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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전에 나섰던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늦어지는 것은 사안의 복잡다단성을 반영한다. 계엄직후 야당이 설정한 내란프레임에 온 사회가 순식간에 휩쓸렸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명료한 성질의 사안이 아니었다.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무시했거나, 의원 체포·구금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복잡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벌어진 일들은 합법과 불법, 헌법상 권한과 위헌의 미세한 갈림길을 수없이 오간다. 문제성 발언·지시들 중에도 면밀히 계획된 것인지 우발적·즉흥적인 것인지 경계에 있는 것들이 많다.대통령 탄핵 심판은 대통령 개인의 잘못을 처벌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부통령제가 없는 우리 시스템에선 대통령에게 투표한 1639만 표를 무효화시키고, 국민의 나라 방향 선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국제 질서의 펀더멘털이 바뀌는 관세전쟁 상황에서 불확실성·불투명성의 장기화는 우려스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라의 방향이고 집권 세력의 정치이념이다. 최대치까지 정밀하고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윤 대통령이 파면되든 복귀하든 윤석열 정권은 머잖아 끝난다는 점이다. 탄핵이 기각돼 복귀해도 대통령이 개헌을 전제로 임기 단축을 약속했기 때문에 조기 대선은 불가피하다. 분명한 것 둘째는 김건희 여사 문제가 마침내 사법 절차의 영역에 들어설 것이란 점이다. 대통령이 파면돼 대선 국면에 들어가면 여야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김건희 사법 처리를 밀어붙일 것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복귀해 거부권을 행사해도 재의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정권을 곪아 문드러지게 만든 ‘김건희 수렁’의 종료다.조기대선 국면에 영향을 미칠 가장 첫 변수는 이재명과 윤석열이 각각 어느 정도로 자기 진영 기둥을 훼손할지다.탄핵이 기각될 경우 이재명 대표는 연말이나 내년 초로 늦춰질 선거 이전에 대법 판결이 나와 출마 기회가 박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대표가 마은혁 임명을 압박하며 “몸조심” 운운한 것은 이런 다급한 상황과 그 특유의 정치인성 DNA가 결합돼 나온 결과물이다.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조폭 두목이 평소 상가 상인들에게 인자하고 예의바른 사업가처럼 처신하다 점포 하나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면 주변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퍼붓는다. 목적이 달성되면 다시 온화한 사업가로 돌아가고…. 이 대표는 평소엔 여론, 중도층을 의식하다 원하는 결과의 달성 여부에 생사가 걸렸다고 판단되는 순간엔 오로지 목적 달성에만 집중한다. 지난 총선 때 공천 학살 과정을 보라. 세상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칼을 휘둘렀다.이번에도 자칫하면 자신의 미래가 대통령에서 감옥으로 급전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드니까 조폭이 밀실에서나 할 만한 협박 표현을 해댄 것인데 이는 핵심 지지층에게 보내는 명확한 좌표 찍기이기도 하다.몸조심 같은 표현은 의도한 용어 선택이든 아니든 그의 평소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평생을 대결적·전투적으로 살면서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잡아먹히거나 둘 중의 하나의 세계로 살아온.원하는 것 획득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이런 행태는 푸틴, 차베스 등 권위주의 체제의 장기집권 지도자들이 공유한 특질이기도 하다. 그런 성향의 지도자가 일단 권력을 쥔 뒤 절대권력으로 굳혀가는 과정을 역사는 숱하게 보여줘 왔다. 그런 개연성이 시나브로 현실화되어도 막을 장치가 없는 게 민주주의의 함정이다.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가 어어 하다 당하듯 합법적 절차를 통한 단계적 독재화의 저지는 지난(至難)하다. 이 대표에게 가장 큰 약점은 현재 다수 국민이 그런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걸 알면서도 이 대표가 자신의 본성을 부지불식간에 자꾸 노출시켜 국민에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의 최대 장애물이 이재명의 탁한 본성(本性)이라면, 보수진영 최대 수렁은 윤석열이라는 존재 자체다.지난해 12월 14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지금까지 여론조사 추이를 분석해 봤다. 결론은 간단했다. 윤석열이 노출되면 될수록 ‘보수 측 지표’(윤 지지+정권 연장 희망+탄핵 반대)는 떨어지고, 윤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올라갔다. 윤 대통령이 구속돼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최고치로 올랐다가 헌재에 나와 제스처를 크게 쓰니 내려갔고, 변론 끝나고 다시 조용해지니 좀 올랐다가, 주먹 세리머니를 하며 구치소를 나오니 또 떨어졌다. 관저정치 비판을 의식했는지 며칠 조용해지니 다시 조금 올라간다. 사실 이런 추이는 정부 출범 때부터 이어져 왔는데 이는 ‘국민적 비호감’의 반영이다. 정치의 기본은 간단하다. 동정받으면 이기고 잘난체하면 진다. 겸손하면 이기고 어깨에 힘주면 진다. 들으면(聽) 이기고 말하면 진다. 이 간단한 진리를 무시하면 줄반장 자격도 없다.윤 대통령이 “나를 위해 강추위에 거리에 나선 수십만 지지자가 있는데 무슨 비호감이냐”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필자는 이번 탄핵 반대 집회를 계기로 거리에 나서기 시작한 5명의 속내를 들어봤다. 5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대졸 학력 중산층들이다. 거의 비슷한 답을 들었다. 그중 한 분(자영업)의 말을 전한다. “나는 여론조사 전화는 다 받아준다. 그리고는 윤을 지지한다고 답한다. 윤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재명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윤이 김건희만 싸고도는 행태에 화가 나고, 계엄 때도 혀를 찼다. 그럼에도 이재명 세상이 오는 게 너무 싫어 집회에 나간다.” 조만간 탄핵 국면은 정리된다. 이 대표는 윤석열이 선물한 계엄 로또가 당첨돼 사법 리스크를 벗어날지 겸허히 기다리고, 윤 대통령은 자신이 무너뜨린 보수의 초가삼간 주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해야 한다. “그림자 속에만 머물겠다. 나를 잊어달라.”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25일밤 68분간의 헌법재판소 최후 변론 중 40%가량을 야당과 좌파가 저지른 ‘폭거’ 사례를 열거하는 데 할애했다. 전체 1만9341자의 변론 가운데 7637자에 달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박탈→간첩법 개정 거부→국방예산중 핵심 감시정찰예산 삭감→방산물자 수출 발목잡기→ 한미일 군사훈련 비난 등 군의 안보활동 방해 →대통령 취임전부터 탄핵 공세→입법폭주→장관 방통위원장 감사원장 검사 판사 등 공직자 줄탄핵 → 예산폭거…> 물론 뉴스를 매일 접해 온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필자 역시 그런 야당의 행태를 칼럼에서 다룬 게 15회가량에 달한다. 그런데도 옴니버스식으로 열거된 사례들을 보니 새삼 놀라웠다. 정말로 지난 2년 반 동안의 이재명 민주당은 극악스러웠다. 건국 이후 이런 야당은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윤 대통령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묻고 싶었다. “그럼 그동안 대통령은 뭘 하고 있었나?” 대통령이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고 경각심을 호소할 기회와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확성기를 가진 자리다. 기자회견을 매일 열어도 언론은 생중계하고 대서특필해 줄 것이다. 대통령이 수시로 마이크를 잡아 야당의 행태가 국익에 미칠 영향을 진솔하게 설명하며 자제를 호소하는 소통을 했다면, 국가 원로들을 포함해 중도와 보수 전체가 호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취임 100일 기자회견 이후 1년 9개월간 한 번도 회견을 안 하며 국민과의 소통을 거절한 것은 윤 대통령 본인이었다. 국민이 야당의 폭거를 모르거나 다 잊거나 덮어주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해 4월 총선은 투표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됐었다. 국민은 이재명 민주당의 오만과 폭주를 심판할 마음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스스로 차버린 게 윤 대통령 본인이다. 오로지 아내만 감싸고 돌다 정권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고집불통 버럭 행태로 야당보다 더 거만하고 오만한 이미지를 굳힌 자업자득이었다. 보수 진영의 위임을 받아 성루에 선 수성(守城) 총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다 기껏 대책이라고 내놓은 게 황당하고 어설픈 계엄이었다. 그 결과가 뭔가. 만약 탄핵이 인용되고 그 여세로 5월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87년 민주화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행정·입법 권력을 진보(좌파) 진영이 완전 장악한 체제가 된다. 물론 과거에도 여대야소는 있었지만 기껏해야 과반을 한두 석 넘긴 데(2004년 열린우리당 152석, 2008년 한나라당 153석, 2012년 새누리당 152석) 불과했다. 다수당의 법안 일방 처리를 막는 장치인 선진화법(2008년 제정)을 무력화시키는 패스트트랙을 통해 모든 입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5분의 3 의석(180석)을 차지한 정권은 2020년 코로나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한 문재인 정권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는 정권 임기가 2년밖에 안 남아 대선을 의식해야 하고 부동산 실정(失政) 등으로 정권의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만약 현 민주당이 5월 대선에서 집권하면 최소한 2028년 4월 총선까지 3년간은, 임기 초의 무소불위 대통령과 슈퍼 의석 여당이 일사불란하게 수십, 수백 개의 이른바 개혁입법(좌파 숙원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경제·사회·공영언론·문화·역사 등 나라 구조 전체를 바꿔 놓는 ‘대변혁’의 시기가 될 수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일어도 한때 좌파 혁명 노선을 추구했던 노동단체 간부 출신 재판관을 포함해 우리·국제법연구회 출신들이 다수 포진한 헌재가 최대한 폭넓게 진보적으로 헌법을 해석해 줄 것이다. 나라의 항로가 지금까지와 많이 다른 방향으로 갈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헌재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을 생각할 때 유념해야 할 대목이 있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은 미국과는 의미가 다르다. 미국은 대통령이 탄핵돼도 정권 자체는 유지된다. 러닝메이트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 잔여 임기를 채우기 때문이다. 닉슨이 탄핵위기에 처해 사임하니 같은 당 소속 부통령인 포드가 승계해 잔여 임기를 채운게 그 예다. 국민의 4년 임기 정권 선택 자체가 무효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대선은 대통령 개인을 뽑는 선거인 동시에 나라의 항로에 대한 선택이다. 앞으로 5년간 우리나라가 이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고 국민이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 개인의 허물로 인해 국민의 5년짜리 결정 자체가 무효화된다. 다른 공직자와 달리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부 판단은 헌법 위반 정도의 심각성이 공직 권한을 박탈하기에 충분한지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5년짜리 체제 선택 결정 자체를 무효화할 만큼 중대했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민주당에 이런 판을 열어준 윤 대통령은 얼마전까지도 탄핵이 당연히 기각될 것으로 확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계엄 선포 때도 드러났지만, 객관적으로 판세를 읽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나 지난 총선의 결과가 나오기 직전까지도 승리를 확신했다는 외눈박이 판단력, 즉 ‘자기 객관화 능력 부재’의 연장선상이다. 수감 후 여당 지도부와의 면담 때 윤 대통령은 당이 왜 안 움직이느냐고 불만을 터뜨렸고, 보다 못한 당 간부가 “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어린애처럼 칭얼대느냐”고 질타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설령 탄핵이 기각돼 복귀한다고 해도 보수 재건의 중심축이 될 능력도 자격도 잃었다. 이미 리더십은 바닥을 드러냈고. 신뢰 자본을 까먹었다.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보수 진영 재건 움직임에서 윤석열이라는 이름은 키워드에서 지워야 한다. 윤석열에 대한 입장이 새 리더십 선택의 기준이 돼선 안 된다. 윤석열을 중심에 놓으면 범보수 진영이 결집될 수도 없고, 설령 뭉쳐진다 해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보수 진영 결집의 속도와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박근혜 탄핵’(2016년12월~2017년 3월10일) 때는 탄핵안 국회 통과부터 탄핵 인용 때까지 8대 2 정도의 비율로 탄핵 찬성이 반대를 압도하는 현상이 지속됐었다. 이번엔 계엄 직후 8대2 가량이었던 탄핵 찬반 여론이 한달여 만에 6대4 이내로 격차가 줄었다.여당 지지율도 박근혜 탄핵 때는 2016년 10월말 29%→18%(최순실 구속)→12%(탄핵소추안 통과)를 거쳐 8%까지 추락했으나 이번에 국민의힘 지지율은 32%→24%로 떨어진 뒤 반등해 계엄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이를 놓고 윤석열 대통령 측은 자신에 대한 지지로 여기고, 국민의힘은 탈윤석열 행보에 제동이 걸린 채 어정쩡한 행보다. 더불어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가짜뉴스와 극우 세력의 발호로 해석한다.다 어이없는 착각이다. 파도가 몰려오면 거품이 아니라 물속 흐름을 봐야 한다. 거대한 흐름의 중심은 보수의 비상한 각성이다. 한국 우파의 주축인 온건·중도 보수 시민들은 오랫동안 참고 침묵해왔다. 87년 이후 사회 각 부문의 좌향좌를 불편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도 과거의 우편향에서 균형점으로의 이동이라고 여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현실은 균형점을 지나쳐 좌편향으로 치달았다.한국사회는 유신, 전두환 시절까지 균형추가 우측으로 심하게 쏠린 상태였다. 6·25전쟁의 영향으로 좌파 세력은 미미했고, 그 덕에 경제발전과 안보라는 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 민주화 이후 추(錘)가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더니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보수층의 인내심은 총선 이후 민주당의 극단을 치닫는 입법독재 행태를 보며 한계점에 달했고, 계엄 이후 한덕수 탄핵, 공수처와 헌법재판소의 균형 잃은 행보에서 결국 폭발했다.좌편향에 대한 반발기류는 미국 유럽 등 전세계적으로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주의에 대한 반발, 소수자 보호에 치중한 결과 빚어지는 역차별과 제도·전통·문화의 왜곡에 대한 반발이 한창인 것과 맥을 같이한다. 지나치면 항상 역작용을 부르게 마련이다. 지난해 4월 총선 때 윤 대통령의 김건희 여사 비호 행태에 화가 나 조국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많듯이, 이번 보수의 결집도 이재명 민주당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보복적 지지’ 심리가 영향을 미쳤다. 자폭한 윤석열을 이 대표와 헌재, 공수처가 좀비처럼 되살려준 셈이다.계엄 이후 국민은 판사쇼핑을 하는 공수처의 얄팍함, 서부지원 판사의 월권, 헌재의 균형 잃은 행보를 목도했다. 사실 이런 행태의 뿌리는 문재인 정권으로 거슬러간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기본 존중이 있는 정상적 정치인이라면 아무리 자기편이 임명권을 가져도 절제를 한다. 좌우 이념 스펙트럼을 1~10으로 놓고 볼 때 최고 법원 판사는 4~6의 인물들을 지명해야 마땅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그런 절제의 양식이 실종된 시기였다. 오로지 주류세력 교체 욕심으로 전체 판사의 5% 이내인 우리법·국제법연구회 출신들로 진보 몫을 대부분 채웠다. 이번에 이 대표는 한술 더떠 헌법재판관 후보 2명을 모두 서부지원(정계선, 마은혁)에서 골랐다.판사에 대한 사상 검증은 위험하다. 하지만 일반 판사가 아닌 헌법재판관은 헌법의 최후 보루이며 최종 해석자다. 6·25전쟁을 ‘노동자 농민의 승리가 결정적이던 순간에 미 제국주의가 개입해 수백만 명을 살해한 전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미국이 2000여 광주시민(공식 집계 희생자는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학살을 지원했다’는 주장을 하는 단체와 관련된 전력이 있다면 이는 차원이 다르다. 그후 어떤 사상적 이념적 변천을 겪어왔는지는 남들이 재단할 수 없지만, 만약 국힘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과거 “빨갱이들이 주도한 좌익폭동”이라고 망언한 전력이 있는 변호사를 재판관에 추천했다면 민주당은 “당신네 추천 몫이니 상관없다”며 문제 삼지 않을 것인지 역지사지해 보라. 이 대표가 더 확실한 우리 편을 욕심내다 무리수를 둔 거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허물로 자기들 허물이 가려질 것이라 착각했지만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그렇다고 해서 윤 대통령이 보수의 결집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아파트 1층 주민이 현관 앞 복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고 소리쳤다고 가정하자. 주민들에게 포박된 그의 하소연인즉 2층 남자의 횡포에 참다 못해 경고용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한다. 층간소음은 물론이고 화단으로 담배꽁초를 마구 던지고. 항의하면 식칼로 위협하고, 관리사무소에 얘기하면 무슨 특수한 관계인지 은근히 2층 남자 편을 든다는 거다. 2층 남자의 평소 무뢰배 행태를 익히 알고 있던 주민들은 “오죽했으면…”이라며 동정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파트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방화 위협을 용서하는 건 결코 아니다. 윤 대통령은 보수 진영 내에서 그나마 최대한 우호적으로 봐주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동정심이 가는 악당’(심퍼테틱 빌런·sympathetic villain)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는 게 올바른 자기 위치 파악이다. 보수가 뿔이 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윤석열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며 계엄을 정당화시켜 주려는 것도 아니다. 나라의 앞을 보고, 나라가 바르게 가야 한다는 간절함에서 분노한 것이다.보수의 모처럼의 각성 분노 결집이 열매를 맺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윤석열이라는 존재다. 당장은 반(反)이재명 깃발에 결집했지만 결국 윤석열을 놓고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윤 대통령은 집권 2년 반 동안 부인만을 감싸며 왕이라도 된 듯 격노하고 고집을 부려 찍어준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다. 황당한 계엄령으로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속죄할 길을 고민해야 마땅하다. 그는 지난달 체포되기 직전 “임기 2년 반 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면 하루빨리 국힘당을 자유롭게 해주고 보수의 짐, 즉 스스로를 치워줘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영혼의 근수(斤數) 측정.’40년 전 읽은 단편소설 장면이 생각난다.외모 학식 재산 등 모든 걸 벗고 한 인간으로서의 무게, 즉 인격 양심 감성 등을 종합한 영혼의 무게를 재는 장면이었다. 나도 갑작스레 그 저울에 올라가게 된다면…? ‘윤석열 계엄사태’ 이후 대한민국도 저울에 올라섰다. 그런데 저울 바늘이 형편없이 낮은 숫자에서 춤춘다. 번듯한 외관과는 달리 국가 시스템의 실제 근수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만천하에 생중계된 ‘윤석열 계엄 소극(笑劇)’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심판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공정하고 엄격하게 법적 절차만 준수하면 크고 작은 난관을 뚫고 갈 수 있다. 그런데 내란죄 수사권을 가진 경찰을 제치고 왜 굳이 공수처가 나서서 윤 대통령에게 저항할 빌미를 줬을까. 공수처는 왜 관할 법원을 제치고 서부지법에 영장을 신청해서 ‘판사 쇼핑’ 논란을 자초했을까. 영장 담당 판사는 왜 영장에 월권적 내용을 넣어서 논란을 자초했을까. 행정담당자인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은 왜 계엄 위헌성에 대해 개인 의견을 내놓을까. 헌법재판관 8명 가운데 소장 권한대행을 포함해 3명이 우리법 또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라는 점에서 강경 우파들이 헌재의 흠결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는 상황인데 왜 불신의 단초를 제공할 경거망동을 할까.이런 사법기관들의 행태는 대한민국 시스템의 무게와 깊이의 경박함을 드러내준다. 우리 사회에는 세상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면 어떤 무리수를 둬서라도 그 행렬에 합류하고 눈도장을 찍으려 발버둥 치는 천박함이 팽배하다. 집단적으로 흥분해서 가장 거대한 상자로 포장해 때려잡는다. 경중은 따지지 않는다. 천박한 달려듦에는 국가 기관들도 빠지지 않는다.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수권 받은 국가 기관의 권한 행사는 최대한의 절제와 신중함을 견지하며 이뤄져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보다 더 흥분한 기색을 드러낸다. 외형상 법적 절차만 밟으면 된다는 듯 꼼수를 동원하는 데서 화려한 과자 포장지 속의 초라한 내용물처럼 시스템의 얄팍함이 드러난다.우리 사회에서 숙의민주주의, 상식과 절제가 사라지고, 법치주의가 법절차만 등에 업으면 되는 요식행위로 전락한 것은 문재인 정권, 특히 2020년 봄 코로나 사태로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뒤부터다. 교조주의적인 좌파 성향 대통령, 그리고 민주주의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586 출신들이 주축이 된 슈퍼 의석이 결합해 무소불위의 힘자랑이 시작됐고, 지난해 하반기 공직자 탄핵 남발, 예산 농단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런 행태를 내놓고 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지역, 이념진영의 ‘묻지 마 지지’가 갈수록 더 공고화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특정 지역, 지지층의 이익에 영합하는 방향이기만 하면 금배지가 보장되기 때문이다.국회 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찰 국정원 등 정치바람이 세게 부는 상당수 조직들에선 지역·이념적 연줄에 얽힌 충성 경쟁과 미래권력 향방을 쫓는 이익 계산 바람이 불고 있다.87년 체제의 한계라고들 얘기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빚은 문제다. 문재인이라는 시대착오적 이념편향 정치인이 박근혜 탄핵 덕분에 횡재하듯 정권을 잡아 나라를 갈라치고, 그 여파로 윤석열 이재명이라는 권위주의적 인물들이 양쪽 진영의 지휘봉을 쥔 게 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윤석열 이재명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헌법상 권한을 빙자한 권력남용도 닮은꼴이다. 윤 대통령이 헌법 요건에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계엄 선포를 강행한 것이나, 이 대표가 취임 이틀밖에 되지 않은 방통위원장을 비롯해 검사 판사 감사원장 등의 탄핵이 헌법 요건을 충족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다연발 탄핵을 강행한 것은 닮은꼴이다. 윤이 직권남용이면 이도 직권남용이고, 계엄선포 자체가 헌법농단이면 공직자 탄핵 남발도 헌법농단이다. 라이터 불장난을 주유소에서 했느냐, 골목 쓰레기통 앞에서 했느냐처럼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죄목은 같다.물론 계엄선포 과정의 법 절차 이행 미비, 그리고 내란 혐의는 별개의 문제다. 윤 대통령이 국회 병력투입, 체포시도 등으로 국회의 판단 과정을 방해하는 행위를 계획했다면 이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윤 대통령의 내란 혐의는 계엄선포 자체가 아니라 이 대목에서부터 본격화한다.일극체제 구축에 집착해 전통 깊은 정당을 망가뜨린 점도 닮은꼴이다. 윤 대통령의 여당 사당화는 실패했지만 이 대표는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이재명이라는 존재가 민주당 재집권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민주당의 집권은 국회 슈퍼의석과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동시에 갖는 일극체제의 완성을 뜻하는데, 그 체제의 절대 권력자가 될 사람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전투적 공격적 성향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많은 국민이 주저할 것이다.‘170석 의회만 갖고도 저렇게 힘자랑을 해대는데 대통령까지 차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대한민국은 이재명이 원하는대로 다 할 수 있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 대표가 넘어야할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2030 세대 수백만명이 해외주식에 투자하는 시대에 한미일 동맹 강화를 탄핵사유로 여기는 시대착오적 발상의 이미지도 장애물이 될 수 있다.대한민국이라는 얼굴의 양쪽에는 각각 커다란 혹이 달려 있다. 양측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들은 그게 자신의 살덩이라며 떼어내면 안 되는 것처럼 지키려 한다. 그러나 혹은 혹일 뿐이다. 달리기 선수의 다리에 달린 모래주머니처럼 먼저 떼어내는 쪽이 이긴다. 윤 대통령 체포로 우파는 혹을 떼어내는 수술대에 강제로 눕혀졌다. 반대편의 혹마저 떨어져 보수 진보 양 진영의 리더들이 동시에 교체되면 대한민국 정치는 대전환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국민 절반은 나머지 절반의 지도자를 거부하는, 지난 수년간의 반목이 더 심한 형태로 이어질 것이다. 대전환이냐, 과거보다 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냐, 대한민국은 기로에 서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저 감옥 가나요?”명태균 사태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올 초가을, 유명 역술인 A 씨에게 모녀가 찾아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과 장모였다.“모녀가 와서 ‘나 감옥 가냐’고 묻더군요.”“미쳤네요. 선생님 것(역술)이 어떻다는 게 아니라, 자기 남편이 평생 검사였으니 정답은 자기 남편이 알지….”(A 씨 지인)“그래 말입니다, 허허.”물론 당시 특검법 공방 상황에서 김건희 여사가 느꼈을 불안감 압박감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대통령실 안팎에 법률 자문·예측을 해줄 최고의 전문가들이 숱한데도 역술인을 찾아가는 모습은 윤 부부가 인생 항로를 헤쳐가는 방식이 세상의 상식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를 재확인시켜 준다.자기 진영 안방에 폭탄을 터뜨리며 정치적 자폭을 한 윤 대통령의 행동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정신의학적 분석은 물론이고 역술·무속의 영향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근저에는 부인에 대한 맹목적 애정이 있는데, 그 부인은 무속에 상당히 심취한 데다 자기가 정권 창출의 주역이며 정치와 사람 포석에 있어서는 남편보다 내공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윤 대통령은 난제에 닥쳤을 때 정상적으로 풀어갈 문제 해결 방식 프로세스를 훈련받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검사·수사관들을 대거 풀어 다 압수해 오고, 피의자가 소변을 지리도록 겁을 줄 수 있는(신정아 씨의 자서전 주장) 그런 일방적 힘의 우위 상태에서 상대를 다루며 목적한 바를 이뤄가는 과정을 수십 년 반복하다 보니, 일반 직장생활이나 자영업 3년만 해도 체득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작용 반작용을 예측 계산하고 적절한 방식을 찾아가는 상호관계 훈련을 전혀 거치지 못한 것이다.올가을 김 여사는 체중이 40kg도 안 되는 상태였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극심하면 물도 마시지 않으며 남편의 속을 끓게 했다. 그런 부인에게 남편은 벼락부자가 자식에게 묻지 마 애정을 퍼붓듯 시종일관 감싸며 권력을 나눠줬고, 부인 문제의 상식적 처리를 요구하는 모든 이를 원수로 여겨 적대했다.초등학교 줄반장만 되어도 조심했을 기초적 공사(公私)구분을 안 한 결과가 오늘날 파면과 구속 위기에 처한 참담한 모습이다. 부인도 머잖아 사법처리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당사자 부부만 폭망한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이 계엄이 황당무계한 오판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신 강경 지지층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바람에 보수는 다시 갈가리 찢길 위기에 놓였다. 윤 대통령이 보수진영을 궤멸 위기로 내몬 데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결과적으로 좌파가 침투시킨 트로이 목마 같은 역할을 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면 조금이나마 속죄할 길은 있다.첫째, 하루빨리 스스로 국민의힘을 탈당하는 것이다. 무조건 자신을 싸고도는 맹목적 지지층을 향해 “보수진영은 더 이상 나의 탄핵 문제로 다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계엄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지지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수사기관과 헌재 심판대에서 하라. 더 이상 보수진영 내에선 윤석열을 주제로 한 싸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둘째, 만약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된다 해도 개헌에 필요한 일정한 기간을 거쳐 자진 하야할 것임을 약속해야 한다. 절대다수 국민들로부터 과대망상·정신착란 상태 아니냐고 의심받는 상태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겠는가. 억울하다고 여기기 전에 자신의 판단력, 정서적 상태가 정상인지를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한다. 국회 의석 거의 3분의 2를 적대적 야당이 갖고 있는 상태에서 계엄은 결코 성사될 수 없다는 기본적 사실 관계를 외면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리는 그 판단력은, 무속의 영향으로 맹목적 성공 믿음을 가졌거나 신체적으로 판단력 상실 상태에 빠졌거나 둘 중의 하나일수 밖에 없다. 병정놀이보다도 허술한 준비로 무모하게 밀어 붙인 자신의 나사 빠진 업무 추진 능력도 자체 진단해보라.셋째, 부부 모두 감옥에 가는 상황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등 사법절차를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침대축구’ 같은 저질스러운 행태는 보수의 사전엔 없다. ‘저질 좌파’나 하는 짓이다. 보수의 품위를 훼손하면 안된다. 군 통수권자로서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장병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물어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정치인 윤석열은 전통과 역사가 있는 정통 보수정당에 3년 전 영입돼 벼락승천(陞遷)하듯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가 잠깐 머물렀던 한국의 정통 보수정당은 그로 인해 씻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 윤 대통령은 이제 자신과 이 당의 인연은 끝났음을 인식해야 하고 보수정당은 ‘윤석열 악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국힘이 윤석열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윤 대통령은 보수의 지지로 당선됐지만 보수의 핵심적·시대적 요구를 외면했다. 그는 문재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울산 선거 부정, 원전 수사 등 정의 실현은 매번 문재인 턱밑에서 멈췄고, 보수는 절망했다.보수가 윤석열과 분리돼 탄핵 찬반 수렁에서 벗어나야, 천운의 횡재를 한 듯 흥분한 야당과 좌파세력이 덮어씌우고 있는 선동 프레임에 맞설 수 있다. 국힘 일각에서 결별을 망설이는 유일한 이유는 이재명 대표 때문인데, 당당하게 윤석열을 빨리 손절할수록 보수에겐 회복 기회가 커진다.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힘이 윤석열을 청산하면 이재명을 청산하지 못하는 좌파에게 할 말이 생긴다. 만약 대선에서 보수가 참패한다면 이는 이재명이 강해서가 아니라 보수가 윤석열 후유증으로 분열된 채 반(反)이재명 이외에 보수가 열어갈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리스가 반(反)트럼프만 외치다 참패했듯이.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패악질을 일삼아 온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 한밤중 용산 대통령실에서 중계된 소극(笑劇·Farce·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짤막한 희극) 같은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를 3년 반 전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 실내로 옮겨 보자. “선배님, 이제 그만 가져오셔도 됩니다.” 문재인 정권의 불의에 맞서 사표를 던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아직 선거 출마를 선언하기 전의 시기였다. 윤 전 총장의 자택에 60대 초반 남성이 초인종을 눌렀다. 초청하지 않아도 거의 매일 찾아오는 그의 손에는 여의도 정가 동향을 정리한 문서가 들려 있었다. 충암고 1년 선배인 남자는 윤 전 총장을 “아우님”이라 호칭했다. 문서 내용은 허술했다. 하지만 그 정성이 지극해 윤 전 총장은 “힘드실 텐데 그만 가져오셔도 된다”고 조심스레 사양하기도 했다. 그 후 대선 캠프를 꾸린 윤 전 총장은 그 선배를 외교안보팀에 넣어줬다. 거기서도 보고서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소리가 나왔다. 팀장은 우회적으로 “직접 쓰기 힘드실 텐데 현역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들한테 시켜 보지 그러느냐”고 권했고 보고서 내용이 업그레이드됐다. 고교 후배의 집에 드나든 그 전직 장성은 윤석열 정부 출범과 더불어 대통령 경호처장이 됐고, 2년 4개월 뒤에는 국방장관이 됐다. 그러고는 장관 취임 3개월 만에 황당하고 엉성해서 ‘자학 개그’라고 불러도 좋을 계엄 사태의 ‘조연’을 맡았다. 조연이라고? 김용현 국방장관이 계엄을 건의했으니 주연 아니냐며 갸우뚱할 독자들을 위한 설명은 잠시 후에 하겠다. 게재 요일이 정해져 있는 고정 칼럼은 보통 며칠 전부터 준비한다. 오늘 자에 게재될 칼럼도 이미 지난 화요일 오후쯤 제목과 내용의 골격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제목은 ‘국민은 민주당과 이재명을 탄핵하고 싶다’였다. 공직자 탄핵 남발과 예산 농단 등 민주당의 의회 권력 남용이 건국 이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여서 곧 민심의 역풍을 맞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사람 됨됨이를 알고 싶으면 권력을 줘보라고 했는데, 현재 민주당의 힘자랑은 이재명 정권에서 펼쳐질 전횡의 예고편이므로 스스로 낙선 운동을 하는 셈이라는 논지였다. 이 대표가 175석 권력에 취해 자기 발등을 찍고 있다는 게 최근 필자가 취재한 중도층과 온건 보수층의 민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적처럼 수호천사가 다시 나타났다. 지난 총선 때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을 연상케 하는 공천 학살로 참패가 예상됐던 이 대표에게 선거 직전 막판 등장한 윤석열 부부가 대승을 안겨줬듯, 이번에 윤 대통령은 정치사에 남을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이 대표 구원자 역할을 해냈다. 필자 취재에 따르면 계엄은 순전히 윤 대통령 본인의 흥분 격노에 의해 돌발적으로 결정됐다. 윤 대통령을 결정적으로 분노에 휩싸이게 만든 사안은 민주당이 경찰의 대공 수사에 쓰일 특활비 특경비까지 삭감한 대목이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없애더니 이젠 경찰 수사까지 마비시킨다고? 종북주의자들이 정말 국회 깊숙이 침투한 것 아니냐며 격노했다고 한다. 계엄을 선포해 봤자 국회 표결로 무효화된다는 엄연한 현실은, 군이 알아서 조치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묻혔는데, 믿었던 국방장관은 고도의 정교함과 치밀한 사전 준비가 요구되는 이런 고난도 작전을 실행할 능력도, 시간 여유도 없었다. 즉흥적, 감정적이며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윤 대통령의 성정과 예스맨 충성파만 선호하는 인사 스타일이 합쳐져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다. 윤 대통령은 “야당 행태를 보라, 내가 뭘 잘못했냐”며 여전히 억울해한다고 한다. 물론 야당이 상상 초월 수준으로 저급하고 노골적인 의회 독재 행태를 보이는 건 국민도 다 안다. 하지만 야당에 슈퍼 의석을 만들어준 장본인이 자신임을 잊어선 안 된다. 명품백 사건 직후 물도 안마시고 드러누운 아내를 설득해 사과하게 했다면, 선거 직전 의료대란·이종섭 출국 등의 현안에 대해 고집만 조금 꺾었더라면, 총선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 대표는 총선 때 윤 대통령에게서 175석 요술방망이를 선물 받은 데 이어 이번에는 대권행 고속도로를 선사 받았다. 이대로 탄핵을 밀어붙이면 사법 리스크는 사라지고 대권 쟁취는 식은 죽 먹기다. 보수는 딜레마다. 국민의힘이 최고 지도자로서의 신뢰 자본을 잃은 윤 대통령을 감싸고 돌면 공멸이 불문가지다. 하지만 탄핵이 된다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다. 계엄 선포는 자폭 테러나 마찬가지였는데 폭탄을 터뜨린 곳이 상대 진영이 아니라 자기집 건물 한복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친윤계는 윤 대통령의 탈당 출당조차 반대하고 있다. 정말 민심을 전혀 모르는 안이한 집단이거나, 정권이 좌파에 넘어가는 게 TK 등 보수 아성에서 의원직을 오래 하는 데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이기적 계산의 발로다. 윤 대통령의 정치 생명은 회생 불가능하다는 엄중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책이 모아진다. 보수가 궤멸을 피하려면 지지층 재결집을 호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을 쌓아야 한다. 보수 몰락의 최대 요인이었던 김건희 여사 문제가 특검법 통과로 엄정한 사법 처리 절차 궤도에 올라서고, 계엄 주도 세력이 처벌 받고,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쥐 죽은 듯 눈과 귀에서 멀어져야만 등 돌린 온건 보수 시민들이 “그래도 헌정 중단은 안 된다. 좌파 너네들은 더 큰 허물이 있지 않느냐”며 재결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야당이 강성 좌파와 손잡고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사회를 더 극심한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넣으면 국민의 냉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계엄령 사태의 책임은 냉정하게 법에 따라 엄히 물으면 된다. 계엄령 사태에 국민이 분노한다고 해서 야당의 의회 독재와 이 대표의 범죄 혐의에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님을 한시라도 잊어선 안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2년 반 동안 실망을 거듭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마지막 반전의 전기(轉機)를 기대했을 것이다. 지지율 10%대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은 데다 마침 임기 반환점이므로 진정성 있는 반성과 쇄신의 다짐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윤석열 대통령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말 이 사람은 안 바뀌겠구나’ ‘변할 의지도, 자신을 변화로 이끌 내적 역량도 없구나’….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마저 다 고개를 돌리고 포기한다. 성공한 대통령을 기원하며 애정 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던 이들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며 입을 다문다. 지난달 21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면담부터 지난주 기자회견까지의 짧은 기간에 윤 대통령은 남은 임기에 대해서도 암담한 전망을 하게 만드는 특질들을 드러냈다. 첫째, 내재적 관점으로만 자신을 바라볼 뿐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시켜 보는 훈련이 전혀 안 돼 있음을 드러냈다. 끝없는 자기합리화와 장광설이 그래서 나온다. 둘째, 그의 ‘와이프 퍼스트’ 철학은 일반인의 가족 감싸기와는 완전히 다른 초(超)상식의 수준임이 드러났다. 소설·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세속의 도덕가치 시선 판단을 뛰어넘는 절대적 차원의 결속이다. 윤 대통령이 진짜로 김 여사의 행태를 고 육영수 여사가 가정 내 야당 역할을 했듯 “여보, 회의에서 너무 화내지 마세요”라고 조언하는 그런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내가 정권 최고 실력자 행세를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로서의 조언’이라고 규정했다면 이는 국민 기만이고, 육 여사에 대한 모독이다. 대통령 부부는 변할 의향이 없다. 포화가 거세니 잠시 웅크린 것이다. 김 여사가 그간의 권력 행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뉘우치고 앞으로는 정말 아내로서의 역할만 충실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직접 사과하러 나왔을 것이다. 처참한 성적표에 관중은 떠나고 전광판은 꺼졌지만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렵다. 트럼프 당선으로 격랑에 휩싸인 국제 무대로 달려갔는데 반짝 반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효과만으로는 길게 가지 못한다. 길게 보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할 외교안보 현안에서 성급하고 성과에 안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 업보(業報)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난다. 업보는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어쩌기 힘든 운명적 굴레다. 윤 대통령이 한 대표와의 면담 다음날 부산 범어사 방문에서 “업보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김 여사 문제처럼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데도 안풀고 있는 일을 업보라 칭하긴 곤란하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게 ‘윤석열 정권’이라는 존재가 던지는 고민이야말로 업보라 할만하다.“우리 대통령”이라고 옹호하다가는 공멸하기 십상인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싫든 좋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채 정권 재창출이라는 고지를 올라야 한다. 그 험난한 등정을 위한 필수 선결 조건은 정권의 남은 임기 동안 김 여사 문제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야당이 특검법 수정안을 냈으니 여당도 위헌성과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며 국면을 주도해야 한다. 특검 대상도 도이치모터스와 명품백, 그리고 용산 이전 과정에서의 김 여사 관련 특혜 여부로 집중해야 한다. 명태균 관련은 검찰 수사를 지켜본 뒤 추진해도 늦지 않다. 김 여사로선 억울한 누명과 가짜뉴스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잘못이 있다면 지금 처벌 받는 게 낫다. 지금 피하면 다음 정권에서 몇 배 더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천지가 무너져도 검찰 포토라인에 못 서겠다면 조용히 아프리카 등 제3세계로 가서 임기말까지 봉사 활동하라. 여사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국민이 다시 윤 정권 지지로 돌아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보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의 경험 때문에 보수는 그동안 사실상 윤 대통령 부부에게 인질처럼 매인 형국이었다. 좌파에 정권이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걱정 때문에 어떡하든 설득해 끌어안고 가려 했다. 하지만 이러다간 초가삼간 마지막 칸까지 다 태워 먹을 수 있다. 한동훈 대표는 그동안 민심을 전달하려 노력했으나 최근엔 현상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윤석열 아류’가 된다. 윤 대통령의 방향을 바꿔주는 역할을 하면 국민이 다시 쳐다보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상태라면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다. 보수진영은 주체적으로 정권 재창출 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를 주도할 동력은 국힘 당원과 지식인들이다. 하루빨리 부인 문제를 정리하고 정상궤도로 돌아와 달라는 당원들의 뜻이 서명운동을 비롯한 조직적 내부 혁신 운동으로 분출돼야 한다. 대학, 싱크탱크, 단체 등의 온건 보수 지식인들도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쇄신을 거부하면 아예 보수진영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압박을 해야 한다. 야당·좌파의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엄중히 경고하면서 대통령의 변화를 끌어내는 보수 내부 혁신운동이다. 보수진영 원로와 중진, 잠룡들은 개인적 이해타산을 떠나서 다음 세대 보수 리더들이 등장할 토양을 마련해줘야 한다. 내가 뽑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일 건 없다. 보수가 뽑았어도 잘못하면 보수가 엄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의 새로운 터전이 열릴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결국은 이 지경까지 왔다. ‘김건희 특검’을 피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헌법과 법치주의를 모독하는 편향된 내용의 야당 특검법이 대통령 거부권의 장벽을 넘어서는 장면이 머잖아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헌정사에 상처가 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주된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김 여사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주는 발언들이 한동훈 대표와의 면담 다음 날 부산 범어사 방문에서 나왔다.“업보로 생각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업보는 현 상태에선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쩔수 없는 운명적 굴레다. 그런데 김 여사 사태는 대통령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업보라 여기는 건, 비유하자면 사탕과 과자를 끊지 못해 초고도 비만 위기에 처했는데 그걸 끊을 생각은 않고 비만은 나의 업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국민을 위해 좌고우면 않겠다”는데, 지금 향하는 길은 후보 윤석열을 지지했고 지금도 윤 정권이 정상궤도로 복귀해 성공하길 염원하는 수많은 국민의 뜻과 정반대 방향이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는 건 나라를 위해 옳은 길을 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오해로 비난을 받아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질 때 하는 말인데, 자기 아내의 비리 의혹을 감싸는 일에 국민과 대의명분이 끼어들 자리가 어디 있는가. 지금 대통령 부부에게 쏟아지는 건 우중(愚衆)의 돌팔매가 아니라 공정과 상식을 회복시키라는 정당한 요구다.윤 대통령이 이런 착각에 빠진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좌파의 선동과 민의를 혼동한다. 윤 대통령은 김건희 논란이 선동과 가짜뉴스 탓이며, 여기에 보수진영과 여당 일부까지 휩쓸려 부화뇌동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광풍(狂風)에 김 여사가 희생양이 됐는데 사내 대장부가 나 하나 살자고 아내를 마녀사냥의 제물로 던져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김 여사를 향한 비난에 좌파의 가짜뉴스와 선동, 편견이 섞여 있음은 분명하다. 그게 90%쯤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머지 10%의 진짜 허물을 감싸고 법치의 예외 특권지대에 두려다 90%의 선동과 뒤섞이게 만든 게 대통령 본인이다. 필자는 민심은 과학이라고 본다. 이는 민심이 항상 100% 옳다는 뜻이 아니다. 민심은 선동과 가짜뉴스에 휩쓸려 광풍이 될 수 있다. 산사태가 쏟아질 때 그 흙탕물엔 온갖 가짜뉴스 선동 괴담이 뒤섞인다. 이 단계에서 광풍을 민심으로 오독(誤讀)하면 억울한 희생양을 양산한다. 괴담에 휩쓸린 군중의 광란이 역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끈 사례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했다.그러나 민심의 강물이 본류에 이르면 오물은 걸러지고 투명해진다. 숙려 과정을 거친 단계의 민심은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김 여사 논란은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녹취들이 터져나왔고, 항소법원 판단도 나왔다.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대국민 약속과 달리 공동정권 주인인 양 행세한 단초들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내를 사법 절차의 심판대에 서게 하는 건 희생양으로 내놓는 게 아니라, 특권의 갑옷을 벗고 검사 부인, 대통령 부인이 아니었다면 누구나 거쳤을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것일 뿐이다.윤 대통령이 민심과 괴리된 착각을 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버럭 성미다. 여사 문제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 호통 벼락이 떨어지니 바른 소리의 씨가 마르고, 구미에 맞는 얘기를 해주는 유튜브만 보니 여론과 동떨어지게 된 것이다. 만인환시리라는 걸 개의치 않은 채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잦은 것도 옆에서 만류해 줄 참모의 부재 때문이다. 한 대표에겐 “우리 의원들이 야당 편에 서면 나도 어쩔 수 없다”며 담대함을 보여놓고 돌아서선 바로 원내대표를 불렀다. 이중적인 속내가 드러나는 그런 장면은 목도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인데도 정작 본인은 투명 유리병 바깥에서 지켜보는 국민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한 대표도 정치력이 부족했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의 고집을 꺾어 설득하는 건 토끼 간을 빼오듯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한 대표가 요구한 사항들은 옳았지만, 여당 대표라면 언론이나 야당과는 전달 방식이 달랐어야 했다.윤 대통령의 극적인 인식전환이 없는 한 특검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김건희 이슈를 거부권에 의지해 계속 덮어 둔다는 것은 보수 전체의 공멸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여권 내에 계속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검은 보수진영 전체에 커다란 질곡이 될 것이다. 특검의 칼날이 광란하듯 춤추며 밑바닥의 잔재물까지 다 들춰내다보면 탄핵 세력에 악용될 사안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 특검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여사 문제를 이대로 덮어두면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리더십 관리에 치명적 걸림돌이 돼 국정 운영의 동력을 소진케 하고 보수정권 재창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검이 시작되면 보수의 초가삼간이 흔들리겠지만 그래도 김 여사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려면 청산 변곡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최선의 길은 윤 대통령 스스로 팔을 잘라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었지만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았으니 타의에 의해서라도 도려내야 한다. 회복은 지난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그게 두려워 수술을 기피해서는 안된다. 아직 임기가 절반 남았으므로 특검 광풍이 지난 뒤 국정동력을 되찾을 시간이 있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특검이 되게 하려면 윤 대통령이 “합리적인 안이라면 받으라”고 한 대표에게 프리핸드를 줘야 한다. 그래야 여당이 혼연일체가 돼 특검법안 내용을 놓고 야당과 줄다리기를 벌일 수 있다.지금 상태에선 한 대표가 특검 내용을 갖고 야당과 협상에 나섰다가는 친윤의 반발로 당이 깨지는 위험을 안아야 한다. 야당도 분열된 여권의 속사정을 알기에 자기들 뜻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야당 원안이 여권 이탈표를 업고 통과될 공산이 큰데, 이는 헌정사와 법치주의, 대통령 부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밥그릇을 엎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그러려면 윤 대통령이 하루빨리 귀를 열고 민심을 들어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놓고 여권 내에서 왈가왈부하는데, 다 부질없다.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단계를 한참 지나버렸다.결론부터 말하면 유일한 해법은 사법적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 대선 때부터 3년 넘게 보수진영 전체를 욕보이고 있는 여사 문제 수렁에서 헤어나려면 김 여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반 국민 누구나에게 적용될 절차를 거쳐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적 처분을 받는 것 이외엔 그 어떤 출구도 없다. 명품백 사건이 터진 직후인 지난해 12월초 필자는 김 여사가 국민에게 사죄하고 사가(私家)로 가 근신해야 하며, 윤석열 대통령이 배우자 문제의 재발을 막을 근본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여사 리스크가 돌이키기 힘든 지경까지 치달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만약 그런 민의에 순응했다면 최소한 명품백 문제는 일단락됐을 것이고, 그 후 10개월간 터져나온 온갖 새로운 논란들도 예방됐을 것이다.부끄러운 일을 행했으니 사과는 당연히 해야 하지만 이젠 사과만으로는 안 된다. 명품백 수수 같은 참담한 일이 공개됐는데도 전당대회 문자 공개, 대통령실 이전 공사 업체 선정 논란, 공천 개입 논란 등의 낯부끄러운 일들이 계속 터져나오는 걸 보면서 국민들은 김 여사에 대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정말 최소한의 공사 구분 의식, 자기 위치 파악 능력, 윤리관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로 권력 정점부에 들어가 있구나라는.설상가상으로 새로운 논란의 눈뭉치들이 구르면서 더 큰 눈사태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커지고 있는 공천 개입, 그리고 끊임없이 소문이 도는 공공기관·공기업 인사 개입 논란은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안길 수 있는 소재들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 주변에선 브이원(V1) 브이투(V2)라는 말이 돌았다. 브이는 VIP를 줄인 표현으로 대통령을 지칭한다. V2는 김 여사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취지의 신조어인데, 필자는 이를 미확인 풍문을 근거로 한 과장된 용어로 치부해 왔다.그러나 요 몇 달 필자는 김 여사가 실제로 공기관 인사에 관여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는 사례들을 접했다. 전언으로 들은 것들까지 합치면 여사의 영향력 행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정황이다. 더 놀라운 대목은 과거 정권들에서 처럼 베갯밑 송사로 대통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뜻을 관철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김 여사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자신이 이런 영향력 행사를 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전언이다.김 여사는 자신이 윤석열 정권 탄생에 상당한 지분이 있다고 여긴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검사 시절 정치적 탄압에 의해 좌천됐을 때 로펌에서 고액 보수를 제시하며 영입하려 했는데 자신이 검사의 길을 계속 가도록 설득하는 등 고비마다 자신의 조언이 남편을 오늘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 아무리 훌륭하게 제자를 키웠어도 제자의 월급을 같이 쓰자고 할 수 없듯이, 김 여사는 국민에게서 실오라기만큼의 권력도 위임받은 적이 없다.사인(私人)이 국정에 개입하면 그게 국정농단이고 그걸 막기 위해 시스템이 있는 건데, 시스템을 요식행위로 만들어버리는 행위가 용인된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대통령의 공천 개입도 범죄(박근혜 공천 개입 징역 2년)인데, 하물며 배우자가 공천이나 인사에 손을 댄다면 초가삼간이 아니라 정권 전체, 보수진영을 태워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어디서 녹취라도 나온다면 탄핵몰이에 광분하지만 정작 윤 대통령이 실정법을 위반한 내용을 찾을 수 없어 재료 빈곤에 시달리는 좌파에겐 최대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여권은 이런 눈사태가 본격화하기 전에 신속히 김 여사가 사법적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과거 전직 대통령들 수준에 버금가게 소환돼 밤샘 조사받고, 만약 조금이라도 실정법 위반 혐의가 있다면 영장실질심사를 받아야 한다. 귀 막고 시간을 보낸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덮고 가면 다음 대선에서 여당 후보들이 먼저 여사 문제를 공약할 것이다. 여야 누가 이기든 그때는 종합세트로 탈탈 털리는 사법 심판을 받게 된다. 다음 대선까지 버티기도 쉽지 않다. 특검법에 대한 여당 이탈이 그나마 적은 이유는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야당의 특검법이 너무 편파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특검 광풍이 몰아치고 만약 의혹들이 사실로 확인되면 여권 전체가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들이 김 여사가 억울하다고 여겨서 특검법에 반대하는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의원들 머릿속엔 이대로 거부권에만 기대 버티는 건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인식도 함께 퍼져 있는 그야말로 딜레마 상태다.여권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밀리고 밀리다 이탈표로 인해 특검법이 거부권을 넘어서는 상황이다. 그때 맞게 될 매는 지금보다 몇 배 혹독하고, 여권은 “우리는 대통령 부인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집어넣는다”는 생색도 못 낸 채 공멸 위기를 맞게 된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넘게 남아 있다. 자기 팔을 도려내는 결단이 대통령과 여권 전체는 물론 김 여사를 위해서도 현명한 해법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검찰 수사가 흉기가 되고 정치보복 수단이 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지난 일요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방문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문다혜 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문 정권 비리 청산’이 중단되어야 할 정치보복인지, 정의의 복원을 위해 반드시 완수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인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기준점을 따져보면 되기 때문이다.첫째, 정치보복 여부는 비리 의혹의 내용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기획수사로 주변까지 샅샅이 뒤져 흠결을 찾아내고, 얼기설기 엮어 몰아갈 경우 이는 정치보복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사안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야당 내에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재 드러난 의혹들은 정치적 내용이 아니다. 개인비리 의혹도 정치보복이어서 조사를 못한다면 법질서는 왜 존재하는가. 이 대표도 정치보복 주장만 펼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앞으로 본격적으로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원전, 통계 조작, 대중(對中) 삼불일한 약속, 대북정책 의혹 등의 주제들 역시 해당 사건의 장본인이 문재인이든 윤석열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덮어주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 결코 아니다.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응당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내용들이고, 묻혀 있는 최종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만 후속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다.둘째, 전임 정권 청산이 반복되면 국민 분열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미 정신적 내전 상태인 좌우 진영 간 대립이 더 격화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리를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걸 관례로 만들 수는 없다. ‘전임정권의 허물을 처벌하는 악순환은 멈춰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진실도 밝히지 않은 채 덮어주고 가는 것이 화해와 용서는 아니다. 서로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건 화해가 아니라 야합이다. 설령 윤 정부가 전임 정권 비리 청산을 하지 않는다해도 야당이 차기 집권할 경우 전임 정권 청산의 수레바퀴는 다시 더 거세게 돌아갈 것이다.협치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말장난에 가깝다.그동안 윤 대통령이 문재인 비리 청산을 뭉개 왔다고 해서 협치가 이뤄졌나. 좌파 진영과 친문 친명계가 보수 정부에 조금이라도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좌파는 압박을 느낄 때 협상장으로 나선다. 비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엄정하고 원칙적으로 임하는 게 결과적으로 협치의 지렛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셋째, 적폐 청산을 하려면 힘있는 임기 초에 했어야지 이미 임기 반환점을 목전에 둔 시점에 매달리면 소모적 싸움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들린다.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끝내 뭉개버리면 이는 전임 정권의 비리에 방조범이 되는 것이다.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라도 명확히 인식하고 실행한다면 평가받을 것이다.물론 늦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대통령실 주변에선 자꾸 검찰총장 탓을 하지만 통치권자가 명확한 방향 설정을 안 한 탓이 가장 크다. 국민은 윤 대통령이 자신을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의리 때문에 시대적 과제를 외면해 온 것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사실이다. 문다혜 건은 본질과 관련 없는 곁가지라는 지적도 백번 맞다. 울산시장 선거, 서해 공무원 사건 등의 최종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는다면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다. 청산해야 할 문재인 비리 리스트에는 사법적 정의 차원을 넘어 국가 운영 차원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내용들이 허다하다.남북 간에 어떤 내용과 제의가 오갔는지 후임 정부는 모른다. 정의용 당시 안보실장은 무슨 근거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했는지,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준 USB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대북 지원 약속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다 비밀로 봉해졌다. 중국에 삼불일한을 누가 어떤 워딩으로 약속했는지도 비밀이다. 그런 핵심 내용을 모른 채 후임 정부가 어떻게 전략을 짜고 정책을 구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통치권은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통치행위라해서 절대적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명백히 밝혀내야 하며, 결정 과정에서 법률 위반이 있었다면 처벌 받아야 한다.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사안이라면 감사원이 나서서 진상을 밝힐 수 있다.물론 저항도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지난 일요일 이재명-문재인 간의 ‘방탄동맹’이 구축됐는데 이는 2년 전의 데자뷔다.2022년 10월 감사원이 서해 피살 공무원 감사와 관련해 서면조사를 요청하자 문 전 대통령은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고 반발했고, 이 대표는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전 정부에 정치보복을 가한다”고 거들었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집권 기간에 임명된 감사원장을 공수처에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고 감사원법을 개정해 특별감사시 국회 승인을 의무화하겠다고 나섰다. 2년 전의 방탄동맹은 흐지부지됐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상대의 손을 놓으면 죽는다는 절실함으로 손을 잡을 것이고, 진영 내의 분열을 용납하지 않은 좌파 생태계 특유의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검찰을 흉기로 규정하며 반발하는 이 대표와 민주당에 제안하고 싶다. 문재인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을 그렇게 못 믿겠고 편파 보복수사가 우려되면 특검 도입을 선도하라. 정말 정치보복이면 특검에서 문 전 대통령의 결백이 다 밝혀질 것 아닌가. 국민이 가장 분노하는 점은 문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나라의 궤도를 이상한 쪽으로 틀어버리려 한 점이다. 진실을 밝혀 책임을 묻지 못하면 자기 멋대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권력자가 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국민이 정치 초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밀어준 것은 이 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심판을 위한 첫걸음을 이제 겨우 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늦은 만큼 더 확실히 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완고하고 고집불통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온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에 변화의 작은 싹이 움트고 있다. 2년여 만의 변화 조짐이다.첫째는, 최근 들어 격노 버럭 호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참모 등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이 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국회, 특히 야당과 맞상대해 싸우지 말라는 기조가 뚜렷하다고 한다. 기존에는 공격당하면 즉자적 감정적 반응을 보이곤 했던 게 사실이다. 화가 난 대통령이 친윤계 의원들에게 전화를 하면 충성파들이 나서 소리 높여 대신 싸우는 일이 되풀이됐다.그러나 최근 이런 대응이 눈에 띄게 줄었다. 야당 주도의 인민재판식 청문회, 상임위 막말이 이어지고 ‘김건희 살인자’론, 친일 공세 등이 계속돼 왔지만 대통령실은 사실관계를 설명하며 유감을 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야당의 싸움에 말려들지 말자는 대통령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189석 야당은 힘자랑을 하게 돼 있는데 대통령이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허공에 대고 소리치다 결국엔 다수 국민과 부딪히게 된다는 판단인 것. 실제로 정청래 최민희 등의 악 쓰는 소리는 메아리가 돼 본인들의 얼굴에 오물을 끼얹은 채 힘을 잃었다. ‘살인자’를 외친 전현희도 개딸들에겐 점수를 땄지만 대다수 상식을 지닌 국민 사이에선 혀를 차는 대상이 됐다. 만약 대통령실이 야당과 똑같은 톤으로 악다구니 했으면 언론은 양비론으로 갔을 텐데 조용히 대응하니 야당의 과격성 극단성만 부각된 것이다. 또 하나 작은 변화는 대통령이 술을 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 방문 때의 막걸리 건배, 군 간부들과의 격려 회식 등에서는 술이 등장하지만 사적인 술자리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최근 대통령 관저를 방문했던 인사들은 예전과 달리 이번엔 술 없이 저녁 식사만 하고 왔다고들 전했다. 경호 라인 쪽에서도 같은 얘기가 들려온다.물론 이는 미세하고 지엽 말단적인 일이다. 지도자가 분노를 절제하고 술을 자제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기본적인 덕목이어서 이를 두고 변화 운운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씁쓸한 일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리더십의 고질적 문제가 버럭하는 성미와, 무리수를 둬서라도 성질대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눈길 가는 변화의 싹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정권 정체성 찾기 움직임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을 정치로 불러내 대통령으로 뽑아준 지지자들의 핵심 요구가 무엇인지 잊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윤 정부 출범에 담긴 염원의 핵심은 공정과 상식의 복원,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잘못을 심판해 자유민주주의 토대를 다시 확고히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 정부는 이재명만 물고 늘어질 뿐 문 전 대통령 관련 온갖 의혹들에 대해서는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성찰이 있었으며 광복절 기념사에서 ‘자유’를 특히 강조한 것도 그런 연장선상이라고 한다. 검찰총장 교체 등과 맞물려 향후 문 전 대통령 관련 수사가 주목되는 배경이다. 검찰 경찰 인사에서도 공안 기획 기능 회복에 비중이 주어지고, 국정원 정상화에도 대폭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만약 이런 변화의 조짐이 흐지부지되고, 근본적 리더십 쇄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이는 정권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보수진영 전체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미래에 먹구름을 예고한다.총칼만 안 들었을 뿐 좌우, 여야 간에 정신적 내전 상태인 극한 대치 상황에서 보수 성(城) 내의 백성들은 어느 곳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게 현실이었다. 적군의 백만대군이 몰려오는데 이를 막으라고 추대한 총사령관은 부인·친구들만 감싼다면, 사령관으로 옹립했던 백성들은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총선 이후엔 일절 뉴스도 안 보고, 모임 자리에서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더 이상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관심도 없다”며 화제를 바꿔버리는 ‘등 돌린 지지자’들이 수두룩하다.진정한 리더십 변화의 핵심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다. 임기 후반기는 절대권력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보수 정권 재창출의 밑거름이 될 각오로 희생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과의 소통, 민생정책, 그리고 부인 등 가족 문제에 있어 공명정대함의 자세로 자기 팔이라도 잘라내겠다는 의지가 필수적이다. 당정관계에 임하는 철학도 바꿔야 한다. 이준석 축출에서부터 한동훈 사퇴 종용까지 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장기판 졸(卒)로 여겼던 행태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해 행위였는지 결과가 자명히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수십 년 검사 생활에서 굳어진 스타일이 바뀌겠느냐며 기대를 접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더구나 금연이나 금주처럼 본인의 의지만으로 실천하는게 아니라 리더십의 변화는 수많은 인간관계 및 현안들과 상호관계를 맺어가면서 이뤄져야 하므로 특단의 확고한 의지가 없으면 열매 맺기가 쉽지 않다.특히 정권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여건이 더 어렵다. 야당의 김 여사 특검 등 정치 공세가 거세지면 대응 과정에서 다시 강경론자들이 득세해 기존의 스타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하지만 주역(周易)에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해결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 몰리면 스스로 변화의 욕구가 강하게 생겨나기 마련이다. 윤 대통령이 특유의 결단력과 실천력, 공복(公僕)의식을 발휘해 변화해야 할 시기가 백척간두, 녹아가는 유빙(流氷) 위에 서 있는 바로 지금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본격 휴가철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곧 휴가를 떠날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에게 이번 휴가는 특별한 의미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휴가가 사치로 여겨질 만큼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윤 대통령과 측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비록 지지율은 낮지만 지금까지 기조대로 열심히 일해 가면 임기 후반기를 무난히 마치고 퇴임 후엔 나라 바로잡기 등 공적을 높이 평가받을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착각이다. 임기 전반기처럼 후반기를 보낸다면 윤 대통령은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우려가 크다. 물론 훨씬 더 무능하고 퇴행적인 세계관으로 나라 기틀을 부수고 민생과 국가재정을 망가뜨린 부족장 수준의 좌파 대통령도 있었지만, 좌파는 무조건 자기편 역사를 미화한다. 반면 우파의 거울은 상대적으로 훨씬 객관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역사의 평가는 혹독할 것이다.기억 속에서 김건희 여사 관련 대목들만 부각되고, 윤 대통령 본인은 국가비전과 국정철학조차 모호한 채 불통과 아마추어 이미지만 남을 수 있다.한미동맹 강화, 한일관계 정상화 등 국가 궤도 바로잡기는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윤석열표 업적이 아니다. 다른 보수 대통령이어도 당연히 했을 일이기 때문이다. 나라 궤도 바로잡기도 미완성이다. ‘문재인 의혹’은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고, 문 정권이 망가뜨린 국가정보원 등 안보 시스템도 무기력 상태 그대로다. 이런 비판적 채점이 맞는지, 잘해 오고 있다는 자체 평가가 맞는지 새로 생긴 민정수석실이 허심탄회하게 바닥 민심을 청취해 오라고 지시해 보길 바란다.최근 경남 의령의 지인으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평생 골수 보수로 지내온 시골 노인분들의 대화 내용이다. “윤석열은 그렇게 술만 먹는다며?” “난 범죄자 이재명이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어”….밤늦게까지 보고서와 씨름하며 지낸다는 대통령으로선 억울하기 그지없겠지만 시중 민심은 이런 게 현실이다. 이런 민심의 반영이 당심과 민심 모두 한동훈 압승으로 나온 전당대회 결과다. 보수 주류에서 윤 대통령은 사실상 버림을 받은 것이다. 여당에 뿌리도 없는 상태에서 아내만 감싸며 보수의 여망을 저버린 자업자득이다. 여당에 뿌리가 없기는 한동훈 대표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보수 회생을 바라는 여망에 올라타 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보수 민심이 윤 대통령을 완전히 버리고 가자는 것은 아니다. 한 대표가 그걸 혼동하면 그 역시 버림받게 된다. 보수는 오로지 보수를 살릴 길을 택하는 쪽에 열망을 모아줄 뿐이다.윤 정권의 또 하나 착각은 의료개혁 등을 밀어붙이면서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 관제사 파업 대응, 영국 대처 총리 시절 탄광노조 파업 대응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두 사례는 지도자가 소신과 결단력으로 법과 원칙을 지켜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한 전범(典範)으로 통한다. 하지만 의료개혁 문제를 다루는 윤 정권의 태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대처는 인도에서 수년 치 석탄을 수입해서 비축했고, 레이건은 파업 관제사를 대체할 인력을 충분히 확보해 대응했다. 평소 유머와 소통의 달인이었던 레이건이 취한 단호한 태도가 국민에 주는 호소력과 윤 대통령의 단호한 표정이 주는 느낌은 다를 수 밖에 없다.의사들을 변화시킬 백업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의료개혁에 필요한 수많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한 증원만 강조하며 ‘2000명’이라는 말뚝을 박아버린 것은 칭송받을 소신과 결단력이 아니라 무모한 단순화, 고집과 다름없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의료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진 것이다.복잡다단한 사안을 충분한 사전 준비와 종합적 프로그램 없이 밀어붙이다 거대한 부작용에 맞닥뜨린 현실을 인정해 유연성을 회복하는 것도 ‘기득권 세력 저항에 타협하지 않는 소신’ 만큼 용기 있는 일이다.윤 정권의 또 하나 착각은 국민을 쉽게 설득당하는 상대로 여긴다는 점이다. 명품백 문제에 대해 “매정하게 끊지 못해 아쉽다”는 KBS 대담 발언에 이어, “돌려주라 했는데 행정관이 깜박했다”는 최근 설명, 김 여사 출장 조사를 “현직 영부인 첫 조사”라고 의미부여하는 모습 등은 다 국민을 어수룩한 상대로 본 산물이다. 이런 해명들이 나올 때마다 상당수 보수층은 한숨을 내쉰다.국민 눈높이에 못 미친다는 표현은 점잖은 것이고, 시중에서 도는 표현은 “국민을 바보로 여기나 봐”라는 것이다.윤 대통령은 백척간두, 녹아가는 유빙(遊氷) 위에 서 있다. 좌파 세력의 극악스러움과 자금력 동원력은 최고점을 찍고 있다. 야당의 집요한 방통위 무력화 시도는 8·15 광복 직후 좌익이 툭하면 사보타주로 생산시설과 국가시스템을 마비시키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상임위와 이진숙 청문회에서 야당 위원장들의 행태에는 인민재판과 문화혁명 때의 조리돌림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 습도가 높아지면 곰팡이가 피어오르듯, 잠복해 있던 DNA가 윤 정권의 실정과 국회 189석이라는 습도를 타고 발현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사면초가를 극복할 길은 하나다. 임기 전반기와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즉, 싫어하는 사람 얘기를 듣고, “안 된다”고 반대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혼자 결정하지 말고 중의(衆意)를 모으면 된다.명연설로 유명한 처칠은 연설문 작성전 보좌관들을 런던 시내에 풀어서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게 뭔지, 불만이 뭔지, 당장 총리가 눈앞에 있으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물었다.임기 반환점이 불과 석 달 남았다. 지난 2년 3개월이 완행열차였다면 임기 후반은 고속열차처럼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윤 대통령의 휴가는 전반기 참담한 실패 원인을 냉철히 들여다보고 대전환의 구상을 다듬어 새로운 리더십으로 거듭나는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대다수 국민이 새 국민의힘 대표에게 바라는 건 무얼까. 친윤인지 반윤인지는 핵심이 아니다. 국민이 오로지 바라는 건 보수의 재건이다.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사람들, 차라리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방법은 선명하다. 그것은 윤석열 대통령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 핵심은 ‘김건희 수렁’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다.이번 김 여사 문자 파동으로 가장 심각한 대미지를 받은 사람은 누굴까. 전당대회를 흔들기 위해 문자유출을 기획한 이들은 한동훈 후보에게 타격을 줬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가장 심하게 대미지를 입은 사람은 대통령이다. 왜일까.김 여사의 문자 및 평론가와의 통화 내용은 명품백 사과를 안해 총선 참패로 연결시킨 장본인이 대통령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자신은 사과를 꼭 하고 싶었지만 반대 때문에 못 했다고 주장하는데, 대통령 말고 누가 여사의 뜻을 좌절시킬 수 있겠는가.그동안 윤 대통령은 부인 문제에 대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곳에는 좌파와 야당의 온갖 저열한 공작과 공세에 시달리는 심약한 부인을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지 못하는 애처가의 처지가 동의는 못 해도 짐작은 된다는 동정론도 혼재해 있었다.그런데 정작 사과를 못 하게 한 게 대통령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시 사과를 하는게 옳은지 아닌지는 찬반이 엇비슷하게 갈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 백에 아흔아홉은 사과하는게 옳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통령 부부 주변 비선 라인들은 자꾸 ‘박근혜 사과’를 거론하며 사과하면 인정하는 게 돼 더 깊이 끌려간다며 ‘사과 부작용론’을 주장했다는데,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일방적 의혹이나 침소봉대된 공세에 밀려 사과하면 사실로 인정해주는 역효과가 생길지 몰라도, 명품백을 받는 장면은 촬영돼 온 국민이 본 것이다. 대통령 주변의 인식이 국민 상식과는 동떨어진 섬나라, 극단적 강경 음모론이 지배하는 외계 행성에 머물고 있음을 김 여사가 드러낸 셈이다. 역사는 권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멸의 길로 유혹하는 강경파의 발호를 보여준다. 1979년 10·26 직전 부마사태 때는 탱크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차지철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진입해 다 끌어내자는 강경파들이 있었다. 간신배들의 강경론은 심기가 불편한 권력자에게 바치는 최고의 아첨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보신의 수단이다. 김 여사가 반대 때문에 사과를 못했다고 주장한 결과 세간에는 민심을 읽는 판단력이 여사가 대통령보다 나은 것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돌고 있다. 사과를 거부한 채 어이없는 KBS 대담 발언으로 중도 보수 마저 등돌리게 만든 게 여사의 감정적 반발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본인의 고집 때문이라고 폭로한 셈이기 때문이다. 주군(主君)을 기쁘게 해주겠다며 꾸민 계략이 결과적으로 주군을 욕보인 것이다.또는 만약 김 여사가 실제 사과할 의향도 없었으면서 주변 반대 핑계를 댄 거라면 자기 체면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깎아내리는 비겁한 일을 저지른 셈이 된다.어느 쪽이 진실에 가깝든 결론은 같다. 김 여사와 비선 세력을 대통령에게서 분리시키지 않으면 정권의 추락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총선 참패는 보수 진영에 국민이 내린 마지막 경고였다. 전당대회는 그 쓴 약을 마시고 처절히 다시 태어나야하는 장(場)이다. 그런데도 여사 문제가 문틈으로 연기 스며들 듯 다시 등장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사 문제의 수렁에서 허우적일 것인가. 대선 선거전 초기부터 지금까지 3년 넘게 잊혀질까 싶으면 터지는 일이 반복돼 왔다. 상당부분은 좌파 공작과 선동의 결과물이지만, 김 여사 스스로 야기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그동안 국민은 여사 문제가 터질때마다 막연하게나마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렇지만 그 기대는 점차 실현 불가능 쪽으로 기울었다. 정권 성공과 국가를 위해 사적인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는 그런 의지도 공직관도 결단력도 대통령이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따라서 이제는 제3자의 힘을 통한 해결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여론을 수렴해 반영해야 하는 집권당 대표에게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보수의 판을 깨서는 절대 안 되며 윽박질러서 될 일도 아니다. 설교하듯 교육해서도 안 된다. 밤새 술잔을 앞에 놓고 설득해야 한다.“정권이 살고 나라가 살고 보수가 살고, 역사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으려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일반인처럼 여사도 소환돼 엄중한 조사를 받게 하고 만약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정권 재창출이 되고, 다음 대통령이 제일 먼저 여사를 구해 낼 것입니다.”고집 센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 건 상대 의견이 옳다고 여길 때가 아니라, 자기 힘이 현저히 뒤져 불리하다는 걸 절감할 때다. 권력자를 설득하려면 눈물로 호소하되 등뒤에는 압박할 수 있는 칼자루를 갖고 있어야 한다.지금 정권이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이 그 칼자루다. 야당은 특검을 계속 압박할 것이고, 곧 레임덕으로 관료조직도 안 움직이게 된다. 보수층 다수도 등을 돌렸다. 야당은 여사와 관련해 뭔가 폭탄이 터지는 게 시간문제라고 고대하고 있다.온갖 인사나 논공행상과 관련해 직간접 관련자들이 그동안은 쉬쉬했을 것이다. 자리라도 하나 구할까 해서다. 그러나 임기 중반을 넘어 자리들이 다 채워지고 나면 여기저기서 불만이 나올 수 있다.여사 라인의 국정 조언, 인사 개입 의혹도 소지 자체를 제거해 놓아야 한다. 백번양보해 친윤 그룹과 여사 라인의 내부 조언자 역할을 인정한다 치자. 그런데 그들이 그럴 수준과 능력이 되는가부터 의심스럽다. 대선 때 전두환 관련 발언 논란 당시 ‘개 사과’ 사진을 내놓는 수준을 보라. 취임초 연예인 개인 SNS 홍보용 같은 여사 사진들을 내걸던 홍보마인드를 보라. 당 대표를 쫓아내는 방식, 연판장 돌리기도 마찬가지다. 남의 눈으로 내 행동을 바라보는 능력의 결핍,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 사냥감만 물어뜯는 단세포 수준 전략 능력의 결과물들이다.새로 선출될 집권당 대표에게 나라가 처한 중대한 국가적 주제에 천착하라고 하기 앞서 우선적으로 대통령 부인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문하는 것 자체가 참담하기 짝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대한민국을 지켜가야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 전체에 참으로 절박한 우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필자는 ‘이재명’만을 소재로 칼럼을 쓴 적이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대표의 정치는 자신의 의도와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선악·장단점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므로 칼럼으로 분석할 만큼 다층적인 소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난 총선의 비명학살 친명횡재 공천과 이 대표의 언행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짚어 봐야할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그것은 이재명식 정치가 청소년의 교육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지탱해 온 가치관에 미칠 폐해다.아무리 갈등이 심하고 독재와 야합의 역사가 있었어도 대한민국 헌정사는 양심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길로 흘러왔다. 험난해도 옳은 길을 택하면 결국 보상받았고 탐욕은 불이익으로 돌아왔다. 사필귀정이 통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의 당 장악 욕심은 몇 배 큰 부메랑이 되어 윤 대통령을 징벌했고, 친박공천 욕심은 박근혜를 징벌했다. 노무현은 지역감정에 도전하려고 현실적 불이익을 무릅썼고 결국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재명이 등장하면서 이런 공식이 허물어져 버렸다. 무수한 거짓말과 안면몰수하고 자행하는 장애물 제거, 내부 숙청…. 정상 사회에서라면 곧바로 징벌당할 행동들이 현실에서 이득으로 귀결됐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과 이재명 정치의 현실은 정반대다.이재명식 거짓말은 범인(凡人)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첫째, 그냥 거짓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악마로 추락시킨다. 그는 자신과의 불륜관계를 털어놓은 여배우를 허언증 환자로 매도했다. 개인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지 않지만 이 점만은 지적하고 싶다. 불륜이나 유부남 사칭을 저지르는 남자들은 더러 있어도, 상대 여성을 허언증 환자로 매도하는 남자는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다가, 빌거나 도망다니기에 급급할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들먹여 겁박하거나 정신질환자로 몰아붙이는 뻔뻔함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필자에게 따지고 싶을 것이다. 여배우의 일방적 주장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고 이런 논지를 펴느냐고. 필자는 그 여배우가 이재명 변호사가 2010년 성남시장이라는 공인이 되기 이전부터 그와의 관계에 대해 지인들에게 토로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재명이라는 변호사와 이러저러한 관계가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공천을 받으려 뛰는데 이건 문제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상대 남자가 훗날 시장, 도지사, 유명 정치인이 될 걸 예상하고 미리 이런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 퍼뜨렸을 가능성은 1%도 안 될 것이다.이 대표는 형수 쌍욕으로 궁지에 몰리자 친형과 형수가 패륜행위자라고 주장했다. 김성태 쌍방울 전 회장을 지칭할 때는 ‘조폭 출신’이라는 표현을 빼놓지 않는다.이재명식 거짓말의 또 하나 특징은 논거 자체가 팩트가 아닌 경우가 잦다는 점이다. 누구든 논거를 들며 주장을 펼 때 논거로 제시한 내용 자체는 팩트임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1년 전 다른 재판 때는 이랬는데 이번엔 정반대 판결이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번 게 잘못됐구나’ 또는 ‘이번은 상황이 다르니 1년 전과 달라도 잘못된 게 아니다’는 반응을 한다. ‘1년 전 재판이 이랬다’는 예시 자체가 사실과 다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그 점을 노려 사실과 다른 내용의 논거들을 던진다. 지지 집단 구성원들의 머릿속 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재무장용 논리를 제공하려는 의도다. 이런 정치가 청소년의 가치관에 미칠 부정적 학습효과는 측정조차 겁난다. 정치는 몇 년이지만 교육은 백년, 이백년을 간다.주군(主君)에게 노골적 아부를 해대고 상대 진영을 물어뜯는 데 앞장선 이들이 한결같이 최고의 보상을 받았고, 조응천을 비롯해 합리적 목소리를 내고 상대적으로 상식과 정도를 지키려 했던 이들은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과거에는 노골적으로 사당화 공천을 하면 국민이 이를 응징했는데, 이번엔 아무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윤석열과 김건희’라는 강력한 후원 에너지의 영향이기도 하다.그러니 “당의 아버지” 아첨까지 나오는 막장극이 생중계되고 있다. 그 집단 내부엔 어떤 은밀한 거래가 숨어 있을까. 4건의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이 대표가 변호사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3월 말 국회가 공개한 이 대표의 재산 신고액은 31억1527만 원이다. 한 해 전보다 3억3257만 원 줄었는데 대부분 아파트 공시가 하락에 따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 대표와 측근들 사건의 변호사 5명이 ‘공천=당선’ 지역에 공천돼 매관매직 비판이 일었는데 이런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변호사비 내역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 삼권분립이라는 기둥들 위에 정의·공정에 대한 믿음이 뭉쳐져 굴러가는 공동체다. 그런데 이재명식 정치는 사필귀정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합법의 외피를 쓴 사법절차 교란으로 시스템의 기둥을 흔들고 있다.‘이재명 문제’는 도덕성 각성 촉구 차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사법시스템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재판이 지연돼 이 대표가 피고인인 상태로 대선이 치러지고 만약 승리할 경우 국민의 절반은 그 정당성을 흔쾌히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반대로 대선을 목전에 두고 만약 유죄가 확정돼 피선거권이 박탈된다면 국민의 다른 절반이 민란 수준으로 저항할 것이다.유죄든 무죄든 조속히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거짓말과 사술(詐術)의 정치로 인해 공동체의 정신적 토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사법부마저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붕괴를 막을 길이 없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보수진영의 귀한 자산이다. 왼쪽을 보면 위선과 거짓의 표본 같은 삶을 살아온 포퓰리스트 범죄혐의자들이 정권 장악을 목전에 둔 듯 기세를 올리고, 오른쪽을 보면 오만한 리더십이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를 망각한 채 자기 부인 감싸기를 국정 성공보다 우선시하는 절망적 현실에서 보수층 상당수가 한동훈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2027년 대선은 한동훈의 시간이 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첫째, 국민이 두 번 연속 검사 대통령을 뽑아줄 가능성이 크지 않으며 둘째, ‘가진 자·기득권·귀족 엘리트’ 이미지를 탈피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동훈이 대선 무대에 오르면 야당과 좌파는 ‘2기 검찰정권’ 프레임으로 맹공을 퍼부을 것이다. “예전엔 군군(軍軍)이더니 이젠 검검(檢檢) 하겠다는 거냐”며 자극할 것이다.‘검찰 독재’ 선동에 고개를 젓는 이성적 국민들도 검사 스타일 리더십에는 진저리를 치게 된 게 현실이다. 정무감각 결핍, 오만한 언행, 일방적 메시지 전달, 엘리트 의식, 일단 잡아들인 뒤 용의자를 좁혀가듯 먼저 던져놓고 뒷수습하는 정책추진 방식…. 지난 2년 동안 민낯을 드러낸 이런 리더십 중 상당 부분은 개인의 캐릭터 탓일 수 있는데도 국민은 ‘평생 검사만 했기 때문에 저런다’는 인식을 갖는 게 현실이다.5공 청산 이후 육사 출신들이 “선배들 잘못 때문에 최소 한 세대 이상은 걸러야 한다. 정치 근처에 가지도 말라”고 스스로를 옥죄었듯이, 한동훈은 대신 속죄하듯 고개를 숙여야 한다. 검사 출신이라는 굴레가 사라지려면 그런 노력이 쌓이고 쌓여야 한다. 지난 총선 때 야당 내에선 한동훈의 타워팰리스 거주, 처남(전직 검사) 문제 등을 집중 공격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나중에 써먹자”며 미뤘다. 좌파의 그런 행태야 상수(常數)로 여긴다 해도 두뇌 지위 재산 집안 등 모든 걸 갖춘 채 갑(甲)으로 살아왔다는 이미지는 한국 사회에서 대권 쟁취에 상당한 족쇄가 될 수 있다.‘저 사람이 진정으로 우리 을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풀어줘야 한다. 당 대표나 대선후보 자리에 앉아 양극화, 서민, 민생의 아픔을 아무리 얘기해도 국민의 가슴에 와닿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허들을 넘으려면 오랜 시간 민생 곁에 뒹굴며 공을 들여야 한다. 정무감각 제로 대통령을 겪으면서 국민은 정치 초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다. 의원은 정치에 뛰어들자마자 할수 있어도 대통령은 다르다. 장군(제너럴)이 되면 병과가 없어지듯 대통령은 종합적 판단과 통찰을 할 수 있는 경륜이 필수적이다.한동훈은 젊다. 서민을 위한 무료 변론 활동을 하거나 보궐선거 또는 시도지사 선거에 나가 재선의원이나 재선 시도지사로 정치 행정 경륜을 쌓아도 2032년 대선 때 59세에 불과하다. 한동훈은 최근 지인들에게 고령운전자면허, 의대 증원 논란 등을 거론하며 “전통적 지지 기반이 다 허물어지고 있다. 당이 막아줘야 하는데 그걸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당 대표 출마를 시사했다고 한다.윤 대통령과는 화해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사실 누가 대표가 되든 대통령과의 긴장 관계는 불가피하다. 새 당 지도부는 대통령에게 김건희 여사 문제를 국민 눈높이에 맞게 공정하고 엄중하게 처리하고,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정권 내 여사 라인을 쳐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요구를 윤 대통령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수용한다면 정권 성공의 에너지가 생기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보이지는 않는다.대통령과 여사 라인은 당 대표가 대권 욕심에 저런다며 반발하고 친윤계가 난리칠 것이다. 코끼리들이 싸우면 잔디가 뭉개지듯 보수진영이 풍비박산 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이 이런 최소한의 민의마저 관철시키지 못하면 보수진영의 미래는 없다.그러므로 새 지도부는 대통령 부부가 반발할 명분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로 꾸려져야한다. 최악의 충돌 상황을 피하면서도 윤 대통령을 부인 감싸기에서 탈피해 정상 코스로 견인하려면 대권 등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보수 재건에만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예를 들어 도봉갑 김재섭 의원처럼 아주 새로운 인물이거나, 그런 새 얼굴을 찾기 어렵다면 아주 노련하고 정교한 관리자가 필요하다.어정쩡한 대권 주자들, 얼굴만 많이 알려졌을 뿐 혁신 이미지는 없는 낡은 중진 정치인들로선 가망이 없다. 게다가 대선주자는 당헌당규상 대선 1년 6개월 전에는 대표직을 사퇴해야 하므로 2년 대표 임기 중 절반 밖에 못 채운다.흔히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평생 한번 밖에 안 온다”는 말을 한다. 한동훈 주변에서도 그런 말로 부추길 것이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서둘러 나섰다 실패한 이들의 선례를 보면 대개는 주변의 부추김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한동훈 주변에도 비공식 정무팀이라 할 만한 도움을 주는 그룹이 있다. 장인(진형구 전 대전고검장)의 고교 동문이며 안기부 고위 간부를 지낸 원로급 인물, 정치부 기자 출신 인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기회는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는 말은 자체 발광 능력이 없는 사람이 운좋게 바람을 탔을 때의 경우에만 맞는다. 한동훈은 보수 정치인으로선 이례적으로 상당한 팬덤을 갖고 있고 스타 정치인이 될 여러 매력 포인트를 지녔다. 국가 미래를 위해 어떤 지도자가 될 것인지 고심하는 모습, 진정으로 서민의 삶에 다가가는 모습을 통해 숙성 과정을 거쳐 단단해진다면 기회는 언제든 온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정치적 기술이나 특장점 한두 개만으로 쟁취되지 않는다. 역사 앞에 겸손하며 국민의 요구가 절실하고 충만할 때만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에게 국민이 요구하는 변화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만이라는 그 뿌리에서 2년간 숱한 썩은 가지들이 뻗어났다.‘내 부인은 예외’라는 오만이 여사 문제를 산사태로 키웠고, ‘여당은 대통령 직속 부대여야 한다’는 오만이 당 대표를 쫒아내고 전당대회 룰을 바꾸는 꼼수정치로 이어져 당을 풍비박산 냈다. ‘당신이 뭘 알어’라는 오만이 주변의 언로를 막았고, ‘당신들이 검사보다 똑똑해?’라는 오만이 편중인사, 검찰공화국 프레임을 키웠다.총선 참패 한달. 대통령은 ‘겸손한 윤석열’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가. 고개를 흔들 사람이 많을 것이다. 21개월 만의 기자회견에서도 근본적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윤 대통령에겐 두 번의 거듭날 기회가 있었다. 강서 보선 참패 직후와 연초 KBS와의 대담이었는데 다 놓쳤다. 특히 KBS대담에서 핸드백 문제에 대해 “정말로 죄송하다. 절대로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며 진솔하게 사과하지 않고 “아쉽다”며 눙치고 넘어감으로써 국민 마음 속에 “그래? 두고 보자”는 응어리를 맺게 해 총선 참패로 귀결됐다. 문제는 핸드백 자체가 아니라 그걸 풀어가는 자세였는데 몰랐던 것이다. 이번 회견에서도 부인 문제에서 태도의 대전환을 이뤄 공정과 상식의 솔선수범자로 돌아가려는 진심을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될까.꼼수정치, 비선정치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윤 대통령은 총선 직후 홍준표 대구시장뿐만 아니라 오세훈 서울시장, 나경원 당선인 등도 따로따로 불러 만났다고 한다. 기존에 윤 대통령은 온 나라가 엑스포 유치에 올인하는데 오 시장은 대통령실과 협의 없이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따로 뛰어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오 시장이 지난해 초 한남동 새 시장 공관에 입주한 뒤 대통령을 초대했으나 윤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로 오라고 했고 여기에 권영세 의원 등 다른 사람들도 불러 독대 자리를 자연스레 무산시켰다고 한다. 나경원 당선인과도 전당대회 때 핍박했던 역사가 있다.오 시장, 나 당선인과의 면담 이후 나 당선인이 당 대표로 오 시장의 대권 도전을 지원하고 오 시장은 나 당선인의 차기 서울시장 도전을 돕는다는 동맹 구축설이 여권 내에서 돌고 있다.문제는 윤 대통령에게 절실한 정치의 복원은 이런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재명 대표와의 회동에 함성득 임혁백 라인이 일정 부분 관여했다는 것도 대통령이 비공식라인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야당 대표와의 회담은 당연히 여당 지도부를 통해 이뤄져야 마땅하다. 박영선 총리설 파동에 이어 비선라인 의혹이 또 일게 된 것이다.게다가 총선에 나갔던 이원모 비서관을 복귀시킨다는데, 그가 아무리 유능해도 부인이 김건희 여사의 유럽 순방에 동행한 사실이 온 나라에 각인된 인물의 회전문 등용이 국민에게 어떻게 비치겠는가. 국민이 총선에서 버리라고 요구한 ‘작은 정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총선민심은 대통령의 환골탈태를 요구했고, 윤 대통령도 여러 변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실제로 바뀌어야 할 ‘작은 정치’, 부인 감싸기는 큰 변화의 기미가 없는데 정작 엉뚱한 데서 변화의 조짐들이 보인다.한 예로 육사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백지화하려 한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홍 장군을 높이 기리고 추모’하는 것과, ‘독립군이 몰살 당한 자유시 참변 관련 의혹과 소련공산당 경력 등이 육사 생도의 전범(典範)으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으니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 모시자’는 주장은 배치되는 게 아니다. 민간·학계에서 문제제기와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채 문제제기 방식이 관 주도로 된 것은 아쉽지만, 문재인 정권이 육사의 정체성을 바꾸려는 의도로 벌인 일을 바로잡겠다는 취지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데도 총선에서 지니까 발을 빼려는 것은 뚜렷한 철학과 역사관이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야당이 요구하는 국정기조전환을 국정방향과 국정태도로 구분해 보자. 연금개혁 노동개혁 원전정책 가치동맹외교 등 국정방향은 전환 대상이 아니다. 전환해야 하는 것은 정책 변화를 이끌어가는 윤 대통령의 소통방식 등 태도일 뿐이다. 국정방향을 전환하라면 문재인 때처럼 낡은 좌파이론 실험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공중파를 진영의 도구로 삼아 극단으로 치닫는 좌파 방송의 횡포를 방치하자는 말인가. 좌편향된 균형추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너무 당겨 우편향을 범하는 우(愚)는 철저히 경계해야 하지만 방향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철학 소신은 확고해야 한다.대다수 국민은 이재명 대표와 야당이 잘해서 찍어준 게 아니다. “야당도 형편없지만 윤 대통령 당신이 더 잘못하고 있다”며 등을 돌린 것이다. 야당과 좌파의 잘못을 덮어주라는 게 총선민의가 아니다. 야당 편들고 총리 인사권 등 권한 다 넘겨주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 당신이 바뀌라고 회초리를 내리친 것이다대선 때 윤 후보에게 표를 주며 국민이 맡긴 소명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대표적인 게 문재인 전 대통령 문제다. 가족 관련 의혹들, 울산시장 선거 개입,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대(對) 중국 3불1한의 전말, 남북정상 USB의 실체 등등의 진실을 밝혀야 정의가 복원된다. 정치보복이 아니라 유권자에 대한 책무다.중도는 이념 때문에 떠난 게 아니다.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떠난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지적과 경고를 무시하다 총선을 그르쳤음에도 진솔한 반성과 뼈저린 현실인식이 없다면, 다음 대선은 물론이고 장기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에 상처를 입힌 정치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총선 며칠 후, 총선 결과보다 더 놀라운 얘기를 여권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전언이었다. 김건희 여사가 머지않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덧붙여졌다. ‘수많은 보수 지지자들이 울분과 절망감을 겪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 부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건가?…’ 귀를 의심하면서, 그들이 잘못 관측한 것이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의 관측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일들이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별로 변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16일 국무회의 발언에 이어, 17일 새벽엔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설 파동이 비선라인의 활동재개를 다시 확인시켜줬다. 총리·실장설은 공식 인사·정무·홍보 라인이 아니라 대통령 부부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의 원인이 한동훈 대표와 당의 잘못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공천 개입을 자제하는 등 당을 위해 “그렇게 해줬는데도” 선거를 망쳤다는 것. 부정확한 인식이다. 참패의 원인은 99% 대통령이 제공했다. 최고 지도자가 모든 허물을 안고 가야 한다는 도의적·정무적 차원에서의 표현이 아니다. 객관적·실질적으로 분석할 때 거의 전적으로 대통령이 패배요인을 제공한 선거였다. 물론 윤 대통령 이외에도 패배 원인은 100가지도 넘게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백개를 다 합쳐도 총량에서 전체 원인의 1%가 안된다. 윤 대통령이 국민 과반수의 미움을 사게 된 근본 원인은 자신의 최대 장점이고 경쟁력인 공정 이미지와 정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부인을 감싸고 돌며 사과마저 거부하고, 오만과 불통 이미지를 끊임없이 각인시켜준 결과다. 조국 추미애가 대통령 윤석열 탄생의 1등 공신이었듯, 이젠 품앗이하듯 윤 대통령이 조국 추미애 부활의 1등 공신 역할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이 힘과 권위 신뢰를 되찾으려면 공정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김 여사 문제를 국민 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수준으로 처리해 매듭짓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 다수는 이념적·당파적 스펙트럼을 좌 극단 1, 우 극단 10으로 가정할 때 4~8사이의 중도 온건진보 온건보수 성향 사람들을 뜻한다. 대통령 주변의 비선 강경파들은 “하나를 내주면 열을 요구할 것”이라고 만류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3 좌파는 하나를 받으면 열을 요구하겠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든 그러는 세력이니 대책을 세울 때 아예 고려의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다. 오로지 3~8 국민들만 바라보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들이 외면하면 정권은 고립된다.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지, 계속 감싸기만 하면 하나가 아니라 전부를 잃게 된다.첫걸음은 검찰의 엄정한 사법처리다. 김 여사를 빠른 시일 내에 공개 소환하고, 압수수색을 포함해 적극적 수사의지를 갖고 임해야 한다. “탈탈 털었다”가 대통령의 입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 저절로 나올 수준이 되어야 한다.김 여사의 유죄를 예단하는 게 아니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동원된 계좌주 91명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명이고 그나마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법리적으로 따져 결국 김 여사가 무죄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해도 엄정한 사법절차를 거쳐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명품백 사건도 김영란법 조항에 따르면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수수는 직무연관성이 있는 경우만 처벌대상이 되므로 김 여사는 법리적으로 무혐의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해도 철저한 조사와 사법절차를 거쳐 결론이 나야 한다.물론 아무리 엄혹한 수사와 재판을 거쳐도 야당은 더 거세게 특검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여론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여당 내 이탈도 없을 것이다. 국민도 특검 만능론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윤 대통령은 김 여사와 처가에 대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 대안이 없다. 감싸려 해도 결과적으로 똑같은 코스로 끌려갈 가능성이 크다. 소환 조사조차 안 받은 현 ‘봐주기’ 상태에서 특검법이 상정되면 여당 새 지도부가 사실상 동조해주거나 이탈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설령 이번에 특검을 피한다 해도 다음 대선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여사 문제를 들고나올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느 정권이든 비선 실세로 지목된 인물과 관련한 의혹이 불거진 뒤 그냥 덮고 갈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전두환 때 전경환이 그랬고. 노태우 때 박철언이 그랬고, 김영삼때 김현철이 그랬고, 김대중때 홍삼트리오가 그랬고, 이명박 때 이상득이 그랬다. 문재인 전 대통령 가족만 예외인 것은 윤 대통령이 문 전 대통령을 건드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기 때문인데, 다음 정권도 그럴까? 만에 하나 김 여사가 구속된다고 가정하자. 여야 모두 으스스 떨고 국민 사이에 동정론이 일 것이다. 판사들도 이재명, 조국 사건에 대해 야당 눈치 보기를 하기 어렵게 된다. 수백 건 쏟아질 선거사범 수사, 경기동부연합 등 종북세력 수사도 힘을 받게 된다. 비리 발생 시점이 재임 중이라면 가족의 구속수감이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이 되지만,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12년도 더 지난 결혼전 얘기다. 부인마저 심판대에 세운 대통령에게서 뿜어 나올 춘풍추상의 기세는 국정 주도권을 확실히 쥐여줄 것이다. 지도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할 때 국민에게 말이 먹히고 기강이 잡힌다.오만·불통과 부인 감싸기는 같은 맥락에서 생기는 문제다. 내가 대통령이니 가족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다는 오만, 법에 규정된 특별감찰관이라도 내가 싫으면 비워둘 수 있다는 생각, ‘내가 뭉개고 가자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라는 권위의식이 진솔한 사과 대신 “아쉽다”고 눙치고 가는 KBS 대담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을 상황을 자초했다.권위의식은 윤석열 리더십의 근본적 문제다. 취임 초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컨보이’(convoy·경호차 행렬)를 너무 좋아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참모들에게 버럭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실 주변에 ‘오대수’란 은어가 돈다. ‘오늘도 대충 수습하고 간다’는 뜻이다. 이래선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50분’이란 별명(회의 내내 본인이 말한다는 비유)이 붙을 정도로 경청보다는 가르치려드는 대화 스타일도 바꿔야 한다.당장 나라에 닥칠 상황은 험난하다 경제 환경은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고, 미국 대선, 중동전 등등 악재가 겹겹이 쌓여간다. 이를 헤쳐가며 4대개혁을 하려면 국민 신뢰가 절실하다.혹여라도 윤 대통령이 ‘여태 103석으로도 꾸려왔고 이제 108석인데 여태 해왔듯 밀고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 ‘개혁만 꾸준히 해나가면 국민이 평가해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렇게 불신당하는 상태에서는 개혁이나 정책도 힘을 받을 수 없고, 우파 대통령의 권위주의 일방통행 불통에 5년간 진저리를 친 국민은 다음 대선에서 좌파로 기울 것이다. 지금 근본적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앞으로 3년을 까먹는 건 물론이고 보수의 미래,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앞날을 망치는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사람들이 요즘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다. ①“도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판세가 정반대로 뒤집힌 거야?” ②“만약 야권이 200석 가져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야?” ③“남은 기간에 판세가 바뀔 수도 있나?” 오랜 기간 정치를 지켜봐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해 들었다. 원인 진단은 거의 일치했다. ①번 질문, 즉 불과 2,3주전만 해도 ‘비명횡사’ 공천으로 야당이 대패할 듯한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야당의 압도적 우세 판세가 형성된데 대해 전문가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 이미지’가 다시 부각된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권력자가 건방지고 오만한 것이다. 국민은 자기가 뽑은 지도자가 일하다 실수를 저질렀거나 국가경영에 차질을 빚어도 의외로 관대하며 금새 잊어준다. 그런데 국민 앞에서 오만하다든지, 뻔한 거짓말을 한다든지, 가르치려 드는 건 절대 용서치 않는다.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강서 보선 참패 직후 바뀌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민생토론에 몰두했으며, 명품백 논란 이후엔 별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김건희 여사도 사라졌다. 지지율이 올랐다.그러나 대통령은 3월 둘째 주부터 논쟁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의대 증원 반발에 직접 나서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나만이 정답’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거기다 호주 대사 문제에 대해 ‘런종섭’ ‘도피 출국’ 프레임을 건 좌파와 야당의 공세가 너무 악의적이고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중도층과 온건 보수 시민들 마저도 “이대로 출국시키면 야당에 먹잇감이 될 수 있으니 출국은 총선 뒤로 미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으나 대통령은 아랑곳없이 바로 출국시킴으로써 ‘역시 자기 고집대로만 하는 사람’ 이미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윤 대통령은 정치를 너무 쉽게 봤다. 외교와 안보, 경제는 전문가들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레 꾸려왔는데 정치는 스스로 모든 걸 아는 양 손에 쥐고 흔들려 했다. 사실은 가장 어려운 분야가 정치다. 리더십, 사회통합, 반대세력과의 관계, 언론, 선거, 민심관리, 이미지관리 등 모든 게 정치의 영역이고 그야말로 고단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평생 정치를 한 정치 9단 대통령들도 매주말 전문가들과 심층 토론을 하고 컨설턴트의 조언을 받아 선거를 치렀다.물론 오만한 권력에 대한 심판은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조국 대표 등을 비롯한 야권 지도자들은 뻔뻔함과 위선, 그리고 상대방을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계급론적 낡은 세계관까지 결합된 위험천만한 오만함을 지니고 있다.하지만 그들은 영악하다. “수년간 탈탈 털렸다” “일가도륙” 등의 주장을 끊임없이 퍼뜨려 자신들을 동정론의 대상으로 포장한다.이 대표는 판세가 유리해지니까 오만함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말이 거칠어지는데, 만약 그가 더 단수 높은 정치인이었다면 “재판 안 가도 된다”고 호언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21대에서 국민이 민주당에 많은 의석을 주셨는데 오만해서 실망시켜드렸다. 깊이 반성한다. 우리가 잘해서 지지해주시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이번에 한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그건 정부 감시 잘하면서 민생 위해 협조하라는 지시로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겠다….”현재의 야당 우세에는 한국 언론들의 무책임한 행태도 한몫했다. 좌파 진영에서 팩트들 가운데 자의적으로 뽑아 교묘하게 엉뚱한 그림을 만들면 대다수 언론은 우르르 따라간다.대파논란도 한 예다. 윤 대통령은 “875원이면 합리적”이라고만 한 게 아니다. 농협의 온갖 할인적용으로 낮춰진 가격임을 지적하며 “다른 데서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대목은 쏙 빼고, 조작된 가격에 속아 ‘이게 지금 물가수준이군’이라고 만족하며 돌아온 ‘민생과 괴리된 우둔한 지도자’ 이미지를 연출해 버린다. 대다수 언론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은채 야당 주장에 확성기를 들이대 중계하고, 대통령실이나 여당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어?어?’ 하다 당하는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돼 왔다.또한 지금의 판세에는 △비명반윤 표가 3지대로 가면 야권 표가 분산될 수 있었는데, 지역구를 내지 않는 조국 당이 등장하면서 야권표의 지역구 투표 분산을 막은 점 △더 거세진 호남권의 권력의지와 전략적 투표 행태 △집단 병리현상에 가까운 세상 뒤집기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②번 질문, 즉 야권이 200석을 넘길 경우 상황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예상은 비슷했다.개헌선을 확보하면, 문재인 대통령 시절 추진했던,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조항에서 ‘자유’ 문구를 삭제하는 게 강행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외교안보 분야도 대변화가 불가피하다. 특히 트럼프 집권 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가 거세질 텐데, 국회가 이를 받아줄 리 없어 결국 미군 감축론이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각국이 반도체 산업 지원 경쟁에 나섰지만 한국 국회에선 재벌특혜 논란이 거세져 결정이 미뤄지거나 지원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거부권이 없으니 특검이 양산되고, 퍼주기 포퓰리즘 입법이 속출할 것이다. KBS 등 공영방송을 영구적으로 좌파진영이 장악할 수 있는 법도 강행될 것이다. 좌파 영구집권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③번 질문, 즉 사전투표까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판세가 변할 수 있느냐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과거 선거 전례를 들며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필자는 가능하다고 본다.선거에 임박해 이번처럼 갑자기 여당의 수도권 지지율이 15%씩이나 떨어진 예는 없었다. 이는 과거 총선의 정권 중간평가는 국정 방향에 대한 찬반 의사 표시였던 데 비해 이번에 중도층이 민감하게 반응한 주제는 국정방향 자체가 아니라 대통령의 태도이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정책과 국정방향에 대한 평가는 선거 직전 쉽게 바뀌지 않는데 비해, 사람의 태도에 대한 호감 비호감도는 태도가 바뀌면 영향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다.따라서 윤 대통령이 이제라도 그간 오만하게 비친 대목들을 사과하고 달라지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주면 표심은 변할 수 있다. 국무회의 등에서 “호주 대사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제 본의와 다르게 국민이 납득 못 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건 결국 제 책임이다. 귀중한 젊은이의 희생과 관련된 문제였는데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서둘러 내보낸 건 경솔했다”고 유감을 표한다면 국민의 화는 상당 부분 풀릴 것이다. 이종섭 대사 본인을 위해서도 더 나은 길이다. 수사나 재판에서 결백이 입증된다면 앞으로 더 중요한 공무를 맡을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반면 만약 유죄가 된다면 지금 대사직을 유지한다한들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의대 증원에 대해서도 “협상 대표가 전권을 갖고 국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타협안을 찾아오라”고 해야 한다. 강한 리더십은 국민의 박수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때 이뤄지는데, 너무 오래 끌며 피로감과 환자 가족의 걱정을 키워왔다.남은 3년은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다. 요즘 3년은 예전의 30년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자존심과 고집을 내세우면 정권 망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보수의 미래, 자유민주주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더불어민주당의 공천파동은 한국 정치사에 기록을 세웠다. 축구에 비유하면, 반칙은 어느 팀 어느 경기에서나 발생하지만 질적 양적으로 이렇게 노골적이고 저급한 반칙이 양산된 경기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의도의 노골성, 숙청의 과격성, 수단의 저급성 차원에서 과거의 공천파동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또 하나 놀라운 현상은 반발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있다는 점이다. ‘비명횡사’당한 비명(非明)의 비명(悲鳴)이 금세 잠잠해졌다. 임종석의 잔류를 분기점으로 공천탈락자들 가운데 좌파 성향이 강한 이들은 대부분 잔류를 택했고, 김부겸의 합류 등 어느새 대동단결 모드로 접어들었다. ‘비명계 횡사자’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한 그룹은 온건 중도 성향의 인사들인데 대부분 진작 탈당했거나 이번에 탈당했다. 다른 그룹은 이념적 성향으로는 개딸 못잖게 좌파 성향이 강한 친문 인사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백의종군을 다짐하고 있다. 좌파 성향이 강할수록 잔류를 택하는 경향인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침묵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된다. 온갖 세상일에 다 간섭하고, 심사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참지 못해 안달이던 인사가 자신이 직접 신신당부했던 최측근들마저 대부분 ‘횡사’당했는데도 침묵한다.필자는 이런 흐름 속에서 좌파 진영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리모컨의 존재를 감지한다. 거역할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이들의 순종을 간접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리모컨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백낙청 임헌영 함세웅 김상근 등등 이른바 원탁회의 멤버로 불리는 좌파 진영의 ‘정신적 호메이니’들일 수도 있고, 그 너머에 좌파 지휘부가 나침반으로 삼는 더 큰 힘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거대한 힘은 특정인이나 조직일 수도 있지만, 슈퍼컴퓨터가 데이터를 종합해 답안을 제시하듯, 좌파 진영의 ‘집단적 권력의지’에서 도출되는 무형의 합의가 가이드라인처럼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리모컨이 지시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결론은 ‘이재명 중심 단일대오’로 내려졌으니, 억울해도 ‘대의’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우파정권 무력화와 좌파권력 창출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대오에서 이탈하는 자에겐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무음의 경고가 양들의 이탈을 막는 전자펄스 펜스처럼 진영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지지자 개개인도 행동대원처럼 단결한다.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에 대한 좌파 지지자들의 호응은 아무리 이 대표가 싫어도 좌파(진보)라면 모두 ‘윤석열 심판’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야 한다는 친문 지지자들의 권력의지의 발현이다. 친문 학살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지역구에서 이재명당을 찍어주겠다는 것이다.이런 흐름의 바탕에는 민노총 전교조 등 온갖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종으로 횡으로 얽혀서 거미줄같이 구축한 촘촘한 네트워크가 깔려 있다.백낙청 전교수는 대선 패배 일주일도 채 안 된 2022년 3월 16일 오마이TV에 출연해 “이재명은 김대중 이후 최고의 정치지도자”라며 민주당 장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촛불혁명을 이어가려면 우리가 반드시 점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충지 가운데 하나가 민주당”이라며 “어떻게 우리 세력이 (민주당을) 지배하고 장악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요충지의 중요성이 옛날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고, 옛날에 비해서도 의미가 더 커졌다…게다가 이재명이라는 정치지도자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이미 2년 전 대선 패배 직후부터 이재명을 거점으로 민주당 장악을 연구해온 그들에게 이 대표의 도덕성, 공인의식 수준은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다. 온갖 범죄 혐의를 받고, 은밀한 관계였다고 폭로한 상대 여성을 허언증 환자로 몰아붙이는 뻔뻔함과 도덕적 저열함이 드러나도, 입에 담을수 없는 욕설을 서슴지 않는 인성이 드러나도, 법인카드로 일제 샴푸를 사는 비천한 공인의식이 드러나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낙점의 기준은 목적 달성을 위해 안면몰수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생존력, 전투력이다. 사전투표까지 남은 시간은 3주일. 좌파 지휘부는 진영의 모든 화력을 윤석열 심판에 집중하라는 지침을 내릴 것이다. 총선 프레임을 이재명 vs 한동훈이나 좌 vs 우 대결이 아닌 오로지 윤석열 심판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다.진영 내에서 막말 파문이 터지면, 설령 그 내용이 평소 같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속으로는 말 잘했네 하고 웃고 넘겼을 수준의 발언이라도 신속하고 강한 처방을 내릴 것이다. 친명 후보 교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당과 이 대표는 온건 부드러움의 대변신 쇼를 해 중도층에 영합하고, 강경파의 불만은 조국혁신당 등에서 흡수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우파에는 그런 리모컨 존재가 없다. 진영을 견인할 정신적 지주도, 원로그룹도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국힘 지도부가 돌발 악재에 대응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의사결정 시 뭔가를 염두에 두는 듯 미적대며 자꾸 내재적 관점으로 덮으려 하고, 대통령실은 호주대사 문제 같은 악수(惡手)를 두고, 의대 증원 문제에 굳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경 대응을 거듭 외치는 바람에 한동안 잊혀진 경직된 이미지를 다시 상기시키는 국면인데도 아무도 신속히 바로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리모컨을 쥔 자들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공천 파동 뉴스에 묻힌 감이 있지만, 요즘 정말 경각심을 갖고 주시해야 하는 야권의 움직임은 더불어민주당이 반미친북 성향 세력에 최소한 10석의 국회 비례대표 의석을 할애해주기로 했다는 뉴스다.민주당은 총선용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진보당, 새진보연합, 연합정치시민회의 후보 10명을 당선 안정권에 배치키로 했다. 진보당은 해산된 통진당의 후신이고, 연합정치시민회의는 반미친북 활동가들이 만든 급진 좌파 단체다.정상적인 대의민주 시스템에선 대표권을 갖기 힘들 반체제 성향 인사들이 면책특권 등 수백가지 의원 특권을 등에 업고 국가 기밀과 정책 형성 과정에 깊숙이 접근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예고된 것이다.국가 안보에 미칠 영향과 더불어 이들의 국회 진출이 우려되는 또 하나의 대목은 나라 금고에 미칠 폐해다.사람은 누구나 공짜를 좋아한다. 회사 탕비실 디저트를 보면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자제한다. 마음속에 셀프 경계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정치권의 경우 그 셀프 자제의 강도가 좌우파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우파는 크게 한탕 해먹을지언정 좀스럽고 치사하게 보일 일은 자제하고 조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좌파는 자기 권리를 찾아먹고 공짜를 챙기는 데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대표적인 게 조국 전 장관이었다. 나라를 뒤흔든 논란 끝에 2019년 10월 14일 결국 경질되자 사직서 결재 22분 만에 서울대에 복직신청서를 냈다. 복직 신청 기한이 한 달이나 되는데도 챙길 수 있는 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먼저 타먹는다는 뇌 구조다. 이재명 대표 부부의 경기지사 시절 법인카드 사용 행각도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나 법카를 사적으로 쓰고 싶은 욕구를 때로 느끼겠지만 일제 샴푸를 사오게 하고 집에 초밥을 시켜 먹는 걸 다반사로 하는 대담함은 상상조차 어렵다.섣부른 일반화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좀스러운 거지 근성이 상대적으로 좌파에서 더 심하다’는 추론을 떨치지 못하게 만드는 화룡점정의 얘기를 최근 들었다.2022년 5월 정권 교체 시기에 청와대 업무에 관계했던 인사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를 떠나면서 관저의 집기와 가전제품은 물론 접시 수저 등 식기까지 다 가져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봄 전언식으로 돌았지만 설마 그랬을 리가 있을까하고 반신반의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해외 주재 대사관에 물어봤다. 대사가 바뀌면 대사관저 접시 한 개까지 다 재고목록에 기재해 인수인계한다고 한다. 전임자가 비품을 한 개라도 들고 가면 총무담당자가 배임으로 처벌받는단다. 대사관 관계자는 “만약 서방국가에서 퇴임하는 총리나 대통령이 관저 물품을 가져갔다면 사회 전체가 난리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에 근무할 때 장면이 생각난다. 2009년 6월 백악관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그해 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오찬을 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경선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대통령이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에서인지 시종 뒤편에서 조용히 따라다니던 클린턴 장관은 테이블 위 접시들을 들어 바닥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백악관 안주인 자리를 떠나면서 인계해 주고 간 그 접시들인지 살펴보며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문 전 대통령 부부처럼 다 가지고 떠난다는 건 아프리카 독재국가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100% 다 사비로 산 것이라 치더라도 그렇다면 입주할 때 있었던 기존 비품을 다 인계해 주고 가야 한다. 사용연한이 지나 폐기했다면 폐기 처분 기록이 있어야 한다. 김정숙 여사의 옷 최소 178벌과 장신구들도 특수활동비로 구입한 게 있다면 국가 재산으로 반납돼 있어야 한다.이런 행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심리학자에게 물었더니 “아웃사이더 심리에서 비롯된 주인의식의 결핍 탓”이라 분석했다. 즉 공짜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가미됐다는 설명이다. 오너가 회삿돈을 펑펑 쓴다고 여기는 직원이 탕비실 음식을 왕창 가방에 넣으며 상대적 보상심리를 느끼듯, 친일매국세력의 나라에서 어차피 기득권자들이 다 해먹는데 나는 이거라도 챙겨 손해를 일부 만회하겠다는 본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랏돈, 공공 재원을 아까워하고 소중히 여기는 심리가 실종된다는 것.나랏돈을 임자 없는 돈으로 여기고, 한발 늦으면 나만 바보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국회와 지자체에 진출했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결과물이 온갖 선심성 사업과 내 편 지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시민·민주 등의 수식어를 붙인 단체가 급팽창하더니 서울에서만도 2016~2020년 3339곳의 단체가 7111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평생을 제도권 밖에서 활동해온 골수 좌파 인사들이 권력에 접근할 경우 이런 행태는 극에 달할 것이다. 이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진실 공개와 법적 통제다. 관사 물건을 다 들고 갔다면 심각한 범죄 행위일 수 있는데도 왜 지금까지 공식 문제 제기가 안 됐을까. 대통령실은 문 전 대통령 부부의 행태에 개탄하면서도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좀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해 법적 대응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게 묻어버릴 일이 아니다. 좀도둑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문 전 대통령은 소상히 내역을 설명하고, 감사원은 청와대 재산 관리 실태를 조사해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명명백백히 드러내는 것은 좀스러운 일도, 정치 보복도 아니다.상상 초월 수준으로 공인(公人)의식이 결핍된 이들의 권력 진출은 우리 진영·지역 출신이라면 무조건 밀어주는 묻지 마 투표의 산물이다.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논에 어느 쪽 물을 댈지를 결정하는 투표에 앞서 저수지 물속 성분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유권자의 책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