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엘리엇들, 과연 적이 아닐까[광화문에서/김현수]

김현수 산업1부 차장 입력 2020-09-22 03:00수정 2020-09-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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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1부 차장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꼼짝없이 당했다.”

2018년 5월 현대자동차그룹이 주주총회 일주일을 앞두고 지배구조 개편을 보류하겠다고 밝힌 날, 이 회사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지배구조 개편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지 한 달 만이었다.

이 관계자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트라우마로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 자문사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냥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대로 하는 게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엘리엇은 한국의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입맛대로 움직이는 힘이 막강했다”고 했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현대차는 2019년 주총에서 엘리엇 측 인사의 이사회 입성을 막았다. 이례적으로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직접 나서 투자자들을 만나고, 미래 수익률 전망까지 제시하며 믿어달라고 호소한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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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의 추억’을 되살린 이유는 최근 상법 개정안이 초미의 이슈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대기업 임원들에게 가장 걱정되는 법과 조항을 하나만 뽑아달라고 물었더니 대다수가 상법 개정안의 ‘감사위원 분리선임 및 3%룰’을 꺼냈다. 대주주는 실제 지분과 상관없이 감사위원 선임에 3%만 행사할 수 있다. ‘제2의 엘리엇’들이 감사위원으로 이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행동주의 펀드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투기세력’, ‘먹튀’로 보는 것은 무조건 친재벌적 프레임일까.

최근 행동주의 펀드의 힘은 분명히 커지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헤지펀드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가 많았다면 요즘 행동주의 펀드는 3∼5% 정도 지분만으로도 다른 주주들을 선동하면서 힘을 발휘한다. 요즘처럼 유동성이 풍부하고, 디지털화로 소액주주 연대가 가능해진 시대에 딱 맞는 효율적 공격 방식이다. 올해 엘리엇은 트위터 창업자의 퇴임을 요구했다.

통계적으로 행동주의 펀드에 공격받은 기업은 주가가 상승했다. 현대차가 엘리엇의 공격 덕에 주주 소통 능력이 높아진 것처럼 대주주 견제에도 때로 효율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중장기적으로는 투자도, 일자리도, 사회공헌 실적도 대폭 줄었다. 올해 1월 마크 디자딘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 등이 2000∼2016년 동안 헤지펀드에 공격받은 미국 기업 1324개를 분석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그렇다. 기업 규모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공격받은 지 5년이 지나자 일자리는 7%가량 하락했고, 연구개발(R&D) 투자도 9% 하락했다. 특히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약 25% 줄었다는 연구가 눈에 띈다. 연구팀이 인터뷰한 한 행동주의 펀드 매니저는 “사회공헌활동에 드는 비용은 주주 이익률 기준으로 볼 때 낭비일 뿐”이라고 했다.

행동주의 펀드 매니저의 인사 평가 기준에 사회적 책임 이행 같은 것은 없다. 제2의 엘리엇들은 일자리 창출보다 주가 수익률이 더 중요하다. 기업과 주주 간 건강한 긴장관계는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한국에서만 유독 행동주의 펀드에 힘을 실어줄 이유도 없다. 경영권 방어에 급급하며 단기 수익률을 목표로만 달려가는 기업이 한국의 미래에 바람직한 기업은 아닐 것이다.
 
김현수 산업1부 차장 kimhs@donga.com
#엘리엇#감사위원 분리선임 및 3%룰#대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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