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들에게[이승재의 무비홀릭]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입력 2020-12-04 03:00수정 2020-12-04 04:39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속 악당 ‘미스테리오’는 홀로그램을 통해 자신에 관한 환상을 조작한다. 그는 우리를 속이는 걸까, 아니면 속고 싶은 우리가 그를 원하는 걸까. 소니픽처스 제공
[1] 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는 ‘미스테리오’라는 있어 보이는 이름을 가진 악당이 나와요. 이놈은 허공에 수많은 드론을 띄운 뒤 드론에서 투사하는 홀로그램을 통해 자신에 관한 환영(幻影)을 만들어 대중을 미혹하고 우상으로 군림해요. 이놈은 악당답지 않은 철학적인 대사도 터진 입으로 내뱉어요. “Easy to fool people already fooling themselves.” “이미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속이기란 쉽다”는 뜻이지요.

맞아요. 우린 평생 누군가에게 속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나를 감쪽같이 속여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지요. 누군가의 말에 감화돼 신념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문신처럼 영혼에 새겨진 신념을 재차 확인시켜줄 누군가의 말을 우린 선택적으로 갈구하니까요.

얼마 전 인기 강사로 활동해 온 스님이 ‘남산 뷰’ 단독주택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환상이 무참히 깨지는 사건이 있었어요. 이 스님은 ‘리버 뷰’를 갖춘 미국 뉴욕의 아파트까지 소유했다는 언론의 추정 보도도 나왔지요. 돈 벌기 어렵고 집 사긴 더 어려운 이 시대에 무소유로 우릴 위로해준 스님이 ‘풀소유’였다는 실망감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치유자가 아닌 빌런으로 보게 만들었어요. 살펴보면 그 스님은 한 번도 자신이 ‘무소유’라고 말한 사실이 없어요. 스님도 자기가 한 말대로 살아갈 것이라는 우리의 부질없는 믿음이 우리 스스로를 기만한 것이지요.

속지 마세요. ‘리더십’을 강의하는 사람치고 리더십 있는 사람이 없고, ‘소통’을 강의하는 사람치고 소통이 되는 사람이 없으며, ‘행복’을 강의하는 사람치고 행복한 사람이 없고, ‘4차 산업혁명’을 강의하는 사람치고 혁신적으로 사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고 설파했던 분도 결국 스스로는 멈추질 않다가 몰락을 맞았잖아요?

주요기사
[2] 이런 의미에서, 요즘 인기가 치솟는 ‘펜트하우스’란 TV 연속극을 두고 ‘막장’이네 아니네 벌이는 논란은 의미가 없다고 저는 봐요. “개연성이 전혀 없는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이야기”라고 비난하던데, 저는 묻고 싶어요. 이상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 지구를 구하겠다는 ‘어벤져스’는 얼마나 개연성이 있지요? 말이 좋아 어벤져스지, 현실에선 딱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에 불과하지요.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것처럼 끝내주게 잘생기면서 “너 금이빨 있냐”고 묻는 전당포 아저씨는 진짜로 본 적 있나요? 만약 있다면 저의 저렴한 영혼이라도 맡길게요.

펜트하우스를 보면 저는 1초도 딴생각을 할 수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거든요. 출생의 비밀, 불륜, 빈부격차, 음모, 배신, 그리고 처절한 복수까지. 재개발 정보로 수백억 원 이익을 올리면서 돈과 성공을 위해선 영혼까지 파는 악당 주단태(엄기준)가 저는 미치도록 부러워요. 저도 수백억 원 벌고 싶고, 어여쁘고 머리 나쁜(?) 아내를 속여먹고도 싶어요. 다만 종잣돈이 매우 많이 모자라고, 재주는 더 많이 모자라고, 감방 갈까 봐 무서워 못 할 뿐이죠.

사실 이 드라마 속 오윤희(유진)처럼 최고 부유층이 산다는 ‘헤라팰리스’에서 청소 도우미로 일하다 인생홈런 날려 그곳 입주민으로 신분이 급상승할 확률은 0%예요. 요즘엔 로또 1등에 당첨되어도 강남 24평 아파트도 못 사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럼에도 우리가 펜트하우스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의 믿음 때문이에요. ‘선이 악을 이겼으면 좋겠다’는 실현 불가능하지만 간절한 믿음, 아니 환상 말이에요. 세상을 날로 먹으려는 나쁜 놈들이 노력하는 착한 사람들을 맨날 무찌르는 영화 같지 않은 현실에 상처받고 사는 우리에겐 이런 ‘막장 꿈’조차 허락되지 않는 거냐고요!

[3] 수험생 여러분, 어제 본 수능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이런 말 하니까, ‘실제론 명문대 나와 다 해먹은 놈들이 남들에겐 대학 중요치 않다는 한가한 소리나 늘어놓는다’고 의심하시지요? 맞아요. 저 명문대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제 아시겠죠? 세상에 진실을 말해주는 놈은 (부모님 빼곤) 한 놈도 없다는 사실을요. 결국 수험생 여러분의 진짜 미래를 열어주는 사람은 풀소유한 스님도 아니고, 자기계발 유튜버도 아닌, 여러분 자신이라고요!

영화 ‘메이즈 러너’를 보세요. 영화 ‘트루먼쇼’를 보세요. 여러분을 둘러싼 모든 현실은 어쩌면 미스테리오 같은 빌런들이 만들어낸 환영일지 몰라요. 돈만 아는 기성세대가 구축한 ‘성공’이란 이름의 일루전(illusion)을 용감히 깨부수세요. 진짜 인생을 찾기 위해, 세상의 끝까지 항해하세요.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수험생#스파이더맨#미스테리오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