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있는 영화의 종말[이승재의 무비홀릭]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입력 2020-11-13 03:00수정 2020-11-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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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담보’. 사채업자 성동일은 ‘담보’로 데려온 아홉 살 소녀를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그가 가야 할 곳은 감옥? CJ엔터테인먼트 제공
흑흑.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감동 스토리다. 지난 추석 때 극장 개봉해 지금까지 기신기신 롱런하는 영화 ‘담보’ 말이다. 사채업자인 성동일은 중국동포 김윤진에게 돈을 받으러 갔다가 이 여인의 아홉 살짜리 딸을 데려온다. “돈을 갚을 때까지 담보로 데리고 있겠다”면서. 이튿날 돈을 갚으러 길을 가던 김윤진은 그만 불법체류자로 당국에 붙잡혀 중국으로 강제 추방되고, 졸지에 아이의 보호자가 된 성동일은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담보’라 부르며 점점 마음을 주게 된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려면 대한민국 국적이 필요하다는 얘길 들은 성동일은 소녀를 입양한다. 결국 아이는 ‘아버지’ 성동일이 퀵서비스 맨으로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대학까지 졸업하고 훌륭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 아니나 다를까, 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버지는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기억을 잃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디서 수천 번 들어본 얘기 같지 않은가? 하지만 놀랍게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다. 바로 신파의 필수조건이다. 우린 눈물을 훔치면서 “역시 낳은 정보단 기른 정”이라며 무슨 시골 할머니들이 하는 것 같은 얘기를 해대지만, 이런 절절한 사연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성동일은 감옥에 가야 마땅한 자로 전락한다. ‘데려와 키운다’는 영화적 언어를 법률적 언어로 바꾸면 ‘납치 및 감금’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애틋한 스토리의 주인공들에게 추상(秋霜)같은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감옥에 갈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얼마 전 재개봉한 미국 영화 ‘위플래쉬(Whiplash·채찍질)’. 뉴욕 명문 음악학교의 카리스마 작렬하는 교수 플레처는 학대에 가까운 독설과 하드트레이닝으로 제자들을 키워내기로 유명하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가치 없는 말이 ‘그만하면 됐어’야”라는 플레처 교수는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드럼 연주를 시키고, “촌놈” “게이” “땅딸보” “바보××” 같은 악담을 퍼부으며 학생들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지옥도 속에서 제자들은 중도 포기하거나, 최고 음악인으로 성장하거나, 자살한다.

한국 실정법에 따르면, 플레처 교수는 폭행죄로 구속돼 2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폭언을 반복해 고통을 주는 행위도 폭행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아마도 학생들은 교수의 욕설을 ‘이때다’ 하며 휴대전화로 녹음한 뒤 SNS에 올릴 테고, 결국 교수는 잘려서 사학연금도 못 받게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법적 판단엔 무관심하다. ‘영혼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는 광기 어린 코칭은 탁월한 예술의 탄생을 위해 불가피한 또 다른 예술인가, 아니면 열등감에서 움튼, 가르침이란 이름의 자기 파괴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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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다루는 영화들을 법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환상은 가일층 무참히 깨진다. 픽사 애니메이션 중 최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2009년작 ‘업(UP)’. 평생 모험을 꿈꿔온 소년은 같은 꿈을 가진 소녀와 만나 함께 성장하며 결국 결혼하지만, 먹고사는 데 바빠 수십 년이 그냥 흐른다. 백발 할머니가 된 아내는 안타깝게도 숨지고, 할아버지는 ‘남아메리카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살자’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에다 수천 개의 풍선을 달아 띄워 올린다. 아내의 숨결이 깃든 집을 아내와 동일시하는 할아버지는 풍선을 매단 집을 짊어진 채 산 넘고 물 건너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한 지난한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가.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연상케 하는 할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발걸음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따지고 보면 범법자에 불과하다. 출국심사 없이 외국으로 나갔으니 출입국관리법 위반. 집에 풍선을 달아 ‘비행선’처럼 하늘에 두둥실 띄웠으므로 항공안전법 위반에 해당할 소지도 있다.

‘해피엔딩 프로젝트’라는 미국 영화는 또 어떤가. 89세 시골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아내를 위한 안전한 가옥을 홀로 짓는다는 이야기인데, 실화여서 더욱 감동적이다. 영화에서 할아버지는 ‘허가받지 않은 공법과 재료로 집을 지었다’는 건축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져 감옥 갈 위기에 처하지만, 할머니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한 판사가 새로 지은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선처해 준다는 영화 같은 결말이다.

그렇다. 실정법의 서슬이 아무리 시퍼럴지라도, 인간애까지 넘어서진 않았으면 하는 게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아닐까. 하지만 ‘기-승-전-집’이란 유행어에서 보듯, 요즘엔 집값이 너무 오르고 전셋값은 너무너무 올라 집을 휴머니즘의 대상으로 바라볼 ‘마음속 방구석’을 만들 여유가 한국인에겐 도통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수성가한 연예인 박나래가 남동생 결혼선물로 전셋집을 해줬다’는 감동 사연을 예능프로를 통해 전해 들은 우린 “전세금을 대신 내줬다면 증여에 해당하는데, 탈세 아니야?” “증여가 아니라 전세금을 빌려준 거라면 차용증을 작성해 공증을 받고 적정 이자율에 해당하는 이자를 꼬박꼬박 받아야 하는데, 증빙서류가 있으려나?” 같은 싸가지 없는 의심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법은 낭만을 잠식한다. 임차인과 임대인 사이에 “저는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실거주 목적으로 제 소유 집에 들어가려는 것이니 집을 빼주세요” 같은 살벌한 대화들만 오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 분쟁과 소송이 난무할 한국인의 집에 어찌 아름다운 스토리가 둥지를 틀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임대차 3법’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미친 순간이 도래한다면, 영화적 낭만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이 글에 나오는 법적 판단은 장수민 동아일보·채널A 사내변호사로부터 조언받은 것입니다.
#눈물#영화#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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