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중반이었던 2015년 6월 25일. 박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국회가 정부 시행령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여야가 합의해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였다. 박 전 대통령은 ‘배신’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로 개정안 처리에 합의한 유승민 전 의원이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유 전 의원은 13일 후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보수 진영엔 배신자 프레임이 확산됐고, 보수의 분열과 몰락이 시작됐다. 이듬해 총선에서 180석을 노리던 새누리당은 이 프레임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했다. 배신자 또는 배신할 자를 색출하고 공천에서 배제하기 위한 ‘진박(진짜 친박근혜) 감별사’가 등장하며 ‘진박 인증샷’ 마케팅이 벌어졌다. 결국 ‘옥새 파동’ 끝에 원내 1당을 더불어민주당에 내줬다.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하던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태로 파면됐다. 이 과정에서 유 전 의원 등 비박(비박근혜) 의원 29명은 탈당했다.
이후에도 보수 진영은 배신자 프레임으로 분열됐다. 유 전 의원과 다시 손을 잡고 미래통합당으로 치른 2020년 총선은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지 못하며 참패했다. ‘30대 0선’ 이준석 전 대표, 윤석열 전 대통령, 안철수 의원이 잠시 손을 모은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선 승리했지만 정권을 탈환하자마자 배신자 프레임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당은 윤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운 이 전 대표를 축출했다. 비상계엄과 윤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선 찬탄(탄핵 찬성)과 반탄(탄핵 반대)으로 갈라져 배신자 프레임에서 허우적댔다. 이렇게 10년을 횡행한 배신자 프레임의 결과는 3연속 총선 패배와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배신자 프레임은 이제 가해자 프레임으로 진화했다. 장동혁 대표를 위시한 당권파는 한동훈 전 대표가 윤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며 가한 상처로 생긴 고름을 짜내야 한다며 한 전 대표를 제명했다. 배신의 결과는 탈당, 가해의 결과는 제명으로 응징의 수위는 더 강해졌다. 국민의힘은 6·3 지방선거도 피해자 당원들을 위로하고 강성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전략으로 나서려 한다.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 중도 외연 확장보다 피해자 보호가 먼저인 것이다.
민주당도 배신자 프레임이 횡행했지만 국민의힘과는 다른 면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발탁한 김민석 국무총리는 2002년 노무현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자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며 탈당했다. 민주당은 김 총리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으면서도 다시 받아들였고, 이재명 대통령은 총리로 임명했다. 국민의힘이 배신과 가해 프레임에 빠져든 10년 동안 민주당은 보수 인사들을 영입하는 ‘덧셈 정치’와 선거연합, 보수 이슈를 선점하는 외연 확장으로 보수 표심까지 공략해 왔다. 반면 현재의 국민의힘은 유 전 의원과 한 전 대표에게 기회를 주거나 중도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도 국민의힘과의 선거연합엔 선을 긋고 있다. 국민의힘이 달라지려면 배신과 가해 프레임부터 던져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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