 관리 실태를 조사해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명명백백히 드러내는 것은 좀스러운 일도, 정치 보복도 아니다.상상 초월 수준으로 공인(公人)의식이 결핍된 이들의 권력 진출은 우리 진영·지역 출신이라면 무조건 밀어주는 묻지 마 투표의 산물이다.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논에 어느 쪽 물을 댈지를 결정하는 투표에 앞서 저수지 물속 성분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유권자의 책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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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공정-상식의 아이콘’ 훈장 포기한 尹, 국민 신뢰 되찾으려면…

    필자가 이 칼럼에서 쓰는 ‘국민’이라는 표현은 전체 국민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가상의 스펙트럼상에서 극좌를 1, 극우를 10으로 놓았을때 3~8 사이 정도의 사람들을 문장 분량 축약을 위해 그저 ‘국민’이라 표현한다. 지난주 윤 대통령의 KBS 대담은 윤석열이라는 지도자에 대한 국민 평가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시험시간은 종료됐다. ‘김 여사 명품백 사건’은 막을 내렸다. 국민은 각자가 매긴 평가표를 서랍장에 넣었다. 더 기대도 주문도 안 할 것이다. 사건이 사라지거나 잊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통령실은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진단하겠지만 이는 반만 맞다. 진솔하게 사과했으면 일회성 전시품처럼 사라질 사소하고 별 함의 없는 사건을, 끝내 사과 없이 봉합해버리는 바람에 전시장 구석의 영구 전시 박제처럼 고형물이 돼 버렸다. 꺼내지 않은 채 봉합한 환부 속 작은 거즈처럼 두고두고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최대 피해자는 윤 대통령 본인이다. 윤석열 검사를 정치 입문 1년도 안 돼 대통령으로 등극시킨 최대의 자산인 ‘공정과 상식, 법치주의의 상징’이라는 훈장을 스스로 떼어버린 셈이 됐다. 물론 제 살 도려내기, 춘풍추상은 고대 성현들의 고사에나 등장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국민은 윤석열만큼은 아무리 사소한 자기편 허물이라도 엄정하게 처리하리라 기대했다. 국민이 이 사건을 주목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사건 자체가 대단히 커서가 아니다. 반체제 세력의 저열한 함정에 걸려 벌어진 일이라는 점도 국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이 주시했던 것은 윤석열에게 표를 주면서 기대했던 ‘법과 정의, 상식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내로남불과 이중잣대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다가섰는지를 측량해 볼 잣대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사과하면 그때부터 2막이 시작돼 더 물고 늘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략적 마인드의 기본조차 결여된 주장이다. 평소엔 중도층과 지지층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결정하면서 왜 이럴 때는 오로지 극좌파만 염두에 두고 대책을 결정하나? 윤 대통령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넘어서지 못했다. 필자가 의견을 듣는 온건 보수층 중에는 국정 방향이 옳다고 여겨 여전히 지지하지만 그래도 예전 검찰총장 시절처럼 인간적 신뢰는 가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지지율의 등락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국민 마음속 신뢰자본의 약화다. 지지율은 사안이나 이벤트에 따라 등락을 거듭하지만 신뢰자본은 쉽게 복구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신뢰자본이 약화된 상태에서 만약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지율은 20%대에서 정체되고 내각이 말을 안 듣고 여당마저 대들 것이다. 경제 컨트롤도 어렵고 대외관계에서도 힘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설령 야당운이 좋아 총선 승리를 거둔다 해도 위에 열거한 악몽의 시나리오는 시간적으로 다소 유예될 뿐이다.따라서 이제부터 총선은 물론 집권 중후반기까지 내다보고 신뢰자본을 하나하나 다시 축적해 가야 한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리더십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공선사후와 자기희생, 경청과 공감이다.윤 대통령은 최근 민생토론회 등 민생 국정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민생토론회 행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는 실무진이 한다고 해도 대통령 스스로도 엄청난 양의 학습과 준비가 요구된다. 그런 열정과 성실성이 쌓여 가면 국민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당장의 신뢰자본 회복을 위한 경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가족 관련 문제는 법무부 등 해당 부처에 독립성을 보장해 맡기고, 재발방지책을 확실히 마련하는 것이다. 박성재 법무장관 후보자는 13일 명품백 사건에 대해 “검찰에서 원칙과 법에 따라 공정하게 수사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 발언이 실행되도록 독립성이 보장되면 신뢰는 조금씩 돌아올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실은 특별감찰관 임명 등 제도적 정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둘째, 공천과 총선 후 개각에서 더 이상 내 사람 챙기기는 없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국힘 공천은 일각에서 우려했던 ‘용산 천하론’을 기우로 돌린 채 청신호가 켜졌다.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강남 공천을 신청했던 이원모 전 비서관이 험지 출마로 발길을 돌리겠다고 한 것은 대통령실이 공천 독립성을 존중해주고 당도 균형감 있게 결정해 가고 있다는 시그널을 준다. 만약 또 다른 핵심 측근인 주진우 전 비서관도 본인이 신청한 해운대갑 대신 격전지로 뛰어들고, 해운대에는 윤 대통령이 부산 민생토론회에서 강조했듯 경제 과학기술 분야 인재가 전략 공천된다면 국힘 공천은 근래 여당 공천사에서 보기 드문 독립 공천으로 기록될 싹이 보인다. 당 장악 논란으로 훼손됐던 신뢰도 상당히 회복될 것이다.더 나아가 총선 뒤 있을 대규모 개각에서 ‘검사군단’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윤 정부 중반기는 전반기에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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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586 청산 성공을 위해선 ‘검사군단’ 차단해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일 신년회견은 예상대로였다. 상대를 공격할 때는 음모론적 논리를 철근 배근하듯 깐 뒤 그 위에 거대한 허구의 악마 조형물을 세웠고, 국민에게 사탕을 약속할 때는 천문학적 퍼주기를 서슴지 않는 포퓰리스트로서의 본모습을 보여줬다. 대선 직전 온건·실용주의 이미지 가면을 썼던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면 너무 익숙히 보아 온 장면이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기조 연설 도중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운 대목이 귀에 들어왔다.이 대표는 남북관계와 연평도, 휴전선 부근 주민들의 불안감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한밤 서울 동작대교에 12대의 장갑차와 무장병력이 등장해 놀란 시민들이 신고하고 많은 분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합니다. 수백만이 죽고 전 국토가 초토화된 6·25전쟁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38선에서 크고 작은 군사충돌이 누적된 결과였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논리였다. 6·25전쟁이 38선에서의 숱한 국지적 충돌이 누적돼 전면전으로 확전된 것이라는 주장은 80년대 대학가 좌파 운동권을 휩쓸던 논리였다. 당시 신입생들이 3월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의식화 과정을 밟으면서 처음 접하는 코스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주입이었다. 6·25가 남북간의 오랜 국지적 충돌과 갈등이 확전으로 이어진 내전이라는 논리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하에 일으킨 침략 전쟁’이라는 중고교시절 교육 내용을 뒤집으며 거센 파도처럼 신입생들의 역사관을 지배했다. 민족사 최대의 비극을 초래한 김일성의 죄과는 그런 논리로 희석됐다.하지만 상당수 학생들은 더 깊이 공부하고 더 많은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신입생 초기 머릿속을 점령했던 수정주의 좌파 이론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교묘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더구나 그후 소련이 붕괴된 뒤 스탈린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며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을 허락받고 준비했는지가 육하원칙하에 드러나면서 좌파 이론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다.그런데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이런 기막힌 역사인식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음을 이 대표의 연설에서 깨닫게 된다. 물론 이 대표가 6·25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기하려는 이념적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더더욱 이 발언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 일각의 세계관과 사고(思考)가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등 뒤 한쪽 끝에 존재하는 이념세력의 지속적 영향력하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2021년 여름에도 “미 점령군”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그런 이념 세력이 현실 권력과 연결되는 창구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윤미향 의원 주최 토론회에서 나온 “통일전쟁이 일어나 평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전쟁관도 수용해야 한다” “북의 전쟁관은 정의(正義)의 전쟁관” “교육 의료 주거는 남쪽은 경쟁, 북은 무상. 친일청산도 남쪽은 완전히 실패, 북쪽은 성공했다. 어디가 제대로 사는 것이냐”등의 발언들은 80년대 중반 밀실에서 횡행했던 망상 수준의 인식을 그대로 지닌 이들이 온존하고 있음을, 국회가 그들의 교두보로 악용될 수도 있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선거는 행정부와 국회라는 거대한 권력의 논에 어느 저수지의 물을 댈지를 정하는 일이다. 선거 때는 중도 온건을 강조하지만 막상 선거가 끝나면 수문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으로까지 활짝 열린다. 586 청산은 그런 점에서 절실하다. 단지 이념에 찌든 기득권 정치인 몇 명의 퇴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40여 년전 군부 독재라는 환경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시대착오적 역사관·세계관·이념의 덫을 벗어나 건전한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기 위해 거쳐야할 과정이다.하지만 극단적 이념 세력은 보수진영의 약점을 숙주로 삼아 극렬히 저항할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토양은 ‘김 여사 문제’와 ‘검사공화국’ 논란이다.물론 검찰독재, 검사공화국이라는 표현은 좌파진영이 만든 허구의 프레임이다. 검찰이 전 정권 비리나 야당 의원을 수사한다고 독재라 부르면 문재인 정권 전반기 2년이야말로 검찰독재 중의 검찰독재였다.‘검찰공화국’이라 비난하지만 현재 검사 출신 장관은 법무부가 유일하고, 장관급을 합쳐도 방통위원장 한 명이다. 그나마 민간 출신 위원장을 야당이 탄핵하려는 바람에 대체재로 임명된, 검사직 퇴임 10년이 지난 원로 법조인이다. 대통령실 비서관급 이상 중에서도 공직기강과 법률비서관뿐이다.하지만 정치판의 선전선동은 그런 객관적 팩트의 게임이 아니다. 이 대표가 신년회견에서 586 청산론에 대해 “지금 청산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검사독재”라고 되받아친 것도 그런 차원이다.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검사 출신 45명이 출마 예정이고 그중 여당은 31명이다. 숫자도 숫자지만 핵심 친윤 검사들이 텃밭 양지로 몰려드는 자체가 국민에게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원모 전 인사비서관은 강남 출마설이 돌고 있다. 그의 배우자는 지난해 대통령 부부의 스페인 방문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주진우 전 법률비사관은 해운대 출마 채비를 하고 있다.이들이 진정으로 대통령과 정권의 성공을 기원한다면 험지로 뛰어드는 게 옳은 길이지만, 그런 자세가 안 돼 있다면 해결은 한동훈 위원장의 몫이다. 만약 친윤 검사들이 대거 양지에 공천된다면 공관위가 아무리 노력해도 좌파의 ‘검찰공화국 비난 공세’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야당도 검사 출신 출마 예정자가 14명에 달한다. 그중엔 문 정권 때 노골적 시녀 노릇으로 검찰 독립을 욕보인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만약 그런 이들을 텃밭에 공천해준다면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공직자들이 정치적 중립은 팽개친 채 노골적으로 진영에만 충성한 뒤 금배지로 직행하는 악순환 시스템이 굳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당 공관위의 책임도 막중하다.대통령과 당 대표 모두 검사 출신인 상황에서 검찰독재 운운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스스로 통제하고 더 강한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검사군단 진주를 방치하면 운동권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마저 발목이 잡힐 수 있다. 검사군단 차단은 한 위원장이 ‘두 번 연속 검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넘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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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한동훈이 빠지기 쉬운 세 가지 착각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취임 첫 3주는 ‘기대했던 대로’와 ‘우려했던 대로’가 동시에 현실이 되어가는 시간들이었다. 세련되고 겸손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국힘 지지자들은 오랜만에 마음 줄 대상을 찾았다는 듯 열광했다. 동시에 우려했던 바도 점점 더 현실로 굳어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 골목 밖에서는 선명히 보이는데, 지지자의 환호로 가득찬 골목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다. 한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함정은 크게 세가지다.첫째는, 김건희 여사 문제를 이대로 뭉개고 가도 괜찮을 거라는 속삭임이다. 당장은 여론이 안 좋지만 곧 공천이 본격화하면서 온갖 뉴스가 쏟아지면 뒷전으로 묻힐 것이라는 기대다. 물론 착각이다. 대선 때 윤석열 후보를 찍었지만 대통령의 당 장악 시도, 김 여사 스캔들로 인해 한 발짝 물러선 중도층은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냉정히 지켜보고 있다. 일시적 관심이 아니다. ‘아바타론’의 진위를 판가름할 리트머스 시험지로 여긴다. 정권의 공정성에 대한 평가와 보수진영 미래 주자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저울이 되어 버린 것이다.설령 총선 결과가 여당에 나쁘지 않게 나오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야당은 대선까지 끌고 갈 것이다. 차기 정권을 어느 쪽이 차지하든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한 위원장의 책임도 있다. 검찰은 도이치모터스 사건과 관련해 김 여사를 기소하든 불기소 처분하든 진작 종결지었어야 하는데 질질 끌다 특검 빌미를 제공했다. 야당의 특검 공세는 이미 올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19개월 넘는 법무장관 재임 동안 한 장관도 방치했다. 명품백은 더더욱 간단해 김영란법에 따라 국민권익위가 며칠이면 조사를 끝낼 수 있는 사안이었다. 김영란법은 공직자 배우자가 금품을 받았을 경우 공여자는 ‘직무관련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되지만 받은 사람은 ‘직무관련성’이 있을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김 여사는 윤리적 책임만 지게 될 공산이 컸는데 무조건 피하다가 종양으로 키워버렸다.물론 야당이 밀어붙인 현행 특검법은 상식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악법이다. 그렇다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특검 선정은 대한변협 등 공신력 있는 외부기관 추천으로 하고, 수사 개시는 총선 직후에 하는 대안을 제시하면 된다.이렇게 명료한 해결책이 보이는데도 풀지 못하는 게 답답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고 한다. 김 여사의 심신이 스트레스에 워낙 취약한 상태여서 합리와 대의만 앞세워 밀어붙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해야 하고, 보수의 명운을 책임진 여당 대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설득해야 한다.한 위원장은 비상 상황을 타개하라고 영입된 지휘관이다. 국회의원 숫자 감축, 특권 폐지 등은 멋진 안타지만 그런 안타만으로 소임을 다하는 게 아니다. 여당의 비상 상황은 무엇인가. 바로 대통령의 저조한 지지율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불통 이미지 리더십이고, 둘째는 부인 문제로 인해 상식과 공정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흔들린 탓이다.자기 편은 무조건 감싸고 돌았던 좌파권력과는 역시 다르다고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해야한다. 보수 전체가 피해를 떠안지 않게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한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두 번째 함정은 투쟁 선봉장 이미지의 효용성이다. 취임사에서 586 청산을 강조했는데 옳은 방향이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집권당 대표의 주된 메시지일 수는 없다.정치 지도자로서의 우선 역할은 비전 제시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도전, 과제를 말하면서 그 일환으로 수구 얼치기 좌파세력 청산이 제시됐어야 한다. 투쟁하러 나온 싸움닭 이미지로 자신을 가둬선 안 된다.그제 마감한 전국 순방도 마찬가지다. 지역 비전 제시보다는 야구팬, 학교 다닌 기억 등 사적 인연을 강조했는데 집권당의 다크호스에 대한 기대에 비해 진부한 행태다. 집권 보수당의 횃불을 들고 나왔으면 거기에 걸맞는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그 목표를 향해 함께 가자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한 위원장이 경계해야 할 세 번째 함정은 정치인으로서의 태생적 약점을 수사(修辭)나 제스처만으로 만회하려는 안이함의 늪이다. 타워팰리스에 살고 명문대 학벌, 검찰 고위직 출신 장인과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아내를 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정치 풍토에선 일정한 핸디캡이 될 수 있다. 머잖아 야당과 좌파는 그를 강남 특권층으로 몰면서 재산을 시비 걸고 처남 문제까지 따지고 들 것이다. 공작과 가짜뉴스 인신비방을 평생 업으로 삼아온 이들이다.한 위원장은 “서민과 약자의 편”을 강조해 왔는데, 말로 그친다면 위선으로 들릴 소지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입만 열면 약자 서민을 외쳤던 조국 전 장관을 비롯해 강남 좌파 민주당 인사들의 위선에 진저리를 쳤던 국민들이다. 삐딱한 시선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은 진정성과 일관성 지속성이다. 검사 이미지도 쉽게 벗기 힘든 굴레다. 누구나 ‘우리 국민이 두 번 연속 검사 대통령을 뽑을까’라고 자문해 볼 것이다. 한 위원장 스스로도 그럴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상대에 대한 추궁과 결과물에 대한 심판보다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생산력, 창의력, 설득과 공감 능력이 검사 출신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공천 결과가 ‘역시 검사 출신’ 낙인이 찍힐지, ‘정말 다르네’가 될지 갈림길이 될 것이다.박수와 환호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눈앞의 구름 인파만 보고 박수 소리만 듣다가는 골목 입구에서 팔짱낀 채 냉정히 지켜보는, 구름 인파보다 몇백 몇천 배 많은 대중의 존재를 잊기 십상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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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민주화 성취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허구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그것은 진보·좌파·야당이 민주화의 주역이었으며 적자(嫡子)라는 프레임이다. 여기에 여당에서도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 ‘서울의봄’ 같은 5공화국 소재 영화가 나오면 움츠러든 채 “민주화는 산업화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는 게 전부다. 민주화의 대주주는 당신들이라고 접어주고 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온당한 일인가.우리 사회에서 반(反)독재 민주화 투쟁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10여 년에 걸쳐 진행됐다. 물론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민족 통일 양성평등 등 다양한 주제의 투쟁이 민주화 슬로건을 내걸고 펼쳐졌지만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 투쟁은 87년까지였고, 절대적 기준에서의 독재정권은 6·29선언으로 종식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사회는 절대적 선악이 대립했던 시기에서 상대적이고 진영에 따라 선악이 구분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그러므로 우리 사회 민주화 성취의 대(大)주주는 70년대 중후반 대학 캠퍼스에서, 79년 부산 마산 등에서, 80년 5월 광주에서, 80~87년 대학과 도심에서 민주주의와 독재 타도를 외친 학생과 시민들이다. 이들은 1950년대 중반~1968년 출생이며, 대학 입학 학번으로는 70년대 중반 학번에서 87학번까지가 주를 이룬다. 유신 철폐 투쟁을 벌였던 젊은이들은 이제 60대 중후반~70대, 6월항쟁 때 도심을 메운 대학생들은 56세~60대 초중반, 넥타이 부대 직장인들은 60, 70대의 장년기 후반과 노년층이 됐다. 즉 현재 50대 후반부터 60대, 70대 이상 시민들이 군사독재 종식의 주역인 것이다. 이들이 현재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지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 통계는 이 연령대 시민 중에 문재인 정권 당시 정책 방향에 우려하고, 조국 장관과 586 정치인들의 후안무치 행태에 분노했던 사람들이 다수였음을 보여준다.문 전 대통령, 이재명 대표를 필두로 상당수 야당 정치인들이 ‘서울의봄’을 관람하고 자신들이 민주화의 적통(嫡統)을 잇는 세력이라는 뉘앙스를 담은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민주화 성취의 주역 중에는 현재 좌파 진영 정치인들을 민주화의 적통으로 인정하기는커녕, 그들의 행태를 보며 독재정권에 분노했던 젊은 시절의 그 정의감과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는 심정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민주화 성취의 두 번째 주주인 정치권을 보자.양대 기둥이었던 YS와 DJ 진영의 후예들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으로 나뉘어 포진해 있으니 민주화 지분은 여야가 반반씩 나눠 갖고 있다. 보수진영은 1990년 3당 합당의 굴레를 썼지만, 5공 인물들은 민자당 시절 재산공개 등의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 도태돼 오래전부터 국힘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세 번째 주주는 학생운동 지도부다. 지금 민주당 의원 중 운동권 출신이 60명이 넘는데 그들중 80년대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 등 지도부급 대열에 섰던 인물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게다가 당시 학생운동의 실제 지도부는 반미청년회 구국학생연맹 등 지하조직이었다.그런데 구국학생연맹 의장으로 NL(민족해방)계의 총책이었던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을 비롯해 당시 핵심 인물들 중 상당수는 좌파에 대한 비판자로 변신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실질적 리더 중 상당수가 좌파를 등진 것이다. 그런데도 전체 민주화 성취 공훈에서 일부분에 해당하는 야당 소속 586 정치인들이 자신들이 민주화의 최대 주주인 것처럼 행세하고, 하물며 80년대 민주화 투쟁기에는 아무런 족적이 없는 이재명 추미애 같은 이들마저 남의 집 안방 주인 행세처럼 숟가락을 놓는 게 현실이다.이들이 12·12를 소재로 한 영화를 놓고 퍼뜨리는 주장의 요점은 하나회 군부의 쿠데타와 윤석열 검찰의 조국 장관 수사를 동일 선상에 놓아 ‘검찰 쿠데타’로 낙인찍는 것이다. 물론 이는 흑과 백, 도둑과 피해자를 뒤바꾸는 선동이다. 79년 12월의 충돌이 헌법을 유린한 불의(不義)한 쿠데타 세력과 이에 맞서 직분을 지키려한 군인들과의 대결이었다면, 문 정권 때 헌법이 규정한 사법기관의 직분 수행을 억눌러 정권 핵심의 비리를 덮으려던 불의 세력은 바로 청와대와 추미애 등이었다. 하나회 군부가 동원한 수단이 탱크와 압도적 병력이었다면, 문 정권이 동원한 무기는 인사권과 홍위병 나팔수들이었다. 군사 쿠데타가 헌법을 유린하는 반국가 행위이듯이, 정권이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국가 사법기관에 압력을 행사해 수사를 못하게 하는 것 역시 반국가적 행위다. 586이라는 용어는 변질됐다. 원래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모래시계 세대’ 등의 표현과 더불어 격동의 80년대를 거쳐온 세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는데, ‘운동권 생활과 정치권이 인생 경력의 전부인 좌파 정치인’을 뜻하는 협소한 용어로 시나브로 변질됐다.따라서 민주화 성취의 진짜 주역인 80년대 당시의 젊은이들은 ‘6월 항쟁 세대’라 부르는 게 맞다. 이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 민주화 시위 참여를 거쳐 기업 관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경제의 선진화 일류화에 중추 역할을 했다. 민주화의 대주주인 동시에 선진국 도약의 허리였던 것이다. 이들 세대 중에는 젊은 시절 전두환 군부에 분노했듯이 근래 좌파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다. 그 이유는 정치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낡은 이념을 벗지 못한 채 민주화에 친북 친중 반시장 반기업을 덧씌워버린 이념적 화석화, 운동권 경력을 훈장 삼아 수십 년간 특권을 향유하는 도덕성 결핍, 자신과 경쟁하는 정파를 악으로 몰아붙이는 오만과 유아독존의 낡은 사고방식이 분노를 유발한 것이다. 586의 뻔뻔함, 그리고 그들의 견강부회 앞에서 찍소리 못하는 여당 인사들을 바라보며 민주화의 진짜 주역들은 기가 막힐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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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특검 정면 돌파해야 윤석열도 살고 한동훈도 산다

    보수 진영 지지자들에게 ‘한동훈 비대위원장 카드’는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 요인도 큰 선택이다. 한동훈 장관의 장점에 대해선 이미 수없이 얘기가 나왔으니 생략하고 여기서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리스크를 살펴보자.총선은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이므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 요인의 볼륨을 최대한 낮추는 쪽으로 몰고 가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요인은 첫째는 리더십 스타일, 둘째는 검찰 편중 인사, 셋째는 배우자 문제인데 한동훈 체제는 여기에 확성기 효과를 낼 수 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 모두 검사 출신이라는 점은 총선을 검찰정권 심판으로 몰아가려는 좌파들에겐 좋은 먹잇감이다.한동훈은 비리 좌파 집단에 맞서는 이미지로서 주가가 상승해 왔다. 맞은편에 ‘중대 범죄혐의자 이재명’이라는 어둠이 있어 더 빛이 날 수 있었는데 만약 총선 직전 이 대표가 2선으로 물러나고 경제 민생 안보, 그리고 김 여사 문제가 주된 이슈가 되어 버리면 한동훈의 강점도 빛이 바랠 수 있다.그런 리스크를 알면서도 상당수 보수층이 모험을 해도 좋다고 기대할 만큼 한동훈은 똑부러지고 스마트한 새로운 스타일의 보수지도자로 성장할 잠재력을 보여 왔다. 보수 지지자들은 무엇보다도 여당의 판을 흔들어줄 누군가를 고대했다. 2021년 봄 국민의힘이 확 바뀌어야만 정권교체의 희망이 생긴다는 염원에서 이준석을 선택한 ‘집단적 열망’과 마찬가지로 지금 보수층은 여당이 혁명적으로 바뀌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지금 국힘 비대위원장 앞에 놓인 과제들, 즉 △김건희 특검 △대통령과 당의 수평적 리더십 회복 △공천권 독립 등은 대통령의 호응 없이는 풀기 어려운 것들이다. 특히 특검은 앞으로 블랙홀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총선 후 특검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큰 한 장관의 19일 특검 관련 발언은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우선 내용면에서 의미가 있다. 민주당 특검법안의 터무니없는 악법 조항들을 수정하고, 선거에 악용되지 않도록 수사 개시 시점을 총선 직후로 하자는 게 ‘총선 후 특검론’의 골자다. 양극단이 맞붙는 사안들에 공정하고 현명한 중재안을 제시해 주는 현인그룹·원로그룹이 만약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면 그들도 아마 비슷한 안을 내놓을 것이다.야당이 이를 거부한다면 특검법의 의도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게 아니라 오로지 비열한 정략적 목적이었음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대통령 측도 “문재인 검찰이 탈탈 털었어도 나온 게 없는 사안”이라고만 주장할 게 아니라 국민이 그 무고(無辜)함을 믿게 만드는 절차적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한 장관 발언에 상당히 불쾌해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미 다 문제없는걸로 판명난 일인데 왜 특검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여지를 두느냐는 것이다.이제 한 장관이 매우 중요한 시험대에 서게 됐다. 대통령의 거부 의사가 완강하다 해서 발언을 주워 담는 식으로 후퇴할 경우, 그의 정치적 미래는 시작부터 휘청이게 된다. 좌파의 ‘아바타론’은 더욱 거세질 것이고, ‘혹시나’ 했던 중도층도 ‘역시나’ 할 것이다. 대통령이 끝끝내 배우자를 감싸고, 공천에 대통령이나 배우자의 입김이 미친다는 잡음이 나올 경우 국힘은 거대한 족쇄를 찬 채 전장에 나설 수밖에 없다. 선거 결과는 더 참혹해지고 정치인 한동훈의 미래도 함께 마감될 수 있다.윤 대통령도 살고 한동훈 비대위도 살 수 있는 길은 특검 정면 돌파다. 물론 대통령은 고개를 흔들 것이다. 그런 대통령을 설득해 ‘총선 후 특검론’을 관철하는 게 정치 능력이고 정치 기술이다. 특별감찰관 임명도 설득시켜야 한다. 대통령이나 김 여사가 불쾌해하거나 압력이 들어와도 밀고 가는 뚝심을 보여야 한다. 이 문제를 못 풀면 정치를 그만둘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럴 자신과 의지가 없다면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게 좋다. 대통령실이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이 한 장관을 비대위원장에 세웠다고 보려 한다. 그 손의 이미지를 끊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좌파의 아바타 공세를 벗어날 수 없다.물론 열쇠는 대통령이 쥐고 있다. 김 여사 문제를 못 푼 채로는 윤 정권은 임기 내내 목줄 끌려다니듯 시달리게 된다. 꼼수로는 극복할 수 없다.특검 결과 무고함이 만천하에 입증되면 날개를 달게 된다. 설령 야당이 뭔가를 꼬투리 잡아 구속시키려 한다고 가정하자. “너무 하는거 아냐”라는 동정여론이 불길처럼 번질 것이다. 정치는 동정받는 쪽이 항상 이긴다.한 장관은 당초 비대위원장 자리를 맡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노동 분야 쪽 일이나 비례대표를 내심 희망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법조계 출신 원로가 찾아가 설득하는 등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한동훈이라는 보수의 재목을 설득해 이렇게 일찍 차출했을 때는 그 인기만 빌려 쓰겠다는 발상이어선 안 된다. 성공 스토리를 연출해 주는 게 의무다. 그럴 의향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한동훈 카드를 접는 게 옳다. 귀한 재목을 불쏘시개처럼 쓰고 버려선 안 된다.한동훈은 모든 능력을 동원해 대통령을 설득하고 윤 대통령은 “나를 밟고 가라”는 심정으로 결단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바뀌고 당정관계가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와야 정권도 살고 한동훈도 산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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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이 나라 보수는 ‘김건희 리스크’를 더 이상 안고 갈 수 없다

    ‘분노와 한숨.’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이 요즘 정치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편의 행태를 보면 분노가 치밀고, 자기편을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인 것. 그 분노라는 단어를 며칠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썼다. 12·12쿠데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나서 “불의한 세력에 대한 분노”라고 했다.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을 겨냥해 했으면 딱 맞을 말이다. 44년 전 쿠데타라는 불의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았듯, 2023년 현재 다수당의 폭주라는 불의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네 진영을 수사하는 검사를 탄핵하고, 자기네 진영 나팔수 역할을 해주는 공영방송들을 총선 때까지 계속 자기편으로 두기 위해 방통위원장을 탄핵 도마에 올린다. 5공 시절 집권당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는 안 했다. 아무리 총칼로 집권했어도 국민 다수의 상식의 눈을 두려워하는 최소한의 센서는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당엔 그 수준의 자기 절제 센서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다수결이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들은 그런 다수당을 보며 분노가 치밀지만 고개를 돌려 대통령실과 여당을 보면 참담한 실망감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대통령 부인이 명품백을 받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김의겸의 청담동 술자리 주장 같은 가짜뉴스거나, AI 딥페이크 영상이겠거니 했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현직 퍼스트레이디가 친(親)적국(敵國) 활동 경력이 있는 인사를 만나 보석을 선물 받는데 이게 다 함정 몰카에 찍힌다~.’ 만약 필자가 영화제작자인데 그런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너무 작위적이고 현실성 없는 설정이라며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이번 사건이 보여준 상상 초월의 세계는 세 종류다. 하나는 상상 초월의 저질스러운 공작 행태고, 둘째는 상상 초월의 허접한 사람 관리 및 경호 시스템이고, 셋째는 대통령 부인이 보여준 상상 초월의 행동이다. 이 세 요소는 서로의 상상 초월성을 상쇄하지 않는다. 김 여사가 백을 받았든 안 받았든 몰카 공작의 저열함과 비도덕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함정 몰카라해서 김 여사 행동의 비도덕성이 감면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원 벤치 두 개에 각각 100만 원 씩의 현금이 놓여 있다고 하자. 첫 번째 벤치 현금은 누군가 실수로 두고 간 것이고, 두 번째 벤치 현금은 함정 몰카범이 쳐놓은 덫이다. 그 돈을 누가 집어가든, 아무도 집어가지 않든 덫을 놓은 몰카 행위의 부도덕성이 바뀌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돈을 집어 갔다면 그것이 첫 번째 벤치 돈이든 두 번째 벤치 것이든 그 행동에 대한 비판은 똑같이 적용된다. 현금이 놓인 경위와는 무관한 것이다.함정 몰카 주동자들에 대해선 엄정한 법적용과 사회적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 다시는 미디어의 탈을 쓴 이런 저질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단죄가 필요하다. 이 사건은 좌파 진영의 공작과 농간이 얼마나 간교하고 저열한 수준으로 치달았는지를 보여준다. 문 정권 시절 대통령 부인의 나홀로 해외방문, 의상 다량 구입 등 사치와 월권이 극에 달했지만 우파 진영 누구도 이런 식의 함정 공작을 꿈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좌파의 비도덕성에 대한 개탄과 김 여사의 행동에 대한 비판은 별개의 문제다. 하급직 공무원의 배우자라 해도 그런 선물은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누구나 유혹은 느끼기 마련이지만 최소한의 위험 감지 능력이 생존 본능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김 여사는 하루빨리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관저를 떠나 서초동 자택 등 사가(私家)로 거처를 옮겨 근신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부부는 사적인 영역이다. 그럼에도 대통령 배우자는 공인이다. 더구나 ‘김건희 리스크’는 총선과 나라의 진로에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이번 사건은 특검을 앞세운 야당 공세에 휘발유를 뿌린 격이 될 것이다. 공천 개입설, 인사 개입설 등 믿거나 말거나 의혹을 계속 기름 붓듯 쏟아낼 것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김 여사는 의혹의 소지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위치를 자처하고, 윤 대통령은 특별감찰관을 조속히 임명해 확고한 의지를 피력해야 한다. 특검 공세에 대응할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도 명품백 파문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대선 4개월 반 전 김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악의적 편집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취임 4개월이 지난 시점인 영상 속 모습은 약속과는 달라 보인다. 물론 김 여사에 대한 좌파 진영의 공격에는 마녀사냥, 여성 비하, 공작적 요소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이 제기했던 의혹들 중 사실로 최종 확인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건은 다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서도 그렇다. 쉬쉬하고 넘어간다면 앞으로 전국의 공직자 배우자들에게 어떻게 김영란법 준수를 요구할 수 있겠나. 국민권익위는 왜 존재하는 기관인가. 신속히 진상 조사에 착수해 금품을 준 쪽과 김 여사 쪽 모두의 법 위반 여부를 엄정히 조사하는 것이 직분 아닌가. 이번 파문은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한 표 한 표 벽돌을 쌓듯이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에게 배신의 상처를 안겼다. 진심 어린 사과와 근신의 자세, 배우자 논란의 소지를 원천차단할 안전장치 마련 없이는 이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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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서울에서 이길 비법

    개혁은 타이밍인데, 강서 보선 참패 한 달 반이 되도록 국민의힘 혁신은 지지부진하다.도대체 왜 저럴까. 인요한 혁신위에는 이른바 ‘윤심’이 실리지 않은걸까. 필자가 취재해본 결과, 현재 국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형적인 당내 기득권 세력의 저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요한의 혁신 요구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기존 체제 핵심들은 이런 논리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속고 있다. 김한길(국민통합위원장)이 인요한을 앞세워 김기현을 내쫓고 당을 접수해서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면서 “소는 누가 키우나” 논리를 퍼뜨렸다. 물론 턱도 없는 논리다. ‘검사 내리꽂기’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여당 텃밭들은 새로운 얼굴이 나서도 뺏길 가능성은 크지 않다.결국 “소는 누가” 주장 속에는 “우리를 내쫓으면 누가 대통령을 보호해 주겠느냐‘는 반(半)협박이 은밀히 숨겨져 있다. 집권 중후반기 레임덕을 최소화하려면 오히려 윤핵관을 늘리고 힘을 키워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이 잘못해 지지도가 떨어진 건데 왜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나’ ‘야당은 김건희 특검을 밀어붙이는데 결속을 다져도 모자랄 판에 내부총질이나 해서 되겠느냐’ 식의 주장까지 은밀히 퍼뜨린다. 간특한 논리다. 개국공신이라고 거들먹대던 자들이 새 왕조의 개혁으로 토사구팽 위기에 처하자 반발하며 모든 걸 권력 암투극으로 색칠하는 진부한 사극장면이 연상된다. 물론 쇄신 대상 중진의 개념정의는 보다 정교해져야하며, 지역구 특성을 가리지 않고 다선이라고 무조건 내모는 식의 개혁은 안된다.하지만 대선 보선 승리로 순풍에 돛을 올렸던 새 정권의 지지도를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게 만든 핵심 책임자들이 권력을 더 누리겠다며 반발하는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다. 희대의 당 대표 경선 막장드라마를 주도하고 달콤한 과실을 따먹었으면 이제 정권이 처한 위기와 지지층 여망을 저버린 책임을 조금이라도 느껴야 마땅하지 않은가.해법은 간단하다. 대통령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김기현 체제와 윤핵관 세력은 윤 대통령이 만든 건축물이다. 직접 부수고 재건축해야 한다. 인요한에게 힘을 실어줬던 대통령이 좌고우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혁신이 주춤하는 현 국면이 장기화되어선 안 된다. 물론 실행 방법에서는 고단수의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내몰 듯 하지 말고, 대통령이 직접 “좀 참고 도와달라. 이번엔 귀하가 희생해달라”고 하면 더 이상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한 윤핵관 핵심인사는 “대통령이 희생해달라고 하면 나는 백프로 희생한다, 하지만 바람에 밀려 강제로 날아가는 모양새로는 죽어도 못나간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여권 전체를 재건축한다는 대의에 동참해 자기 방을 비워주는 모양새를 갖춰줘야 한다. 그러고는 전선(戰線)을 국회 개혁으로 집중해야 한다. 이번 총선은 여든 야든 국회 개혁을 진정성 있게 결심하고 실천 의지를 보이는 쪽이 승리한다.최악의 21대 국회를 겪은 국민은 진저리를 치면서 묻고 있다. 지난 3년 7개월간 국회는 뭘 했는가. 헌정 이래 지금까지 범죄 혐의자 한 사람을 방탄하려고 국회가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한 전례가 있었는가. 180석을 몰아줬더니 건국 이래 존중돼온, 심지어 군사독재하에서도 이어져온 민주공화정의 최소한의 상식 전통 관례마저 다 무시되고 짓밟히지 않았는가….그냥 우리를 찍어달라가 아니라 정말로 완전히 다른 국회를 만들 청사진과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의원수를 대폭 줄이고, 세비를 반으로 줄이고, 180가지에 달하는 의원 특권을 모두 폐지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전국을 7개든 8개든 권역으로 나눠 전국 순회 국회개혁 토론회를 열어 분출되는 국민의 소리를 집대성해 공약으로 내걸고 이걸 실천할 수 있게 표를 달라고 해보라. 그리고 누구를 모셔 오느냐에 집중해야 한다. 어떤 인재를 데려와야할지 기준은 아주 간단 명확하다. 서울에서 이기고 싶으면 서울의 특징을 보면 된다. 첫째 젊은층이 많고, 둘째 중도층이 많으며, 셋째 고학력층이 많다.서울의 고학력 젊은 중도층 유권자 앞에 ‘낡은 좌파이념에 찌든 운동권 출신 vs 미래를 얘기하는 프레시한 테크노크라트’를 제시하면 누굴 택하겠는가.‘죽창가 반일 반미를 외치는 우물안 개구리 vs 세계를 무대로 경험을 쌓고 젊은이들의 미래 먹거리인 인공지능(AI) 우주항공 분야에서 성과를 거둬 온 과학기술인’을 제시하면 누굴 택하겠는가. 연예인 등 유명인사 깜짝 영입은 하루치 효과 일뿐이다. 얼굴은 생소해도 이력을 보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념에 찌든 머리로는 감히 엄두 낼 수 없는 실용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인재들로 쫙 깔아야 한다.서울 참패의 길도 선명히 보인다. 민주당이 86세력이나 그 후배 한총련 등 이념운동권 세력에게 공천 특혜를 주면 패배를 자초하는 길이 된다. 마찬가지로 여당이 검사 출신, 대통령실 출신에게 공천 특혜를 준다면 참패행 고속열차 티켓이 될 것이다.MBC YTN 등 문재인 정권 때 발탁된 인사들이 경영권을 쥐고 있는 방송사 간부진과 좌파 인터넷 유사 언론들은 여당이 총선에 이기면 자신들의 운명이 곤두박질친다는 절박감을 갖고 생사를 건 진영방송에 나설 것이다.좌파 진영에선 벌써부터 ‘여사 측 비례대표 리스트’ 등의 루머를 퍼뜨리고 있다. 대통령비서실장 가족 등 정권 핵심 주변을 노린 사냥도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여당 공천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이름이 한두 명이라도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여사 공천 개입’ 같은 필승 프레임을 짜 만들기 위해서다.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공천의 독립성 공정성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윤 대통령이 공천 독립성 보장을 분명히 못박아 메시지 오독(誤讀) 소지를 차단해야 한다. 그러면서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참된 사람을 찾아다닌 디오게네스처럼 인재를 찾아 나서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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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인사 하는 거 보니 尹 정말 달라졌다”는 말 나오게 해야

    강서구 보선 패배 후 한 달, 반성과 민생을 화두로 한 윤석열 대통령의 변신 행보가 이어지면서 지지율도 다소 회복세다. 제3지대와 신당 등 이합집산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모두 측근 내리꽂기 공천 같은 ‘자폭성 대형 사고(事故)’ 없이 무난한 공천을 할 경우 내년 4월 총선 판세는 어떻게 될까. 선거 전문가들은 비례대표를 합쳐 국힘 100~120석, 민주당 130~140석, 제3지대와 신당 등이 30석 안팎을 차지할 가능성을 점친다. 민주당이 원내 1당이지만 과반이 안되고, 제3지대가 반(反) 민주당 성향이 강하므로 독주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 여당으로선 그나마 선방으로 여겨야할 것이라는 해석이 덧붙여진다.물론 보수진영 유권자들은 이런 전망을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나라 재정을 거덜 내고 온갖 부도덕과 위선으로 점철된 문재인 5년을 보냈고, 현재의 민주당은 DJ 노무현 시절과 비교도 안되는 최하 수준인데 어떻게 계속 1당이 될 수 있다는 건가….”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선거 전문가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국민(특히 중도성향 무당파)은 좌파의 부도덕과 부당한 점을 다 알고 분노하지만 그 대안으로 택한 우파 정권 역시 처가 문제, 인사 논란 등으로 실망시키는 바람에 분노의 경감 효과가 발생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비교 자체가 안될만큼 ‘죄질’이 다르지만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수준의, 정의와 공정함의 회복을 기대했는데 그런 기대가 깨지면서 비교우위가 무의미해졌다는 것.둘째, 수도권 등에 거주하는 호남 출신 유권자의 단결력이 타 지역 출신 보다 훨씬 강하다. 셋째, 임기 중반 총선은 중간평가 성격이 강한데 지금처럼 경제가 안 좋을 경우 실제 책임소재가 전임 정권이든 세계상황이든 관계없이 집권당의 무덤이 될 가능성이 크다. 넷째, 민노총 전교조 등 좌파 진영의 조직력과 이권 네트워크가 워낙 방대하고 견고하다. 다섯째, 문 정권 5년간 상당수 국민이 알게 모르게 포퓰리즘에 입맛이 들어버렸다.보수에겐 암울한 진단이지만 이게 우리 수준이고 현실이다. 물론 정치는 생물이다. 지난 총선을 뒤덮은 코로나 같은 대형 산사태가 아니어도 판세를 바꿀 변수는 숱하게 잠재해 있다. 누가 더 절박하게 뛰고, 더 외연을 확장하느냐에 따라 수십 석이 바뀐다.이재명 민주당으로선 대승의 첩경이 선명히 보인다. 비명을 완전히 포용하고, 특권 포기에 앞장서며 실용주의 노선에 집중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당이 텃밭에 검사와 대통령 측근들을 대거 꽂아주면 과반수 차지는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이 불리한 판세를 극복할 첩경도 보인다. 반성·겸손 모드를 더 진정성 있게 이어가는 동시에 인사 스타일을 확 바꾸는 것이다. 저조한 지지율을 벗어나지 못하는 양대 이유는 오만·불통 이미지와 인사 논란이었는데, 이미지는 바꾸려 노력 중이고 인사 스타일도 바꿀 기회가 자연스레 다가오고 있다.총선 출마로 수석 6자리 중 5자리의 개편 요인이 있으며, 내각도 기재부 국토부 보훈부 장관 등의 출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윤석열 인사’를 비판할 때 흔히 검찰 출신 중용을 비난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문제는 편한 사람 위주의 인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관료 출신이 대거 중용됐다. 그 결과 대통령실에서 쓴소리가 사라지고 정무 기능도 거의 마비됐다.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정치 경험 부족을 보완해주고, 정권과 나라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며 정치적 조언을 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경제관료 출신 실장에게선 기대하기 어려웠다. 김대기 실장이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 민심을 파악하고 가감 없이 전달했다면 지지율 30%대라는 참담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김 실장이 정권 성공과 총선 승리를 위한 그랜드 전략, 실행력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정무수석이라도 여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중량급 있는 인물이 맡아 대통령을 대리해 밤에는 야당 중진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낮에는 여당 의원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교류했어야 하는데 이진복 수석은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였다는 평가가 많다.내각의 인선 풀도 넓어져야 한다. 1년 반을 돌아보면 누가 성과를 냈는지 보인다. 국토 법무 외교 보훈부 등 그나마 두드러졌던 장관들은 다들 성취에 대한 욕심이 크면서도 정치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다.세계는 빛의 속도로 변하고 기업 등 민간 부문 곳곳에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해 있다. 온건 진보·중도성향의 야권 정치인과 인재들도 적극 발탁해야 한다. 링컨의 포용적 리더십처럼 ‘팀 오브 라이벌(Team of Rivals)’을 꾸리는 것이다.정권 출범 당시의 측근중용은 정당 밖에서 입성한 신흥 권력그룹의 한계 때문인 면도 있었다. 여권 인력 풀에서 믿고 쓸 사람을 쉽게 찾지 못하다보니 충성심과 업무능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들에 의존하다 쏠림 비난을 자초한 것이다. 그러고도 6월 지방선거에서 압승하니 지나친 자신감에 빠졌다.사실 2021년 전당대회에서 이준석의 당선도, 서울시장 보선에서 오세훈의 압승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국힘의 승리도, 개별 정치인의 매력이 낳은 산물이 전혀 아니었다. 연이은 승리들은 좌파정권 종식에 대한 국민의 간절한 열망이 낳은 것이었고 정치인들은 운좋게 그 열망의 파도에 올라탄 서퍼(surfer)에 불과했다. YS DJ처럼 오랜 세월 몸 바쳐 쌓아온 자기만의 정치 자본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파도를 몰고 온 주역이라고 착각하면 곧 정치 예금통장이 마이너스가 된다. 다행히 윤 대통령은 올바른 변신 모드로 접어들었는데 그 변신 프로젝트는 인사 혁신 없이는 완성되기 어렵다.이재명 대표는 속으로 아무리 싫어도 비명을 끌어안고 가려 할 것이다. 총선 승리에 생존이 달렸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과 국힘은 그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 누가 더 절박하느냐에 승패가, 나라의 미래가 달렸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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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바꾼다더니 격화소양… 김기현 퇴진이 혁신 출발이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처한 곤경의 원인은 명확하다. 증상이 본격 목격되기 시작한 것은 6·1 지방선거 압승 일주일 뒤인 지난해 6월 둘째주부터였다. 6월 7일 윤 대통령은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검찰출신 중용에 대한 질문에 “과거에는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하지 않았느냐”며 발끈했다. 다음 날 정진석 의원(당시 국회부의장)은 느닷없이 이준석 대표를 공격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중도층과 온건보수의 마음을 떠나게 만든 양대 원인인 △윤 대통령의 오만·불통 이미지와 △여당의 사당화(私黨化)논란 신호탄들이 하루간격으로 발사된 것이다.윤 대통령 지지율은 직전까지만 해도 상승세로 6월 7~9일 조사 때 53%(한국갤럽)로 고점을 찍었다. 그러나 14~16일 조사에서 49%로 하강세에 들어선 지지율은 “전 정권 장관 중 훌륭한 사람 봤느냐”는 식의 태도가 이어지고, 이준석 축출 과정의 이전투구를 거쳐 경선 룰을 편의대로 바꿔버리고 나경원 안철수를 짓누르는 전무후무한 전당대회 추태를 연출하면서 30%대로 고착됐다.증상과 원인이 명확하니 처방도 명확하다. 처방은 두 축이다. 하나는 대통령이 리더십 스타일을 경청 공감 소통으로 바꾸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통령과 당 관계의 정상화다. 첫째 처방은 실행에 들어갔다. “국민은 무조건 옳다” “민생 속으로 들어가자”는 대통령의 잇따른 발언 배경을 들어보니 대통령이 민의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진단들이 전해졌다. 두 번째 처방도 혁신위 출범으로 나름 실행 준비에 들어간 듯 보인다.그런데 국민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필자는 칼럼을 준비하면서 지인들의 의견을 자주 청해 듣는다. 우리 사회 이념 스펙트럼을 극좌1~극우10으로 놓고 펼쳐볼 때 5~8 사이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최근 며칠간 통화해 보니 놀랍게도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한마디로 격화소양(隔靴搔癢)이라는 것이다. 구두 위로 긁는 시늉만 내는데 어느 국민이 감동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독립을 염원하는 식민 치하 백성들처럼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윤 후보에 투표했고 지금도 윤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다.그들이 지적한 핵심은 김기현 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걸 누가 진정한 변화 의지로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 김기현이라는 개인에 대한 호감 비호감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 대표가 즉각 물러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첫째,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중심제에선 모든 게 궁극적으로 대통령 책임이지만 대통령은 수시로 진퇴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내각의 잘못은 총리가, 당의 문제는 대표가 책임져야 한다. 구청장 선거라는 일개 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라는 게 아니라 거기서 재확인된 땅에 떨어진 여당의 위상과 중도층 이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개혁의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대통령 직할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된 김 대표가 있는 한 아무리 혁신위가 개혁안을 내놓아도 당정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길 국민은 많지 않다. 인요한 혁신위원장 카드는 일단 관심 끄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누가 위원장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에게 얼마만큼의 권한이 위임됐는지를 모두가 알게 공개되어야 그 사람에게 힘이 실린다는 걸 국민도 다 안다.셋째, 대통령의 운신 폭을 위한 김 대표의 선제적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윤 대통령으로선 직접 창출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표를 내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되며, 인간적으로도 강제로 내치기 어려운 처지다. 설령 실제론 당과 대통령실의 관계가 외부에 비쳐지는 것과 다르다 해도 국민의 눈에는 이미 시작부터 그런 이미지가 고착화됐다. 김 대표가 아무리 유능해도 그 태생적 한계를 돌이킬 수 없다. 여권에겐 험난한 길이 예고돼 있다. 세계정세와 국내외 경제상황을 볼 때 내년 총선까지 경제가 좋아질 전망은 거의 없다. 문재인 정권이 남기고 간 오물은 그 누가 와도 치우기 어려운 지경이다.핵심 지지층은 “이재명 하나 못 잡아넣고 문재인은 손도 못 댄다”고 실망하고, 야당은 구속영장 기각이라는 본질과 무관한 절차적 결정 하나를 등에 업고 활개를 친다. 이재명 대표 측의 노골적인 재판 지연 행각은 어떤 죄든 선거만 이기면 다 뒤엎을 수 있다는, 공화정과 법치주의의 근본조차 무시하는 발상을 보여 준다. 비정상도 보통 비정상이 아닌데도 이를 모두가 당연한 듯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도치(倒置)의 일상화다.돌파할 방법은 간단하다. 후보교체론까지 일었던 대선 직전 겨울을 생각하면 된다. 2022년 벽두 윤 후보는 엎드려 절하고 포옹하며 현장으로 갔다. 그때의 초심을 갖고 다시 민생현장으로 가야 한다.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1년 반 동안 자신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귀로 들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외교 성과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외교는 어음이고 국내 정치는 현찰이다. 임기 동안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지를 냉철히 판단해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황소와 싸울 때는 뿔을 잡아 제압하라(take the bull by the horn)’는 말처럼 내정의 난제들을 정면 돌파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김기현 체제 지속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침묵은 공천에 목매 공멸의 길로 갈수도 있는 여당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배가 침몰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끼리 뭉쳐 있으면 그래도 나는 살겠지라는 태도다. 만약 총선에서 패배하면 윤 대통령은 바로 레임덕에 들어간다. 좌파 진영은 총선 승리 시 바로 탄핵운동에 들어가 2027년 대선까지 몰아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다. 윤 정부 5년은 아무 일도 제대로 못해 본 채 진공 기간이 될 수 있다.김 대표 스스로 용퇴의 결단을 내리는 게 옳지만 더 시간을 질질 끈다면 인요한 혁신위의 첫 번째 혁신 요구안이 김 대표 사퇴가 되어야 마땅하다. 보수 진영 지지자들의 위기감은 깊다. 내년 4월 총선 날 밤에 땅을 치고 후회할 코스로 그대로 갈 것인지의 갈림길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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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정책은 직진하고, 리더십 스타일은 확 바꿔라

    “가장 확실한 해법은 바이든이 빠져주는 건데, 당사자만 그걸 모르니….”미국 민주당의 고위급 인사가 ‘트럼프 리스크’를 걱정하며 사석에서 한 말이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이라는 악몽의 가능성을 줄일 가장 좋은 방법은 바이든 대통령이 연임에 도전하지 않는 것인데 정작 바이든 본인만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물론 농담 섞인 푸념이었지만, 한국의 여야도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 국민의힘 사람들에게 내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필승 비법, 즉 국힘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이재명 대표가 “나는 재판에만 몰두하겠다”며 뒤로 빠지고 비명 친명 구분없이 한 몸이 된 새 얼굴들로 지도부를 구성해 공천 혁신을 하는 상황이다. 그러면서 민주당 의원 전원이 “180석을 주셨는데 민생을 살리는데 힘을 쏟지 못했다”며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실용주의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상황이다. 물론 현실이 될 가능성은 없다. 정반대로 질주할 것이다.민주당 사람들에게 국힘의 필승 비법을 물으면 어떨까….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는 사실 여당에선 진작 예상했던 바였다. 투표일 전부터 내부에선 표차가 20% 가까이 날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보선 후 쇄신책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도 진작부터 돌았다.이제 예고된 대로 책임론과 국정쇄신론이 일 것이다.확 바꿔야 할 것과 더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책 방향은 변경의 대상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도가 낮은 것은 정책 방향의 문제가 아니다. 한미동맹 강화, 문재인 정권이 이탈시킨 나라 궤도와 역사 바로잡기, 건전재정 유지, 민노총과 온갖 좌파 카르텔의 폐단 시정 등 정책기조 대부분은 옳은 방향이며, 골수 좌파 지지층을 제외한 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이재명에만 매달려 신물 난다’ 하는데, 많은 이들이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상황인 것과 그게 진실인 것은 별개다. 핵심 혐의인 대장동 수사는 이미 올 1월 사실상 마무리됐고 민주당이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지 않았다면 이 대표는 2월 구속돼 언론 헤드라인에서 사라진 채 재판을 받고 있고, 백현동 대북송금 등의 추가 혐의들은 조용히 추가 기소됐을 것이다. 범죄 혐의들이 워낙 다종 다양한데다 민주당이 방탄을 해주는 바람에 오랜 기간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결과적으로는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유발한 것이다. 단칼에 외과수술 하듯 승부했어야한다는 비판도 나오는데, 그럼 나중에 추가로 불거진 백현동, 대북송금 등 중대 혐의들을 덮어버렸어야 한다는 말인가.이 대표 구속영장 기각은 심판의 자질 문제일 뿐 본질과는 무관하다. 인류 역사는 거대한 사건의 흐름 속에서 우연히 길목을 지키게 된 한 사람의 비상식적 결정이 엄청난 낭비와 소모를 유발하는 사례를 수없이 봐왔다. 열심히 뛰어 골을 넣었는데 이상한 심판이 공격자 반칙을 선언해 경기 흐름이 끊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사안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중대범죄 혐의자가 과반 의석 정당의 대표라는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소모적 프로세스를 국민이 보다 더 오래 겪어야 함을 의미할 뿐이지, 혐의의 중대함과 사법적 정의실현이라는 본질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물론 윤 정부가 추진해온 국정 방향이 옳다는 것과 그것이 제대로 실행돼 국민이 체감할 수 있게 결과로 전달됐는지는 별개다. 서툴고 무능해 일을 그르치는 내각과 참모진이 있다면 인적 쇄신이 필요하지만 모양 갖추기식 사람 바꾸기만으로는 진정한 쇄신이 될 수 없다.30% 중반대에 머무는 지지율과 보선 결과에 대해 윤 대통령은 내심 억울한 마음이 들 것이다. ‘밤잠 못 자고 코피 쏟으며 명절에도 매일 현장을 다니며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하지만 정치는 보여지는 것이다. 자기 혼자 아무리 고생하고 커튼 뒤에서 울어도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당초 김기현 대표는 김태우를 배제하고 다른 두 사람을 후보군으로 밀었으나 대통령실이 김태우를 배제하면 사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되지 않느냐며 고집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주변에서 자신과 다른 생각, 쓴소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지금 정말 절실히 쇄신해야 할 항목은 대통령 본인의 리더십 스타일이다. 첫째, 귀를 열고 불편한 소리를 청해 들어야 한다. 둘째, 민생현장에서 공감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셋째, 사람에 관한한 철저히 덧셈의 정치를 해야 한다. 화목한 가정을 위해선 배우자의 말을 많이 들어주고 공감해주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경영학 책에도 수없이 나온다. 경청·공감, “입 닫고 귀 열어”가 리더십의 요체다. 민생의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지금 경제는 솔로몬이 와도 풀기 어렵다. 문 정권이 곳간을 다 털어먹은 데다, 국제 정치 경제 상황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도 그걸 안다. 그럼에도 비판이 주로 윤 대통령으로 향하는 것은 공감과 비전의 리더십이 안 느껴지기 때문이다.말로 민생대책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애로사항을 직접 들어주고 같이 아파해줘야 한다. 시장에 가서 어깨 몇 번 두드려주고 오는 게 아니라, 손님 끊긴 밥집에 상인들과 둘러앉아 몇 시간이고 얘기 들어주고 일일이 메모해야 한다. “다녀갔다” “떡복이 먹고 갔다”가 아니라 “듣고 갔다” “수첩에 적어 갔다”가 돼야 한다. 젊은 창업인들, 구직박람회의 청년들…대통령이 만나 청취하고 함께 고민해 줘야할 대상은 수도 없이 널려있다.선거는 당에 일임해야 한다. 여당은 윤 정부를 돕기 위해 표를 달라가 아니라 “우리 당이 이러 이러한 걸 하려하니 의석을 주십시오”라고 해야한다. 그러려면 국민 속으로 들어가 국민이 뭐를 바라는지 수렴해서 정책으로 묶어내야 한다.총선 승리 전략? 아주 간단하다. 당선될 사람을 공천하면 된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대통령이 공천에서 손 떼고 당선 가능성 위주로 공천하라고 당에 엄명하면 된다.리더십 쇄신의 핵심은 듣기 싫은 소리를 기꺼이 청해 듣는 데서 출발한다. 예스맨을 멀리하고 목이 달아나도 할 소리 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한다. 5년간 귀가 편하면 평생 손가락질당하고, 5년을 불편하게 지내면 평생을 칭송받으며 살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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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尹의 ‘이념 드라이브’, 우경화 아닌 ‘정상화’가 목적지다

    최근 연이어 이념을 강조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궁금증을 요약하면 ①대통령의 정치적 의도는 무엇인가 ②‘이념 드라이브’로 중도층이 멀어지는 것 아닌가…등이다.①번 궁금증과 관련해 여러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보수진영 대주주로서 그립을 꽉 쥐기 위해” “총선 지지층 결집을 위해” 등의 정치적 포석이라는 해석을 주로 내놓는다. 하지만 필자가 접촉해 본 윤 대통령에 대해 잘 아는 인사들의 해석은 달랐다. 이 시대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종의 사명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수의 입맛을 맞출지 주판알을 굴려 선택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특히 한미일 공조체제를 핵심으로 하는 외교안보 노선은 대한민국이 살기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판단에는 서강대 이상우 명예교수를 비롯해 국제정치의 엄혹한 현실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이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공산전체주의’ 비판 등 이념 강조도 문재인 정권 5년간 이탈한 대한민국의 궤도를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사명감 차원이라는 설명이다. 윤 대통령의 그런 판단과 신념이 옳든 틀리든, 이를 지지하든 증오하든 그의 이런 특성을 모른 채 대응하면 오판이 될 것이라는게 지인들의 설명이다. 그러면 궁금증 ②번, 이념 드라이브는 중도층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보수 내부에서도 이념적 입지를 좁히면 중도층을 잃게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하지만 이 문제는 보다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념적 스탠스라는 광의의 개념 속에서 정치·역사·체제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이념과 그밖의 인물, 지역 지지 기반, 경제사회 정책 등의 주제들은 구분해서 분석해야 한다.선거가 다가오면 인물은 더 포용하고, 지역 기반도 넓히고, 경제사회 정책도 중간으로 가는게 유리한 건 맞다. 하지만 국가 정체성, 외교안보, 역사 관점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안에 대해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유불리의 관점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념·방향성 강화는 중도층 포섭과 층위가 다른 사안인 것이다. 윤 대통령 취임 직후 중도층이 대폭 이탈한 주된 이유는 보수 이념이 싫어서가 아니다. 자영업자와 서민들은 경제 상황이 계속 안 좋은데 이걸 헤쳐나갈 리더십에 대한 신뢰와 비전이 안 보여 지지를 철회했다.문재인 정권은 이런 난제가 닥치면 당장의 마약 같은 돈 풀기 처방을 내려 보수정권이 쌓아놓은 금고를 탕진했지만 윤 대통령은 그런 유혹을 이겨내고 있다. 선거 유불리를 떠나 긴축재정을 유지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가 끝까지 지켜진다면 훗날 높게 평가받을 것이다. 지지율이 떨어진 또 하나 큰 요소는 2030세대의 이탈인데, 이 역시 이념적 스탠스 때문이 아니다. 대선 때는 세대연합으로 재미를 봐놓고 선거가 끝나자 마자 2030을 후순위로 밀어낸 탓이 크다.중도층과 무당층, 특히 2030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념의 내용보다 구현 과정의 공정성이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이념 드라이브는 문 정권의 대한민국 갈아엎기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역사 바로 잡기에서도 좌파와의 질적 차이를 보여줘야 한다. 좌파권력의 역사 장악은 이중잣대, 균형 상실로 요약된다.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놓고 좌파에서 ‘부관참시’ 운운하지만 사실 현대사 부관참시는 좌파의 전유물이다.평생을 독립운동 지원과 민족자강에 헌신했던 민족지도자들이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수십 년 후 좌파 인사들에 의해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일제 강점기 말 불가항력으로 생긴 한두 가지 흠집을 파헤쳐 평생 쌓아온 공적을 싸그리 뒤집어버리는 수법이었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는 물론 동시대인 누구도 문제 삼지 않고 존경했던 지도자들을 느닷없이 친일파로 몰아붙여 현대사의 정통성을 소매치기했다. 그러면서 같은 흠집이 있어도 좌파계열 지도자라면 면죄부를 주는 이중잣대를 들이댔다. 우파는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다.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진영에 관계없이 동일하고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참변, 소련 공산당 입당 등의 흠결이 있다고 해도 뚜렷한 독립운동 족적은 그것대로 존경받고 기려져야 한다. 흉상 이전은 육사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으므로 독립기념관이라는 명예롭고 더 적절한 장소로 정중히 옮기는 차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좌파 일각에서는 집권세력 내 누군가가 홍범도 장군을 아예 독립운동사에서 퇴출시키고 흉상을 파기해버리자는 과격 언행을 해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바로잡기를 친일로 몰아가기 위해서다.족보를 멋대로 바꾸듯 국군 창설의 역사와 정신마저 분칠하려고 육사 내 흉상을 고집한 문 전 대통령의 이념적 아집이 결과적으로 홍범도 장군을 욕보인 것이다.최근 박민식 보훈부장관과 문 전 대통령 간의 소송전으로 비화된 문재인 부친 논란도 마찬가지다. 박 장관의 취지는 문 전 대통령 부친이든 백선엽 장군이든 누구든 일제하에서 태어나 그 체제를 절대적 숙명적 조건으로 여기며 자란 20대 초반 청년들이 그 체제에서 공무원이나 군인의 진로를 택한 것을 무조건 친일행위로 매도해선 안된다는 것이었음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만약 윤 대통령 부친이 일제시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면 좌파진영은 친일파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파는 그래선 안된다. ‘너희가 그러니 우리도 그런다’가 아니라. ‘너희가 권력을 쥐었을 때 자행한 그런 행태를 바로 잡겠다’가 되어야 한다.역사뿐만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문 정권이 내지른 배설물이 놓여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길은 평탄대로가 아니다. 벼랑길을 운전하는 신중함과 세밀함, 균형감각을 대통령실과 내각, 여당 모두 갖춰야 한다.윤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직진형이라고 한다. 사명감과 뚜렷한 방향성도 중시한다. 그런 확신 사명감은 자칫 불통을 낳을 수도 있다. 요즘 윤 대통령이 사석에서 자주 인용하는 골프 용어로 비유하면, 문재인 정권이 내지른 악성 훅 OB(공이 왼쪽으로 심하게 휘어 경기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를 고치려다 너무 힘을 주면 슬라이스(오른쪽으로 심하게 휘는 것)가 난다. 유연함과 균형감을 잃지 않아야 공이 곧게 간다. 지도자의 유연함은 허리나 관절이 아닌 귀에 달려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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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묻지마 몰표’가 있는 한 괴담정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주홍글씨’로 유명한 19세기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일곱 박공의 집’을 읽었다.17~19세기 미 동부 매사추세츠주가 무대다. 한 성실한 농부가 샘물이 솟는 땅을 개간했는데 지역 실권자인 핀천 대령이 빼앗으려고 농부를 마법사로 몰아세운다. 성직자 판사 등 지도층 인사들과 군중도 마법사 선동에 휩쓸리고 결국 농부는 다른 ‘마녀 용의자’들과 함께 처형당한다. 비단 소설 속 세계만이 아니다. 인류 역사 어느 시대에나 정치적·재물적 이익을 위해 괴담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세력은 있었다. 중세의 마녀사냥, ‘시온 의정서’라는 가짜문서를 이용해 유대인 혐오를 부추긴 히틀러, 백 년 전 오늘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한 간토대지진의 유언비어 유포자들…. 숱한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한 그 선동의 주역들 가운데 훗날 반성하고 사과하고 합당한 죄과를 받은 이들이 얼마나 될까. 선동에 휩쓸려 흥분하고 울부짖었던 군중들 가운데 부끄러워하고 반성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십수 년간 괴담 선동 세력이 면면도 바뀌지 않은 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젠 야당 대표가 아예 선봉에 선다. 이재명 대표는 그제 전남 무안에서 현장 최고위원회를 열고 “어민들은 바다에 나가는 게 공동묘지 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만든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가 자신의 이름을 윤석열로 잘못 발음했나 싶었다. 어민이 말한 공동묘지가 ‘오염된 바다’를 뜻했다면 멀쩡한 우리 바다를 공동묘지처럼 죽은 바다로 인식되게 만든 장본인은 이 대표 본인이다. 국내외 과학자 99%와 국제기구, 미국 유럽 등 모든 선진세계가 안전하다고 하는데도 민주당은 ‘세슘 우럭’ 운운하며 우리 바다를 방사능 범벅이 될 바다로 몰아갔다. 이 대표는 ‘기준치 180배 세슘 우럭’의 실체를 정말로 몰랐을까. 그 우럭은 후쿠시마 인근 바다에서 정상적으로 자라다 어선에 잡힌 물고기가 아니다. 도쿄전력이 정기 모니터링을 위해 원전 바로 앞, 방파제로 막힌 내항에 쳐놓은 그물 안의 물고기다. ALPS로 처리된 바닷물 속이 아니라 12년 전 흘러나온 오염물질이 침전해 있는 가둬진 오염수에서 태어나 자란 물고기인 것이다. 어민이 말한 공동묘지가 ‘무너지는 수산업’, ‘위기에 빠진 어민생계’를 뜻했다면 그 묘지를 만든 주된 책임 역시 일본 못잖게 이 대표와 좌파단체들에 있다. 우리 바다를 어떤 수산물도 먹어서는 안 될 기피 대상으로 만든 불신조장 선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이 “1+1을 100이라 주장하는 선동세력”을 비판한데 대해 “국민 80%를 셈도 못하는 미개인 취급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지적한 ‘1+1을 100이라 주장하는 세력’은 국민 전체가 아니라 ‘과학을 우롱하고 허위사실로 공포를 주입시키려는 소수의 세력들’을 지칭한다는 것은 문맥상 누구나 알 수 있다. 일본의 방류를 찜찜해하고 우려하는 국민의 마음과, 우리 바다가 핵물질과 세슘생선으로 뒤덮일 것이라는 괴담 유포 행위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먼 미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국민을 고의적으로 괴담을 유포하는 자신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선동행각을 물타기 하려는 의도다. 이 대표는 “내가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저지할 수 있다”고 시나리오를 제시해 보라. 현실적으로 방류를 저지할 방법은 전쟁밖에 없다. 툭하면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를 말하는데 ICJ 재판은 분쟁 당사국 양측이 모두 동의해야 가능하다는 건 기초적 상식이다. 설령 일본이 회부에 동의하고 ICJ에서 방류 중지 판결이 나와도 이를 이행할 강제력은 군사력 동원 외엔 없다. 전쟁외의 유일한 방법은 일본과는 사실상 단교 상태로 대립하면서 미국 등 서방국의 방류 용인 입장을 바꾸는 전방위 외교전을 펼치는 것인데, 한미일 공조는 다 무너지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IAEA라는 국제기구의 공인된 검증 결과조차 무시하는 우물안개구리, 즉 중국 러시아 북한과 함께 4인방으로 소외될 것이다. 이 대표가 대통령이라면 방류 저지는 이루지도 못하고 외교적으로는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하는 그런 선택을 할 것인가. 국가는 국제 사회에서 감당해야할 의무가 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을 부정하면 언제든지 국제적으로 왕따가 될 수 있다. ‘국민 80% 반대’론에도 맹점이 있다. 유승민 전 의원은 “윤 대통령이 그렇게 당당하면 지금 당장 국민 앞에 서서 '나는 일본의 오염수 방류에 적극 찬성한다. 반대하는 미개한 국민과 맞서 싸울 것이다'라고 제대로 선전포고를 하라”고 비난했는데 사안의 성격을 왜곡한 주장이다. 어떻게 이 문제가 찬반의 이슈가 될 수 있는가. 일본이 오염수를 방류하는 게 우리에게 득이 될 게 뭐가 있다고 찬성할 사람이 있겠는가. 복도식 아파트에서 한 집이 커다란 맹견을 키우려 한다고 예를 들자. 나머지 주민들에게 찬반을 물어보면 누가 찬성하겠는가. 하지만 입마개를 철저히 채우고, 국가 공인훈련소에서 훈련 코스를 마쳤다고 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이웃들이 개 키우는 걸 강제로 저지할 합법적 수단은 없다. 이건 찬반이 아니라, 단체로 몰려가서 그 집 현관에 대못을 박을 것인지, 아니면 입마개·계단 이용 같은 약속이 지켜지는지 감시하면서 지켜볼 것인지의 선택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 주민은 “이제 맹견에 물려 아이들이 다 병원에 실려 가고, 개가 흘리는 침으로 복도고 아파트 앞길이고 다 광견병 바이러스 천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기 아파트를 사람 살지 못할 곳으로 몰아간다.좁은 아파트에서 맹견을 키우겠다는 결정에 다수 주민이 우려를 갖는 것과 아파트 천지가 광견병 천국이 될 것이라는 선동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즉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는 찬반이 아니라, 단교나 전쟁 같은 수단을 불사하고라도 저지할 것인지, 국제기구의 감시와 약속이 지켜지는 것을 전제로 용인하고 감시할 것인지 선택해야하는 사안인 것이다. 이 대표는 자신의 언행이 선동 괴담이 아니라 자신한다면 국회에서 양측 과학자들을 동원해 생방송으로 끝장토론을 벌이도록 해보라. 일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토론하고 스크립트를 매일 배포해 국민들이 판단하게 하라. 민주당은 IAEA를 말로만 일본 앞잡이라 낙인찍지 말고 IAEA 본부를 찾아가 전문가들과 끝장 토론을 벌여 IAEA의 공정성이나 객관성 전문성에 진짜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라. ‘일곱 박공의 집’ 소설 속 핀천 대령은 마녀선동으로 빼앗은 땅에 거대한 집을 짓고 축하 파티를 하는 날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의 후손들도 유전병처럼 같은 증세로 급사하고, 결국 억울하게 마법사로 몰려 죽은 농부의 후손이 땅과 조상의 명예를 되찾게 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이다. 현대 이전까지는 신의섭리에 따라 진실이 드러나고 선동자는 벌을 받는다는 정의의 승리, 권선징악의 믿음이 있었다. 현대에는 그 역할을 과학과 투표가 맡았다. 과학이 진실을 드러내고 괴담 선동자들은 선거에서 심판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 선진국의 경우일 뿐이다. 선진국에선 괴담을 퍼뜨린 정치인이나 언론은 곧 몰락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아무리 괴담과 선동이 허위로 드러나도 몰표를 주는 묻지 마 지지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묻지 마 몰표는 지역이나 극단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다.허위로 드러나도 부끄러워 할 필요 없고, 팥으로 메주를 쒔다고 해도 지지해 주니까 더 과격하고 더 선동적으로 치닫는다. 괴담 선동 정치를 번식시키는 이런 토양을 바꿀 뾰족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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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尹의 “공산전체주의” 직격… 정반합 이룰 균형추 바로잡기 돼야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을 질타한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에 대해 예상대로 좌파 진영이 발끈하고 나섰다. 우파 내 반(反)윤석열 비(非)윤석열 인사들도 비판에 가세하고 있다.비판을 요약하면 세 가지 정도다. 시대착오적 이념몰이이며, 국민통합에 어긋나며, 광복절 기념사로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야말로 구시대적 고정관념의 산물일 수 있다.권위주의 정권 시절 용공 조작 논란을 하도 많이 겪은 탓에 우리 사회에서 ‘공산’이라는 표현은 레드콤플렉스, 적화통일을 떠올리게 하는 철 지난 “늑대” 외침처럼 들린다. 북한이 지구상 가장 실패한 파탄 일보 직전의 깡통국가 상태이고, 사회주의 몰락으로 인해 진짜 공산주의라 할 수 있는 나라는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공산’에 심드렁하게 만든다.하지만 이젠 저들의 해악을 다른 패러다임으로 봐야 한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질타하고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체제를 점령할 수 있을 만큼의 막강한 실체여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가야할 방향의 대척점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진로를 발목 잡고 방해하는 세력의 뿌리이기 때문이다.우리의 지향점은 미국이 주도하고 유럽과 일본 호주 등 대다수 선진국이 참여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글로벌 체제에서 중추 국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글로벌 체제의 대척점이 중국 러시아 북한이며, 공산전체주의는 거칠지만 이들을 통칭하는 표현 중 하나로 보인다. 비록 우리 사회에서 절대 숫자는 많지 않겠지만 그들이 약화시키고 끊으려 집요하게 시도하는 철로는 대한민국의 번영과 안위에 중요한 핵심 고리들이다. 그 선로들을 끊기 위해 그들은 온갖 이슈에서 끊임없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근현대사의 진실을 뒤집고, 한미동맹의 끈을 갉아먹고, 한미일 협력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구도를 어그러뜨리려 집요하게 시도한다. “대통령은 국민통합의 중심인데 반국가세력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을 갈라치기 했다”는 비판도 그럴듯하지만 허무한 비난이다. 과거 보수 대통령들은 국민통합을 의식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한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좌파 아무도 통합 노력을 평가하고 호응하지 않았다. 게도 구럭도 다 놓친 것이다. 좌파진영은 자기들 정권 시절엔 통합은 관심사 밖이었다. “촛불혁명” “주류세력교체” “기득권 대청산”을 외치고, 조국 장관 편을 들며 5년 내내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좌파 누구도 국민통합도 염두에 둬야 한다며 만류하지 않았다.시대 상황 자체도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와 다르다. 당시는 국제정세가 지금보다 훨씬 유연하고 미국 싱글 슈퍼파워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도전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갈 길을 명확히 국민에게 제시하고 훼방 세력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통령의 강경한 대(對)좌파 공세에 대해 민주당이 당장은 발끈하지만 결국에는 야당에도 보약이 될 수 있다. 민주당 내 합리적인 사람들은 대통령이 아무런 실체 없이 반국가세력의 존재를 언급했을 리는 없음을 알 것이다. 반발하면서도 극좌세력과의 연결고리를 더 경계하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야권 내에서 합리적 진보와 극좌를 구별해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커질 것이다. 극좌세력의 실체를 모른 채 기웃대던 이들의 추가 편입도 줄어 극좌세력의 세가 위축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야당이 더 경쟁력 있는 세력으로 자기정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물론 우리 사회에서 널뛰기의 진폭이 너무 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괘종시계의 펜듈럼(시계추)이 매사에 양쪽 극단을 오간다. 특히 이념적 갈등은 문 정권이 5년간 추를 왼쪽 극단으로까지 끌어당기면서 극도로 악화됐다. 윤석열 정권이 펜듈럼을 중앙 균형점으로 바로 안착시켜주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상론이다. 극단으로 기운 추를 균형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윤 대통령의 특징은 거침없는 직진이다. 한일 한미 관계가 그랬고, 민노총 사교육 보조금 등등 현안마다 ‘건폭’ ‘카르텔’ 등 민낯의 거친 표현으로 강경 대응을 주도했다. 검사 시절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도 목격됐듯 그는 특정 세력과 맞설 때 에너지가 솟구치는 스타일로 보인다. 이번에도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차원에서 여기 도전하는 ‘극좌파 나부랭이들’과 한판 붙어 승부를 내겠다는 결기가 읽힌다. 다른 보수 대통령들과 달리 일단 붙으면 결론을 낼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결기로 추를 오른쪽으로 확 당겼는데 진행 과정에서 과불급(過不及)과 또 다른 극단으로의 편향은 특히 더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펜듈럼이 다시 왼쪽으로 널뛰기하지 않고 균형점에 서서히 안착할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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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중국의 오만을 다스리는 방법

    무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 오른 북한산. 대남문에서 바라보는 백운대의 웅자(雄姿)는 수십 수백 번을 마주해도 장엄하다. 그런데 산성길을 걷다 보면 시골집 담벼락처럼 낮은 성벽이 다소 의아스럽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났다.“조선은 명(明)과 청(淸)으로부터 끊임없이 군사적 트집에 시달렸다. 심지어 왜 북쪽을 보고 성을 쌓았느냐, 성의 높이가 왜 이리 높으냐며 핍박해 대는 바람에 도로 허물거나 낮춰야 했다.”(도서출판 동문선 신성대 대표의 글)실제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조선의 축성을 금지시켰다. 이후 숙종 36년 해적 피해를 입은 청이 방비를 강화하라는 외교문서를 보내옴에 따라 축성 금지가 사실상 해제됐고 숙종 37년 북한산성을 수축(修築)했다고 문헌은 전한다.산을 내려와 식당에서 뉴스를 검색하니 퓨리서치센터가 24개국 3만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중국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가 떴다.중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성인 비율이 일본 호주 87%를 비롯해 스웨덴(85%) 미국(83%) 캐나다(79%) 독일(76%) 등 모든 선진국에서 압도적이었다.한국에선 77%였다. 2015년 37%→ 2019년 63%→ 2022년 80%로 최근 수년간 급격히 부정적 인식이 높아진 것이다.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비율이 낮아진 국가는 인도네시아 케냐 나이지리아로, 중국이 대규모로 돈을 쏟아 부은 나라들 뿐이었다.중국은 어쩌다 이렇게 세계의 밉상으로 전락한 걸까.31년전 한중수교 직후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한국에 부임한 초대 주한 중국대사 장팅옌(張庭延)이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당시 동아일보가 석간 때여서 기사 마감을 하느라 필자는 간담회에 다소 늦게 도착했는데 대사는 간담회 시작을 늦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장 대사는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동아일보 없이는 간담회를 할 수 없죠”라며 반겼다.당시 장면을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불러놓고 겁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은 싱하이밍(邢海明)대사와 비교해 본다. 수교 이후 중국의 태도는 갈수록 무례해져 8대인 현 싱 대사에 이르기까지 재임중 내정간섭성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다.물론 대사들의 오만한 언행은 반중정서라는 거대한 둑이 쌓이는데 흙 한삽 추가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중국 당국의 횡포에 시달리다 생산설비도 챙기지 못한 채 야반도주해야 했던 기업인들의 한탄이 쌓이고, 터무니없이 가로 채려는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 항목들이 늘어가고, 서울에서 재한 중국인들이 중국인권을 외치는 한국인들을 경찰 제지에 아랑곳없이 집단폭행(2008년 서울올림픽공원 폭행사태)하고, 대통령을 수행한 기자들이 중국 경호원들에 폭행당하는(2017년 문재인 대통령 방중 당시) 등 상대를 얼마나 쉽게 여기면 저러는가 싶은 일들이 강 하구에 퇴적물이 하나둘 쌓여 둑을 이루듯 지금의 반중정서를 형성한 것이다.중국은 교장 선생님 앞에 불려온 학생처럼 공손하게 앉아 경청하던 이재명 대표의 태도를 한국 국민의 보편적 정서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미국 일본에 대해선 막말 폭언을 서슴지 않는 민주당과 좌파 활동가들이 중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유는 △무의식 속 사대주의, 소중화(小中華)주의의 잔재 △사회주의 종주국에 대한 심정적 유대감과 종속감 △현실을 도외시한 평화 우선 가치관의 영향일 것이다. 중국과 갈등하면 우리가 입는 피해가 크니까 수모를 당해도 갈등 없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이다.중국의 심리전에 포섭된 이들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은 최근 수년간 미국 상원의원, 영국 노동당 의원, 호주 지방선거 등 세계 곳곳에서 정치인 포섭을 위해 뇌물 선거자금 지원 등의 방법을 동원하다 적발됐다.더 실망스러운 것은 지식인 집단의 침묵이다. 과거 수년간 중국이 그 어떤 오만한 행태를 보여도 나서서 공개적으로 질타한 중국 분야 관련 교수나 전문가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이는 중국이 오랫동안 쌓아온 친중파 육성 전술의 산물일 수 있다. 중국은 그동안 수많은 교수 전문가 등을 세미나 등 명목으로 초청해 선물 보따리를 안기고, 숱한 연구 용역 프로젝트를 발주했다.중국의 오만은 한국이 원칙에 입각한 외교를 못한 탓도 크다. 임시방편적으로 당장의 피해 회피를 위해 우호적인 협조를 기대하고 중국의 비위를 맞춰 줬지만 지금의 중국은 보은과 신뢰라는 동양적 가치관을 중시했던 옛 나라가 아니라 공산당이 지배하는 국가다.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보고서가 미국의 타겟이 중국이 아니라 중국공산당(CCP)이라고 명시하고 있듯이 우리도 지금 상대해야하는 공산당 정권의 특성을 명철하게 파악해야 한다.중국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정부와 민간 모두 국제규범 기준에 맞게 품위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비판하고 반박해야 한다.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외국인 건강보험 제도 개선안, 지방선거 투표권 개선안은 합리적이며, 국제 기준과 상호주의 원칙에 부합한다. 사사건건 다 반대하는 민주당과 좌파언론들은 당장의 중국 이익 옹호가 오히려 국민의 혐중 정서를 강화시켜 한중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6·25전쟁 왜곡도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중국인들은 6·25를 김일성의 남침전쟁이 아니라 38도선을 넘어 침공해온 미 제국주의 세력을 인민해방군이 격퇴한 대미항쟁으로 교육받고 있다. 지구상 인류 중 13억 명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꿔 알고 있는 것이다.먼 장래 통일 후 논의될 문제이긴 하지만 1907년 청일 간 간도협약으로 중국 땅이 되어버린 간도 문제에 대한 연구도 축적해야 한다.중국 대외정책의 핵심은 경제적 강압조치를 외교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미리 입법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은 지난달부터 방첩법을 시행하고 있으나 우리는 기술 탈취 행위를 적극적으로 방어할 법체계가 미비하다. 중국 기업이 한국 업체를 인수합병(M&A)해 한국 기업으로 탈바꿈한 뒤 미국과 유럽연합(EU) 수출을 노리거나, 핵심 기술을 탈취해 가는 경우도 빈발할 수 있다. 이에 대비해 미국은 2018년 FIRRMA(Foreign Investment Risk Review Modernization Act·외국인 투자 위험성 검토 현대화법)을 만들어 장관급 위원회가 외국인 투자를 심사한다. 일본도 이런 기구가 있다. 미국은 미국 자본의 해외 투자를 심사하는 법안까지 제안돼 있는 상태다. 일본은 2010년 희토류 수출금지 등 중국의 무역보복을 당한 뒤 2011년에 총리실에 장관급 경제안보 부서를 만들고 관련 부처들의 조직을 강화했다. 우리 기업들이 당하는 불공정한 피해에 대해서도 당당히 얘기해야 한다. 성주 골프장을 맞교환 방식으로 사드 기지 부지로 제공했다는 이유로 롯데는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112개에 달했던 마트는 물론 백화점 호텔 복합단지 사업 등을 접어야 했다. 만약 미국이나 일본에 진출한 한국기업이 현지에서 정치적 이유로 이런 보복을 당했다면 국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더 어이없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눈치 보기였다. 문 대통령은 2017년 12월 대규모 경제대표단을 이끌고 방중하면서 롯데는 제외시켰고, 2018년 2월 방중한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는 12개 중국진출 기업 대표를 불러 간담회를 하면서도 롯데는 안 불렀다.중소기업인들이 당한 피해는 더 참담하다. 손실을 견디다 못해 사업을 청산하려면 중국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승인 절차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킨다. 그 기간에도 인건비는 계속 지불해야 한다. 망해도 그냥 망하게 놔두지 않고 골병들여 죽이는 식이다. 윤석열 정부는 방향은 옳게 잡았지만 당장의 경제적 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질때마다 흔들릴 기미가 보인다.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최근 정부 일각에선 중국이 싱 대사를 교체하고, 한국도 중국 체면을 위해 주중 대사를 교체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설령 아이디어 차원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싱 대사는 투명인간 취급하면 된다. 대사로서 아무런 역할도 못한 채 한국 내 중국의 신뢰자본만 갉아먹는 시간이 길어지면 중국 정부 스스로 조치를 취할 것이다.이제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오만하고 힘자랑을 일삼는 국가 옆 국민일수록 주눅 들면 안 된다. 따질 건 따지면서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 성벽 높이까지 간섭하고 군림해도 감내해야 했던 변방의 약소국이 아니다. 기울어진 균형추를 당당하고 냉정하게 균형으로 맞춰가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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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원희룡의 카운터펀치… 괴담세력과의 전쟁 분기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양평고속도로 백지화를 발표하자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우파 성향 언론과 학자들도 주민만 피해 보게 됐다고 비판했다. 필자도 첫 느낌은 비슷했다. 하지만 곰곰 따져봤다. 정말 이 발표가 양평 주민과 장래 이 도로를 이용할 수많은 교통수요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가 될까. 더 나은 대안이 있었을까. 수년째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아내가 집을 나갔다 치자. “아이 혼자 두고 집을 나간 무책임한 엄마”라고 비난을 퍼붓는 게 온당할까? 만약 원 장관이 “의혹이 제기됐으니 원안(양서면 분기점)대로 하겠다”고 했으면 더불어민주당과 좌파는 “국정농단을 막아냈다”며 투쟁 승리사로 기록하고, 양평주민에게는 진출입로(IC) 없는 도로가 주어질 것이다. 원 장관이 수정안(강상면 분기점)을 추진하겠다고 했으면 좌파는 “희대의 국정농단” “탄핵”을 외칠 것이다. 공사장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완공 후 수년이 지나도 도로에 ‘김건희로드’ 낙서가 생길 것이다. 물론 백지화 결정은 토론과 승복, 이성 과학 팩트가 존중되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슬프고 어이없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학자나 언론인들은 야당을 찾아가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고 양비론을 펴지만, 실제 아무리 그런 노력을 한들 야당이 의혹 제기를 철회하고 정상적인 추진 여건이 회복될까. 아무리 설명하고 팩트를 제시해도 이재명 대표가 “납득이 된다”며 ‘김건희 로드’ 낙인찍기를 거둬들일 가능성이 1%라도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민주당 내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토론·설득이 불가능한 비정상 사회로 몰아간 책임의 99%는 민주당과 좌파진영 내 괴담세력에 있다. “궁극적으로 공론의 장에서 괴담과 가짜뉴스는 걸러지고 진실과 정의가 우뚝설 것”이라는 당위론은 수백 수천년 긴 역사의 눈으로는 맞는 얘기겠지만 당대를 사는 사람들은 고스란히 그 폐해에 노출된 채 일생을 속은 채 살아가게 된다. 괴담 세력의 악의와 간교함을 보면서도 정부의 대화 노력 부족을 탓하며 책임의 절반을 정부에 돌리는 건 무책임한 양비론일 뿐이다. 원 장관의 대응은 우파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충격 요법이다. 그동안 우파 진영은 괴담 공세가 시작되면 손놓고 있다가 뒤늦게 해명하고 어정쩡하게 타협을 시도하거나, 술대접하며 달래고, 질질 끌려가다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나중에 흐지부지되는 경로를 되풀이해 왔다. 좌파는 괴담 효용을 100% 거둔 뒤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책사업 반대론자들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다. 그런 소신이 없었다면 경부고속도로는 구불구불 뱀 노선이 됐을 것이다. 원 장관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보수가 살기 위해서는 괴담 세력에 맞서 자신을 다 던지는 정치인, 장관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원 장관의 백지화 발표는 결과적으로는 더 신속한 진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원 장관은 이제 다음 펀치를 내야 한다. 그것은 민주당에 노선 선택권을 줘버리는 것이다. 너무 오래 시일을 끌거나 지나친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민주당이 양평군민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입장을 정해 오면 정부는 그걸 존중해 즉각 사업을 재개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원 장관의 백지화 선언 이후 많은 팩트가 쏟아지면서 이제 전 국민이 전문가가 됐다.특히 도로 타당성 조사 용역을 맡았던 경동엔지니어링(교통 분석)과 동해종합기술공사(도로)의 지난 13일 브리핑은 논리와 합리성 모든 면에서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전후관계를 따져보면 야당이 제기한 의혹은 근본적으로 허점이 많았다. 노선 수정안은 지난해 1월 문재인 정부가 선정한 이들 용역업체가 지난해 5월 19일 국토부에 제출한 결론이다. 당시는 윤 정권이 출범한지 9일, 원 장관이 취임한지 사흘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신뢰도와 실력을 인정받는 두 전문 업체의 의견이 정치적으로 오염됐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왜 노선 변경을 제안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만약 선택권을 위임받은 민주당이 오직 “김건희로드 저지”라는 프로파간다에 집착해 원안을 고수하면 주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고, 국민에겐 “정치적 계산을 국민의 편의보다 앞세운 집단”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민주당이 뒤늦게 픽업한, ‘원안에 IC만 추가하자’는 방안을 고집하면 도로가 기형적으로 휘고, 자연환경과 문화재 훼손 등 숱한 문제점을 야기하는 무책임한 선택이라는 비판을 받을 위험이 크다. 그렇다고 강상면 수정안을 택하자니 김건희로드 주장을 스스로 철회하는 것에 해당한다. 딜레마에 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야당에 선택권을 주는 것은 정상적인 정부 운영 원칙에 어긋나는 방법이다. 하지만 도로계획이 차질을 빚든, 수산업이 붕괴하든 개의치 않고 괴담을 유포하는 세력의 발목잡기에서 벗어나려면 특단의 방법을 동원해야 할 필요도 있다. 괴담세력의 수법은 항상 비슷하다. 더탐사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종점이라고 표현했다. 이해찬 전 대표는 “도로 노선을 변경해 자기네 땅 사 놓은 데로 지나가게 한다. 역대 누구도 그렇게 내놓고 해먹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들은 진출입이 가능한 IC가 아니라 분기점(JCT)이며, 보유 토지 대부분은 1987년 상속받은 선산이라는 점은 알리지 않는다. 선진국에서 괴담을 퍼뜨린 정치인이나 언론은 사회에서 매장되지만 한국에서는 궤변 논리로 퇴로를 만들며 승승장구해 왔다. 하지만 양평은 다르다. 민주당은 돌아나가기 힘든 진격을 했다. 자기들 정부 때 발주한 용역 결과를 국정농단이라고 비난한 건 자기 눈을 찌르는 자승자박이다. 양평고속도로 분기점은 수십 년째 온 나라를 수렁에 빠뜨려온 괴담세력과의 게릴라전에서 대반격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만약 민주당이 의혹 제기를 철회하고 도로 건설이 정상적으로 재개될 경우 윤 대통령 처가는 상속받은 선산 이외에 최근 수년간 추가 매입한 도로 주변 토지가 있다면 국가나 공익재단에 기부하기를 바란다. 법적으로 떳떳하고 정상적인 과정으로 일이 진행됐다고 해도 그게 대통령 가족으로서 명예로운 처신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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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나라 기둥 흔들고 ‘먹튀’한 문재인 정권… 통치행위 면피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반(反)국가 세력” 발언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발끈하고 나섰다.“냉전적 사고” 운운하면서 그가 펼친 주장의 요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남북관계가 발전했으며 (그 결과물로) 국민소득이 큰 폭으로 증대했다”는 것이다.사실관계를 호도한 주장이다. 북한이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인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도움을 받아 우라늄 핵무기 개발에 본격 나선 것은 김대중 정부 때인 1990년대 후반이었다. 첫 핵실험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이었으며, ‘핵무력 고도화’에 박차를 가한 것은 문재인 정부 때였다. “진보정부 때 대북정책의 산물로 국민소득이 큰 폭으로 증대하고 보수정부 때는 평화가 위태로워져 국민소득까지 줄었다”는 것은 통계마저 왜곡한 주장이다. 문 전대통령이 근거로 삼은 자료는 2019년 좌파진영에 돌았던 SNS 게시물로 추정된다. 환율 변수를 무시한 채 달러화를 기준으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때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때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4.5배 더 성장했다”는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해당 국가의 통화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기본도 무시한 것이다.구글 검색에 ‘국민소득 추이’만 입력해봐도 진실을 금방 알수 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1인당 실질 국민총소득 통계를 보면 지난 30년간 우리 경제는 좌우 정권별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고르게 성장했다(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4221).전년대비 1인당 실질 국민총소득 증가율을 보면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97년 각각 6.1%. 8.3%, 7.7%, 5.6%, 3.1%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2002년 마이너스 8.3%, 9.9%, 5.6%, 3.2%, 8.0% △노무현 정부는 2.1%, 3.9%, 2.2%, 3.4%, 5.2%, △이명박 정부는 마이너스 0.4%, 2.0%, 6.7%,, 0.8%, 2.4% △박근혜정부는 3.4%, 2.8%, 5.8% 4.0%, 3.0% △문재인 정부는 1.1%, 0.0%, 마이너스 0.1%, 3.7%, 마이너스 0.5%를 기록했다. ‘임기 마지막 해 1인당 실질 국민총소득이 취임 직전 연도에 비해 얼마나 늘었나’를 계산해 보면 김영삼 정부는 478만 원, 김대중 344만 원(외환위기를 고려해 임기 첫해를 기점으로 하면 498만 원), 노무현 395만 원, 이명박 308만 원이 늘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7년을 임기 마지막해로 계산하면 593만 원, 2016년을 마지막해로 계산하면 491만 원 늘었고, 문재인 정부는 2022년 대비 2017년을 비교하면 149만 원, 2016년을 비교대상으로 하면 251만 원이 늘었다.국제 경제 상황 등 다양한 조건을 도외시한 채 남북관계와 소득증가율을 인과관계로 놓은 억지도 전직 대통령이라고는 믿기 힘든 수준이지만, 통계의 자의적 왜곡에 깔린 음험함이 더 기막히다. 통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통계청장을 경질했던 습성의 발로일 것이다. 물론 ‘반국가 세력’이라는 표현이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어휘였음은 사실이다. 한 중도보수 성향 학자는 “‘대통령은 여야 모두를 아울러 국민화합으로 끌고 가야하는데, 야당을 적대시해서 어떻게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필요한 처방”이라고 평했다. 신냉전 세계질서 속에 극심한 남북, 남남 대립이 벌어지는 이념적 혼란기에는 국가가 가야할 방향과 국가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게 옳다는 설명이다.문 정권이 지향한 새로운 나라가 기존 대한민국과는 달랐던 게 사실이다. 여기서 새로움은 업그레이드의 개념이 아니라 대전환을 의미했다. 문 전대통령은 집권 전 저서, 인터뷰 등에서 “세도 정치로 나라를 망친 노론세력이 일제 강점기에 친일 세력이 되고, 해방 후에는 반공이라는 탈을 써 독재세력이 되고, 여전히 기득권으로 남아 있다”는 일부 역사학자의 주장을 자주 인용하면서 주류 세력 교체, 대청산, 역사 교체를 주창했다. 촛불시위를 혁명으로 규정하고 혁명정부를 자임했다. 외교안보관도 남달랐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없애고 기무사령부 해체 등을 통해 간첩 잡는 기능을 사실상 와해시켰다. 우리 주권의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에 3불1한을 합의해준 것은 국제질서를 보는 특유의 시각을 보여준다. 해방공간과 6·25전쟁 와중에 발생한 양민피해에 대해서도 오로지 우익에 의한 피해만을 조명하고 보상한 것은 현대사에 대한 독특한 인식의 발로다. 최근의 미중전쟁 메시지는 6·25전쟁의 근본 성격에 대해서도 상식적 대한민국 국민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이재명 대표는 윤 대통령의 반국가 세력 발언에 대해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지낸 자신의 과거를 잊은 심각한 자기부정“이라고 비난했는데 억지스런 논리다.보수성향 국민들이 문재인 정권에 대해 의구심을 표할 때 그 의미는 정권 구성 세력 일부 및 정권의 지원으로 활성화된 각종 단체 내에 반국가적 인식 관점 언행이 있었으며, 그런 요소가 과거에 비해 두드러지게 확장되고 강해졌다는 의미이지, 정부 자체가 반국가세력이었다는 뜻이 아님을 이 대표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게다가 윤 총장은 문 정권에 의해 임명됐지만 ‘반국가적 행위’에 가담하는 대신 그런 행위를 엄단하려 했다. 교육 공정성을 파괴하는 권력 핵심층의 입시 비리, 청와대의 광역시장 선거 개입, 강압적 원전 폐쇄 같은 행위를 의법 조치 하려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문 정권의 다른 나라 만들기는 실패했다. 다만 하나 성공한 것은 자기 진영에 황금 밥그릇 챙겨주기였다. 요즘 연일 공개되는 문 정권 하의 보조금 비리, 태양광, 전력보조금, 각종 연구기금 비리 등은 기득권 타파라는 슬로건 아래 ‘우리끼리 다 먹어치우는 나라’를 만들려 했고 상당 부분 성공했음을 드러내준다. 패밀리비즈니스를 벌인 뒤 튀어버린 셈이다. 그래 놓고 총책임자는 진영의 상왕 행세를 하고 있다.문제는 이렇게 먹고 튀어도 정의의 실현을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적 손실을 끼친 정책이 의도되고 기획된 것이었는데도 최종 결정권자에 대해서는 통치행위를 한 것이니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적이 있는지에 대해 많은 국민은 회의적이다. 국가의 근본 방향과 시스템에 대해 모두가 인정하고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진보와 보수가 집권경쟁을 펼치는 선진국 정치시스템과 달리, 권력을 잡으면 자기 마음대로 나라 근간을 다 휘젓는 이런 풍토에서 통치행위라는 미명하에 어떤 잘못이든 면책해주는 게 옳을까.명백히 민주적 절차의 위반이 있었고, 헌법적 가치를 훼손해 국가와 국민에 해를 끼쳤을 경우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한다. 선의의 실책이 아니라 의도적인 실정, 자기편 이권 챙겨주기에 대해 심판하지 않으면, 정의와 불의의 도치(倒置), 형평성 역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5년간 나라 기둥을 부수고 자기 진영 챙기기만 하다 먹튀해도 된다는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 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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